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틴의 결심
“그만! 그만하면 되었다.”
그간 모르트가 하는 대로 두었지만, 레이의 반발만 샀다.
뒤를 쫓는다고 시간만 허비하고 얻은 것도 없는 상황.
“자네도 보면 알겠지만, 저 마크라는 자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레이 너의 정보가 필요해 데려가려 했을 뿐. 저자를 보내주어라.”
모르트가 눈을 굴려 양쪽을 쳐다본다.
“저, 마스터. 지금이 저놈을 잡을 기회인데?”
허스틴의 눈매가 사나와졌다.
모르트가 찔끔하며 내키지 않는 손길로 마크를 풀어주었다.
마크는 후다닥 달려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 다행히 제때 왔구나.”
그리고는 귓속말을 건넸다.
“저 기사 말대로 왕눈이가 거칠게 대했을 뿐 나를 해칠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그말을 듣고도 레이의 눈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났다.
“어떠냐? 네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일 것이다. 함께 조시 일당을 잡지 않겠느냐?”
비록 태도는 누그러졌지만, 레이를 내려보는 것은 여전했다.
레이도 지원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깨달은 후다.
하지만 저런 거만한 자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말을 들으니 내가 거절하면 힘으로라도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허스틴은 게이드의 무관에서 레이의 실력을 보았다.
예전보다 수준이 훨씬 상승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 해도 지금 자신들은 기사와 기사급 검사가 넷이다.
무슨 배짱으로 저리 뻣뻣하게 달려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검을 부딪쳐 보자는 이야기인가?”
그 말이 신호라도 되었을까.
레이가 마크를 뒤로 멀찌감치 밀며 그립을 잡았다.
허스틴 일행도 일제히 검을 뽑고 레이를 포위하기 시작한다.
2년 전 화산지대 파텔의 던전을 다녀왔을 때 네 명에게 둘러싸인 적이 있었다.
다리에 부상을 당한 후, 진법판의 힘을 빌어 간신히 피했었다.
협공의 위력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준 경험이었다.
이들은 아마 그때의 상황을 재현하고 싶을 것이다.
전면에 허스틴이 레이와 마주 서고, 옆쪽으로 루번이 기회를 보고 있다.
1대 1로는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다.
모르트와 조니스는 이전처럼 뒤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인다.
‘귀찮은 종자들을 먼저 처리한다.’
미쓰릴 표창의 첫 실험 상대이다.
왼손에 표창을 소환했다.
왕방울 눈의 허벅지를 표적으로 지정했다.
표창에 추적 마나를 활성화하고, 왼 손목을 허공에 튕겼다.
‘쉬익~’ 하며 미세한 파공음이 흐른다.
허스틴이 급히 경고를 날렸다.
“표창이다!”
레이가 표창을 잘 쓴다는 것은 이들도 경험한 바라 경계하고 있었다.
모르트는 표창이 워낙 빨라 눈으로 볼 수도 없었다.
몸을 옆으로 틀며, 감각에 의존해 검으로 쳐냈다.
표창은 표적이 움직인 순간 선회하며 방향을 틀었다.
다가오는 검을 우회했다.
‘퍼억!’ 하고 모르트의 허벅지를 관통한 표창이 레이의 손바닥에 돌아왔다.
“아으윽~~”
모르트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뚫린 상처에서 피가 솟는다.
‘털썩’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 손으로 허벅지의 상처를 누르며 몸을 떨었다.
표창이 움직이는 동안 조니스의 허벅지도 타겟으로 설정한 상태이다.
두 번째 표창이 곧장 조니스에게로 날아갔다.
조니스가 힐끗 모르트를 쳐다보는 찰나였다.
허벅지가 끊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솟았다.
“끄아아악~”
허스틴과 루번이 놀란 눈으로 마주 보았다.
‘틀림없이 종자들이 검으로 표창의 진로를 막았다. 그런데 마치 표창이 알아채고 피해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레이의 표정이나 자세도 예전 협공당할 때와는 달리 여유가 보인다.
‘좋지 않다.’
허스틴은 루번에게 눈짓을 했다.
동시에 공격을 하자는 신호였다.
그러나 레이가 먼저였다.
두 기사가 협공하지 못하도록 루번에게 표창을 날리며, 허스틴에게 발시언 1장을 펼쳤다.
과거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한 검이 허스틴의 가슴을 찔렀다.
루번은 복부로 표창이 날아오자, 검으로 막을 생각을 버리고 아예 몸을 옆으로 굴렀다.
선공을 놓친 허스틴은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틀며 검을 세워 공격을 튕겨냈다.
‘검을 밀어내자마자 역공한다.’
그러나 레이의 검은 이미 허스틴의 왼쪽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어깨가 따끔하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갈라진 어깨가 드러났다.
‘늦었다. 무섭게 빠르구나!’
반격을 포기하고 다시 상단 방어 자세를 취한다.
레이의 머릿속에 허공에서 휘어진 표창이 보였다.
표창은 옆으로 굴렀다가 일어나는 루번에게 날아간다.
‘아직 추적 기능이 살아있다. 기회다!’
검을 돌리며 발시언 2장을 펼친다.
허스틴의 좌우에 빛살 같은 긴 사선이 연속으로 그어진다.
- 채앵, 챙!
가까스로 두 번의 공격을 막았다고 생각한 순간.
레이의 검에서 발사된 8개의 마나 블레이드가 양쪽에 4개씩 허스틴의 몸으로 쇄도한다.
허스틴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지면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검이 몸 주위를 회전했다.
하지만 완전한 방어는 되지 못했다.
- 퍼버버벅!
검로 사이를 뚫은 몇 개의 마나 블레이드가 옆구리와 가슴을 파고들었다.
흉갑으로 막은 부위는 상처가 작았지만, 옆구리에는 깊게 파인 상처에서 피가 솟았다.
“끄으윽!”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몸이 쓰러지려 한다.
검으로 땅바닥을 찍었다.
검에 몸을 기대 가까스로 쓰러지는 수모를 피한다.
레이의 몸이 옆으로 도약하며 발시언 1장을 루번에게 투사했다.
막 표창을 피한 루번이 돌아서며 검을 내리그었지만, 레이의 검끝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다리를 찌르고 돌아간다.
“으윽!”
루번 역시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후우우~~”
레이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복부가 텅 빈 느낌이다.
대부분의 마나를 소모한 것 같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허스틴의 앞에 섰다.
“다행인 줄 아세요. 마크가 다치지 않은 데다가 기사의 신분을 고려하여 손에 사정을 두었으니. 그렇게 루퍼슨 일당의 종적에 대해 목을 맨다니, 하나 알려 드리지요. 지금 그들은 페르곤 공국의 수도 베론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경매장, 검투장 등을 운영하고 있어요. 정보를 주었으니 이후 협력 여부는 베론에서 결정하지요.”
옆으로 피해있는 마크에게 갔다.
“삼촌,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다. 하마터면 곤욕을 치를 뻔했네···”
“집으로 돌아가서 저랑 얘기 좀 해요.”
두 사람은 기사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허스틴의 앙다문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하던 정보를 얻었음에도 그의 눈은 자괴감으로 가득했다.
맞대결도 아니고 협공을 했음에도 레이를 건드리지도 못했다.
레이가 돌아가자, 기사들은 각자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모르트와 조니스는 하급 포션을 마셨다.
일시에 찾아오는 고통에 한동안 신음을 참느라 애써야만 했다.
허스틴과 루번은 아껴두었던 중급 포션을 꺼냈다.
엄청난 가격 때문에 사용하기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이동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포션이 들어가자, 허스틴의 몸을 파고들었던 마나로 인한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어갔다.
내부가 진정되면서 숨을 쉬기가 편해진다.
그러나 몸이 나아지는 것과 반대로 허스틴의 부끄러움은 줄어들지 않았다.
루번은 허스틴의 회한어린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허스틴 경. 루퍼슨 일당을 쫓는 것은 여유를 두고 천천히 계획을 세워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해리스 공자의 지원이 없어서, 이번에 집을 담보로 돈까지 빌리셨다면서요?”
루번의 말을 듣자 허스틴의 눈에 다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반드시 루퍼슨 일당을 잡아 물건을 회수하고, 놈들의 목을 잘라 자작께 바치고 말 것이다. 이리 된 이상 북대륙 공국이 무슨 문제겠는가. 집? 아예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겠다. 루번 경은 나를 따라 돕기만 하게. 레이 아니라 누가 되었든, 놈들을 잡게만 해 준다면 내 고개를 숙여야지.”
루번과 종자들은 변해버린 허스틴의 모습이 낯설었다.
기사로서의 명예와 긍지를 철칙으로 삼고 살던 원칙론자였는데.
이제 와서 물러날 곳이 없기도 했다.
해리스의 충복이었다가 내쳐졌다고 소문이 다 퍼진 지금 누가 그들을 받아줄 것인가.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보자.’
부상이 조금 나아지자, 그들은 말을 타고 성도로 돌아갔다.
집으로 들어온 레이는 큐어 마법으로 마크를 치료하고는 거실 의자에 앉아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삼촌이 그리 쉽게 당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도구도 있고요.”
“말도 마라. 이놈들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온 거였다. 소리가 날까봐 말을 마을 바깥에 세워두었더라. 목책을 빙 돌아서 집 근처로 온 후 뛰어넘은 것 같고. 문을 두드리기에 누군가 하고 살짝 내다보니 예전의 그 기사놈이더구나. 얼른 너에게 통신을 하는데, 문을 박차고 네 놈이 뛰어 들어오는 게 아니냐. 미처 대응도 하기 전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쯧···”
“삼촌, 저놈들이 여기를 알아버렸으니, 아무래도 불안해요. 지난번에 얘기한 페리스 씨의 목장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좋겠어요.”
“휴우~ 오랫동안 정든 곳이라 웬만하면 떠나고 싶지 않았는데···”
“제가 약도는 드릴 테니 내일이라도 출발하는 게 어떻겠어요? 저들은 아마 부상도 치료하고, 내가 준 정보를 확인하느라 당분간 여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하자꾸나. 새로운 삶을 개척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지, 뭐.”
다음날 마크는 짐을 챙겼다.
당장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아공간과 밀실에 보관했다.
집과 약초밭, 말은 모두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넘겼다.
자작령을 넘을 때까지는 같이 노숙을 하며 이동했다.
레이가 예상한 대로 허스틴 일행의 추격 기미는 없었다.
햄튼 백작령에 들어선 후 두 사람은 헤어졌다.
“마크,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즉시 연락해요.”
“걱정마라. 지난번에는 집에 있다가 너무 당황해서 포위당했지만, 이제 내 실력도 그리 만만하지 않다. 여차하면 마도구로 공격한 후 피해도 되고.”
“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피하고 반지로 연락하세요.”
“오히려 네가 걱정이다. 루퍼슨 일당의 조직이 보통 크지 않은 것 같은데.”
“조심해서 접근할 테니 걱정마세요. 나중에 목장에서 봐요.”
“그래, 조심해라!”
레이는 마크가 떠나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그의 모습이 길 너머로 사라지자,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했다.
레이의 모습이 빛으로 둘러싸이더니 조금 후 사라졌다.
베론으로 돌아온 레이는 루퍼슨 일당의 조직을 붕괴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뒷배인 공왕과 라비슈른 백작의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특히 왕실의 기사단이 개입하기라도 한다면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이다.
방법을 찾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다음날 용병 길드로 갔다
제국 수도 길드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랐던 인상이 아직 남아서인 듯.
보통의 길드와 다름없었는데도 어쩐지 자그마하고 한산한 느낌이다.
접수대의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이 고개를 들어 눈으로 용건을 묻는다.
쿠퍼 열 개를 밀어주었더니 표정이 환해진다.
“수도 사정에 빠삭한 용병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물론 사기꾼은 거절입니다.”
“흠. 정보에 밝은 용병이라면··· 알폰소가 딱이겠군. 실력은 별로지만, 이곳 토박이라 모르는 것이 없을 거요. 말이 많고 돈을 밝혀서 그렇지,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부류도 아니고.”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습니까?”
“그 친구야 매일 펍에 나와서 일거리를 찾고 있으니 저기 있을 거요. 보자. 그래! 저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졸고 있는 친구 보이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텅 빈 테이블에 혼자 앉아 꾸벅거리는 용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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