대수림의 변동
다음날 알렉스가 길드에 다녀오는 동안 레이는 고급 양피지를 구입해왔다.
5서클 마법서 중 불의 마탑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언디텍트’ 마법을 필사했다.
추적을 체크하고 떨치는 마법.
서클 수준은 높지만 그렇다고 쓰임새가 큰 마법은 아니다.
그것도 마법서를 저술한 마법사의 설명과 주석은 모두 빼버렸다.
계륵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받고 모른척할 수는 없으리라.
‘마법사들의 태도가 간절하다면 완전한 자료를 나중에 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그동안 들은 대로라면 마법사들이 용병들에게 예의를 갖추며 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일은 예상대로 진행됐다.
정보 길드에서 활동을 하자, 바로 다음 날 마법사들이 병사를 앞세우고 숙소로 방문한 것이다.
거처로 부르지 않고 직접 온 것으로 보아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왕실 경비단 부단장이 병사 5명을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와 손님들을 내쫓았다.
“자,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즉시 밖으로 나가도록! 왕실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이다. 아무도 안에 있을 수 없다!”
식당 직원들을 빼고 사람들이 모두 허겁지겁 쫓겨났다.
부단장이 회색 로브 차림의 마법사 2명을 안쪽 테이블로 안내한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번개 모양의 적색 파이어 플레임이 눈에 띄는 로브.
겁에 질린 식당 주인이 쩔쩔매며 테이블로 왔다.
“저, 무엇을 시키실지···”
“아무것도 필요 없다. 투숙객 중에 알렉스 용병팀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불러와라.”
“아, 알겠습니다.”
주인은 헐레벌떡 2층으로 올라가 알렉스 팀을 찾았다.
알렉스와 레이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너희가 마법서를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맞느냐?”
둘 중 나이가 적어 보이는 마법사가 등을 뒤로 젖히고 묻는다.
당연히 앉으라는 말은 없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알렉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명령처럼 내뱉는다.
“당장 이리 가지고 오거라. 확인해야겠다.”
알렉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오만한 집단이라고 하더니 정말 무도한 자들이 아닌가.
레이가 품에서 필사한 마법서를 꺼냈다.
“오, 마침 가지고 있었구나.”
냉큼 마법서를 받더니 옆에 있는 마법사에게 책을 전하고는 같이 훑어본다.
눈썹 끝이 올라가고 눈이 위로 째진 성마른 인상의 노 마법사가 빠른 눈길로 마법서를 살폈다.
두 마법사의 얼굴에 모호한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어디서 이 마법서를 얻었느냐?”
“예전에 광산에서 일할 때 갱도가 무너지면서 헤매다가 마수의 서식처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 있던 시신 옆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 마법서 외에 다른 것은 없었느냐? 숨기는 것 없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경을 칠 것이다.”
“이미 마수에게 다 찢긴 상태라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찾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 에잉~”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던 노 마법사는 마법서를 품에 넣으며 짐짓 인상을 썼다.
“이 마법서는 너희들이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마탑에서 보관할 터이니 그리 알아라. 이만 물러가도록.”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알렉스가 나섰다.
“아시겠지만 그 마법서가 상당히 고가의 물품입니다. 그렇게 가져가시면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합니다.”
“어허, 이런 귀물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어 봐야 이걸 탐내는 놈들에게 시달리다가 빼앗기기나 할 테지. 본래 마탑의 물건이었던 것을 제자리로 돌리는 일이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거라.”
“그렇다면 한 가지 요청이 있습니다.”
“요청이라고? 쯧. 뭔지 말해보거라.”
막 일어서려던 노 마법사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이번 대수림 탐험에 저희 용병단이 참여할 수 있도록 왕실 담당자에게 말씀을 좀 해주십시오.”
“흠, 겨우 그것이 요청이냐? 그거라면 어려울 것 없지. 샤메론, 행정관에게 이자의 말을 전해주시게.”
“네, 알겠습니다.”
“자, 이만 가지.”
마법사들은 목적을 달성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알렉스와 레이의 입가에 허탈한 표정이 번졌다.
“마법사들은 저렇게 안하무인이고 막무가내인가요? 전혀 거리낌 없이 물건을 마구 빼앗아 가네요.”
“나라고 마법사를 본 적이 있어야지. 좀 독선적이고 거만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나저나 그 귀한 마법서를 대가도 없이 빼앗겨서 어쩌냐?”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원본은 따로 보관해 두었으니. 어쨌든 탐험대에는 참가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레이 덕분이야. 자, 기다리고들 있을 테니 올라가서 결과를 알려줘야지.”
며칠 후 용병 길드에 들른 알렉스는 탐험대에 선정되었음을 통보받았다.
알렉스의 방이 환호로 들썩였음은 물론이다.
3일 후 새벽.
왕성 동문 밖 마차와 방문객을 위한 작은 광장에 용병과 병사들이 도열했다.
용병들의 열은 삐뚤빼뚤하여 형식만 갖추었다.
하지만, 40명의 병사들은 선을 그은 듯 정확히 열을 맞추어 일체의 소음 없이 대기하고 있다.
탐사단에 차출된 병사들이 정예병임을 알 수 있었다.
용병은 총 3개 용병단 45명.
알렉스 용병팀만 소수일 뿐, 다른 용병단은 은패 용병에 일부 동패 용병까지 포함하여 20명씩으로 구성되었다.
성문이 열렸다.
기사 8인이 경갑 차림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오고 그 뒤로 로브를 입은 마법사 열 명이 따랐다.
날파리라도 꼬일까 조용히 출발하는 터라 특별한 형식도 없었다.
수석 기사 아케인.
사자 갈기같이 뻗은 금발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신의 사내.
그는 용병단장 3인과 병사 10인을 이끄는 조장 4인을 불러 모아 간단한 지시만 전달하고 길을 나섰다.
기사들은 말을, 마법사들에게는 마차가 있다.
하지만 용병들과 병사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터라 밤늦게서야 대수림 경계 지역에 도착했다.
하루 야영을 하고 나니 드디어 대수림으로 진입하는 날.
2명의 트래커가 가장 앞에서 길을 인도한다.
30세 전후로 보이는 곱슬머리 사내 사드.
작은 얼굴에 흉터 하나 없이 옷차림까지 깔끔한 자였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최근 왕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트래커라 한다.
그 옆에 50세 전후의 호리호리한 남자가 에르고.
작은 키에, 얼굴이 흉터투성이라 고생을 많이 한 티가 난다.
과거 유명했던 트래커였지만 최근에는 활동이 뜸한 편이라고.
그레엄 용병단이 트래커의 바로 뒤를 받쳐주었다.
그레엄은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금패 용병으로 약간 작은 키에 얼굴선이 뚜렷한 미남이었다.
알렉스가 선두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느낌이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인상은 아니군.’
알렉스가 우려한 대로 그의 첫마디는 썩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알렉스와 팀원들을 무시하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5명으로 우리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는 힘들지 않겠소? 우리 뒤에서 그냥 따라오시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구려.”
알렉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용병단이 마법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그들인가요?”
그레엄의 주위에서 그가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던 여자 용병이 곁눈질을 하며 속삭였다.
하지만 속삭였다고 하기에는 목소리가 커서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용병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저런 망할 것이···”
로잔느가 인상을 쓰며 튀어 나가려는 걸 티탄이 몸으로 막는다.
이제 시작인데 여기서부터 분란을 일으키면 곤란하다.
그들을 보고 있는 그레엄 휘하 용병들의 얼굴에도 비웃음이 가득하다.
알렉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알겠소. 그렇게 하지.”
딱히 반박하기도 어려운 말이었고, 로잔느 때문에라도 얼른 자리를 피하는 게 나았다.
알렉스 팀 뒤에는 병사 2개 조 20인이 따라왔다.
중앙에는 마법사 10인을 둘러싸고 기사 7인이 보호하는 형태.
그 뒤로 병사 2개 조, 마지막이 카르타 용병단이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카르타는 꽤 장신으로 보였는데, 웨이브 진 흑갈색 머리에 굵은 눈썹과 큰 눈이 서글서글하고 털털한 인상이다.
대수림에 접어들면서 길이 좁아진다.
이제 두 사람도 나란히 전진하기 힘들 정도였다.
100명이 넘는 긴 대열 간의 소통을 위하여 두 개 용병단에서 동패 용병 2명이 차출되었다.
두 사람은 선두와 후미를 오고 가며 정보를 보고하고 지시를 전달했다.
외수림, 그것도 바깥쪽에 산재하는 마수들은 눈치가 빨랐다.
사냥감의 냄새를 맡고 다가왔다가도 무리의 숫자를 보고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포기하곤 했다.
전신이 돌로 덮인 스톤 베어와 송곳처럼 날카로운 두 개의 뿔을 가진 파이크 엘크가 나타난 것이 위험의 전부였다.
두 몬스터는 며칠간 걷기만 하면서 답답해하던 기사들이 한꺼번에 덤벼 아무런 피해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몬스터라고 해서 긴장했는데, 협공하니 큰 어려움 없이 잡을 수 있구만.”
“하하하. 엑스퍼트의 검에 견디는 몬스터가 어디 흔하겠나!”
기사들의 자신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덩달아 병사들과 용병들도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4일째가 되어서도 탐험단은 큰 어려움 없이 전진을 계속했다.
아직까지 마기에 의한 마나 유동이 크지 않아 레이는 스캔 마법과 감각을 동시에 활성화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응? 이상한데?’
스캔에 잡히는 것이 없는데도, 감각은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이런 경우 스캔의 방향을 잘못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혹시나 해서 스캔의 범위를 하늘까지 올려보았다.
레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앗차! 이런 실수가!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놓치다니. 대형 몬스터가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숨어있을 줄이야.’
급히 전령으로 오가는 동패 용병을 불렀다.
“앞에 있는 그레엄 단장에게 전하시오.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조심하라고.”
알렉스 일행이 다가와 레이에게 묻는다.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있는 것 같아?”
“네. 이제 티탄이 앞에 서서 방패를 들고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보던 전령은 알겠다고 하고 선두로 걸어갔다.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다 하는구만.’
여자 용병 델로나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레엄은 옆의 맥슨이라는 용병과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번 탐험에서 반드시 한몫 잡아야 해. 마법사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으니, 기회를 잘 찾아보자고.”
“그럼요. 저 자만심 덩어리 바보들의 힘을 이용할 기회는 정말 흔치 않죠. 흐흐흐.”
작은 키에 갸름한 얼굴의 맥슨은 끈적거리는 눈빛을 델로나의 가슴에 보내면서 그레엄의 기분을 맞추고 있었다.
“저, 단장님. 알렉스 팀에서 전달해달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분 좋은 시간을 방해받자, 그레엄이 찌푸린 표정으로 휙 고개를 돌린다.
“뭐야? 무슨 말을 전해달라는 거지?”
“저···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조심하라고 전하랍니다.”
“푸하하하. 뭐, 좀 아는 척하고 싶은 모양인데 잘못 짚었군.”
그레엄은 이런 유형의 인간들을 종종 봐왔다.
이름 좀 알려 보겠다고 얕은 수작을 피웠다가 그게 알려져 창피를 당한다.
그러자, 만회하는 차원에서 그럴듯한 의견을 내세워 관심을 끄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곤충형 몬스터가 살지 않는 곳이라고. 하하.”
“우리가 무시하니까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듯한데, 그러려니 하시죠. 크흐흐.”
그레엄은 전령에게 알았다고 한마디 툭하고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모두 안도하고 있었지만, 두 트래커의 표정은 달랐다.
“아무래도 지형이 많이 변했습니다. 이 정도로 변화가 심한 것은 처음이군요.”
사드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 한구석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내 생각도 그렇네. 맹수형 몬스터의 출몰도 생각보다 이르네. 내수림에서 외수림 쪽으로 밀고 나오는 몬스터들이 많은 건 아닌지 걱정되는구만.”
“뭐, 일단 조금 더 계획대로 전진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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