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먼저 던져
레이는 스캔 매직으로 석실 벽과 천장을 훑었다.
‘엇! 우측 벽 안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 마나 장벽이 안을 볼 수는 없게 막았구나.’
천장 속과 바닥 아래는 비어있다.
불안하다.
던전의 내부가 전체적으로 같은 구조이다.
단으로 천천히 올라간 프레드먼이 원탁 위를 보았다.
은빛 천으로 덮인 원탁의 가운데가 불룩이 솟아있다.
천 끝을 살살 당겨서 한쪽으로 치웠다.
원탁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사각으로 된 진청빛 함.
날카롭게 연마된 사파이어와 같은 빛깔과 고아한 곡선으로 처리된 단면, 영롱한 금빛의 이음새 사이로 느껴지는 신비로운 기운···
누가 보아도 명장의 손길로 탄생한 작품임이 분명했다.
마치 진짜 황제와 마주한 듯이 숨을 고른 프레드먼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함을 열었다.
붉은 융단의 물결 속에서 빛이 솟아오른다.
손을 대면 미끄러질 듯 부드러운 천에 곱게 싸인 황금 반지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융을 옆으로 밀치니 반지의 헤드가 나타난다.
페르세이언 황실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입을 벌린 드래곤!
‘황제의 인장이다! 검과 인장 모두 손에 넣게 되다니! 꿈만 같구나!’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뚜껑을 덮었다.
주변의 시선에 주의하며 품에 깊숙이 넣었다.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다!’
프레드먼은 원탁을 지나 후면의 벽으로 향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이다.
낡은 가죽을 감은 그립.
검신과 대칭으로 뻗은 일자형 가드.
검첨까지 너비가 일정한 검면.
‘참으로 평범해 보이는 검이 아닌가. 하지만 이 검이 루드비히 폰 페르세이언 황제가 제국을 건설할 때 손에서 떼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전설의 신물이다! 근거 없는 신화를 좇아 얼마나 많은 왕실과 귀족, 모험가들이 이 신물을 찾으려고 전 대륙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던가.’
아래에서는 기사들이 함을 열고 내용물을 보고하고 있었다.
“황실의 기록입니다.”
“보석들입니다.”
“여기는 황금입니다.”
입구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용병들이 침을 삼켰다.
커다란 함들에서 오색의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기사들은 모든 내용물을 확인한 후 함을 닫고 지시를 기다렸다.
프레드먼은 경건한 마음으로 검의 그립을 잡았다.
마수의 가죽인 듯 손때 묻은 그립은 여전히 단단하다.
황제의 체온을 느끼듯 눈을 반쯤 감은 프레드먼이 검을 걸개에서 내렸다.
검의 무게가 사라지자 눌려있던 걸개가 위로 올라가며 듣기 싫은 소음을 낸다.
- 끼이익!!
검에 정신을 뺏긴 프레드먼이나 함을 보고 있던 기사와 용병들 누구도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원탁을 덮고 있던 천으로 검을 싸서 꽉 조였다.
“자, 용병들은 들어와서 함을 두 개씩 짊어져라.”
기다렸다는 듯이 깁스가 먼저 안으로 들어오고 나머지 용병들도 발을 들였다.
검에 눌렸던 걸개가 ‘철컥’하며 제자리에 맞춰졌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후면 벽에서 시작되더니 사방의 벽으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이렇게 되자 탐사대가 이 불길한 소리를 못들을 수가 없었다.
모두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춘 채 퍼져가는 신호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갑자기 소리가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 일이 없는 건가’
안으로 들어온 용병들이 안도하며 함으로 다가갔다.
- 드드드드!
그때 갑자기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을 대려던 깁스가 ‘어어’ 하며 뒤로 물러선다.
- 쩌저적!!!
사면의 벽들이 지진을 만난 듯 수직으로 쩍쩍 갈라진다.
천에서 돌먼지가 부스스 내려오더니, 곧 돌덩이가 일행들의 머리로 떨어졌다.
“조심해! 무너진다!”
돌들을 피하려 모두 우왕좌왕하는 참이었다.
프레드먼은 인장을 지닌 채 황제의 검을 잘렝에게 넘겼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따로 들고 간다.”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전원에게 들리게 고함을 쳤다.
“퇴각한다. 기사단부터 나를 따라라!”
프레드먼이 열린 문틈으로 뛰어나갔다.
기사 한 사람이 쏜살같이 달려 뒤를 따른다.
그때 흔들리던 벽 귀퉁이가 깨지면서 붙들고 있던 육중한 청동문을 놓고 말았다.
- 퍼퍼펑!
청동문을 지탱하던 경첩과 철편들이 터져나갔다.
곧이어 귀를 찢는 ‘끼기긱’하는 소음이 이어졌다.
문이 기울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수십 톤의 무게가 공동의 돌바닥을 때렸다.
- 콰아아아앙!!!!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공동에 메아리치고, 바닥이 진동했다.
아래에서 쩌적거리며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라. 바닥에 금이 가고 있다.”
프레드먼이 앞에서 달리며 뒤를 보고 외쳤다.
기사단 전원이 문이 사라진 텅빈 공간을 뛰어나가 청동문을 밟고 도약했다.
순간 던전 전체가 좌우로 격심하게 흔들렸다.
- 우르르르르!!!
“멈춰! 내려앉는다!”
“안돼!”
석실 밖 공동 바닥이 반 이상 아래로 꺼져 내려갔다.
- 콰콰콰콰!!
잘렝을 포함한 기사 세 사람이 청동문과 돌, 흙덩이와 함께 검게 입을 벌린 균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프레드먼이 멀어져가는 그를 향해 안타깝게 손을 뻗었다.
“잘레엥!!”
잘렝의 얼굴이 당황과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탄식을 내뱉는 순간.
가슴에 품은 검이 느껴진다.
‘헉! 검만은 안된다. 이걸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인데!’
잘렝의 눈에 한가닥 불꽃이 피어올랐다.
청동문 위에 넘어진 채 떨어지던 그가 급박하게 오러를 왼손으로 이끌었다.
채 오러가 모이기도 전에 황급히 전력으로 문을 내리쳤다.
몸의 우측에 미약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하아압!”
즉시 기운을 모아 오른손에 든 검을 힘껏 위로 던졌다.
전력을 다했지만 아래로 꺼져가는 중이라 일행에게 도달하기에는 못 미치는 힘이었다.
석실 끄트머리에 서 있던 레이가 재빨리 엎드렸다.
허리를 최대한 숙이고 윈드 매직을 펼쳤다.
바람이 검을 휘감더니 레이의 손으로 이끌었다.
‘잡았다!’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에도 바닥이 계속 내려앉고 있었다.
수십 미터의 너비로 푹 꺼진 바닥 저 너머.
프레드먼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레이를 보고 있었다.
검이 안전한 것을 확인하자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떤다.
“레이~ 정말 잘했네. 검을 이리로 던지게! 어서!”
‘후두둑’ 떨어지는 돌들 사이로 그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급히 외쳤다.
레이는 청동문의 고리에 묶인 밧줄을 풀며 소리쳤다.
“밧줄을 던질 테니 잡아주세요. 밧줄로 건너가겠습니다.”
균열이 쉬지 않고 커져간다.
초조해진 프레드먼은 더 크게 소리쳤다.
“알았네. 일단 검부터 던지게. 제발!!”
레이에게 검이 있는 한 프레드먼은 안심하지 못했다.
잠깐 고민하는 듯했지만, 레이는 금세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도 쓸모없는 물건이다. 프레드먼을 믿어보는 수밖에. 그래도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은 아니었으니.’
검을 들어 심호흡을 한 다음 던졌다.
- 쐐애액!
창처럼 날아간 검이 프레드먼의 가슴 언저리에 도달했다.
그는 유리잔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온몸으로 받은 후 가슴에 품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검 하나를 받고도 숨이 가쁘다.
알렉스와 로잔느가 검을 뽑아 레이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들을 쳐냈다.
레이는 밧줄에 돌덩이 하나를 묶더니 ‘붕붕’ 돌렸다.
충분히 속도가 올라가자, 프레드먼에게 돌을 날렸다.
순간 남은 공동의 바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놀란 프레드먼이 전력을 다해 반대쪽으로 달렸다.
발아래 바닥이 꺼져가고 있었다.
지나왔던 10번째 통로 끝이 보인다.
몸을 던졌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공동이 무너지고 천에서 돌덩이가 쏟아져 내린다.
가까스로 10번째 통로 입구에 착지한 프레드먼이 뒤를 보았다.
이제 완전히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이 되어 버린 공동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석실 입구에 서 있는 레이가 조그맣게 보인다.
고개를 흔들던 프레드먼이 일행에게 소리쳤다.
“미안하네. 이제 어쩔 수가 없군. 무운을 비네.”
프레드먼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천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곧 던전 전체가 내려앉을 것 같다.
레이는 석실 안의 우측 벽의 숨겨진 공간을 떠올렸다.
서둘러 움직이며 급히 남은 사람들을 재촉했다.
“모두 나를 따라오세요. 어서!”
다시 석실로 들어가는 레이를 가장 먼저 알렉스팀이 주저없이 따라갔다.
그랜트와 깁스도 잠시 망설였지만 곧 뒤를 따랐다.
숨겨진 공간과 연결된 벽 한쪽을 가리킨 레이가 일행에게 말했다.
“전부 함께 전력으로 이 벽을 치는 겁니다. 제 구령에 맞춰 단 한 번에 뚫어야 해요.”
아수라장이 된 석실에서 사람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간 위기를 헤쳐 온 레이를 믿는 수밖에.
레이의 말에 따라 모두 검에 기운을 모았다.
“하나, 둘, 세엣!”
알렉스 팀의 검에는 미약한 오러가 어렸고, 그랜트도 오러 섞인 검을 휘둘렀다.
나머지는 신력을 다해 벽을 내리쳤다.
레이의 검에 솟은 마나 블레이드가 석벽을 가로로 베었다.
“콰아앙!”
공격이 모인 곳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이다!!!”
깁스가 기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한 사람씩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돌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모두 구멍 안으로 들어갈 때 레이는 머리 위로 윈드 쉴드를 소환했다.
‘여기 보물들을 놔두고 갈 수는 없지.’
석실에 자신만 남자, 양쪽 벽을 따라 달리며 정신없이 흑단함들을 아공간에 수납했다.
마지막에 벽에 붙은 방패가 보인다.
도약했다.
단위로 한 발, 원탁을 넘으며 또 한 발, 마지막으로 벽으로 뛰며 또 한 발.
방패에 손을 대고 떼어내자마자 아공간으로 넣었다.
-끼이익!!
검을 들었을 때 들렸던 저주스러운 소리가 반복됐다.
벽을 박차며 밀실로 몸을 날렸다.
레이의 발이 밀실 앞 바닥을 차려는 순간.
- 쿠쿠쿵!
단 전체가 무너지며 바닥이 꺼진다.
발아래가 검은 허공으로 변했다.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는다.
몸이 균열 속으로 떨어지고 있다.
얼굴이 새파래진 레이가 급하게 윈드 쉴드를 아래로 이동시켰다.
발끝에 닿는 윈드 쉴드를 박차고 뛰었다.
위에 일행들이 뚫은 구멍이 보인다.
단단한 바닥을 딛고 뛴 것이 아니라 힘이 모자라다.
팔을 쭉 뻗었다.
가까스로 손가락 끝에 구멍의 가장자리가 닿는다.
‘이야압’ 하고 속으로 기합을 지르며 손가락에 힘을 주고 매달렸다.
‘찌릿’ 하는 통증이 느껴진다.
날카롭게 깨진 돌조각이 손가락을 파고든다.
손을 좀 더 단단하게 고쳐 잡았다.
뾰족한 돌조각이 손바닥 전체를 찌르며 피가 튀었다.
송곳으로 찔린 듯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았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돌아보니 석실이 아예 사라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블랙홀만 남았다.
그런데도 던전 전체의 흔들림은 가라앉기는커녕 커져만 간다.
속으로 ‘큐어’를 외치며 손에 힘을 주고 구멍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모두들 레이를 기다리고 있다.
들어온 곳은 아무런 집기도 없는 정방형 밀실이었다.
나무 상자만 수십 개가 쌓여 있을 뿐.
사방 어디에도 문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도 천이 진동하기 시작하는데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모두들 당황하고 있다.
낡고 평범한 상자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이곳저곳 벽을 두드려 보지만 둔중한 울림뿐이다.
아무 곳이나 부쉈다가 이 밀실마저 붕괴하면 끝이다.
“레이, 문이 보이지 않아.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어떡하지?”
흔들리는 천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머리를 두드린다.
붕괴가 머지않은 것 같다.
스캔 마법으로 사방 벽을 살폈다.
한쪽 벽에서 마나의 유동이 느껴진다.
‘여기구나! 이쪽 벽이 출구다!’
건너편이 보이지는 않지만. 마나가 벽의 형태로 환상을 만들고 있는게 확실하다.
주먹으로 두드려 보았다.
단단한 벽의 촉감뿐이다.
단검 끝으로 찍어보았다.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다.
‘강력한 진이다. 마법을 보여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는 것은 어렵겠다.’
다시 모두를 불러 모았다.
“여기가 위장된 문이에요. 아까 구멍을 뚫을 때처럼 힘을 합해 전력으로 쳐야 열릴 겁니다. 단 한 번에 온 힘을 쏟는다는 기분으로 이곳을 타격합니다.”
레이가 구령을 외치며 한 곳을 가리켰다.
“하나~ 둘~ 세엣!”
오러와 검이 벽의 한 점을 집중해서 타격했다.
- 꽈아앙!
충격이 가해진 한점을 중심으로 벽이 일그러졌다.
파문처럼 진동이 벽 전체에 퍼져나갔다.
충격이 집중된 곳의 환상이 깨지며 구멍이 생기고, 그 주변의 모습이 일렁인다.
구멍 너머로 건너편의 공간이 보였다.
출렁이는 벽의 진동이 조금씩 줄어든다.
구멍이 다시 좁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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