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의 탈출
지하 3층에서 밀리고 있던 검투사들이 모두 올라왔다.
그들은 루포릭의 등을 보며 통로로 뛰어나갔다.
경기장으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간 검투사들은 천정으로 향한 줄사다리를 발견했다.
펄쩍 뛰어 매달린 후 온 힘을 다해 위로 올라갔다.
천장 위에서 애드먼이 검투사들을 끌어올렸다.
“헉헉! 고맙소!”
30대 중반 정도의 마른 사내가 가장 먼저 올라왔다.
“자, 여기 줄을 저기 밧줄에 걸고 매달리시오. 미끄러져 내려가면 그물에 걸릴 테니 즉시 뛰어내려, 약속된 건물로 달려가시오.”
“알겠소. 정말 감사드리오.”
사내는 나무까지 이어진 밧줄에 줄을 걸고는 검투장 지붕을 몇 걸음 달려가다가 쭈욱 미끄러저 내려갔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사내는 추운 것보다 마음이 확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며 날아갔다.
‘철렁’하며 그물이 걸리는 순간 땅으로 착지했다.
사방을 둘러보다가 화살표가 그려진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 사내들의 그림자가 연이어 떨어지며 뒤따랐다.
골목에 숨어있던 알렉스와 티탄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언가 소란이 이는 듯하다.
두 사람은 복면을 쓰고 외곽 경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여기도 적이다!!”
“두 놈이다!”
“잡아라!”
지하로 내려가는 1층 경비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이들을 유인했다.
두 사람은 좌우로 흩어져 오러를 보이지 않게 감춘 채 검술만으로 경비들을 상대했다.
한 사람에게 서너 명이 한꺼번에 검을 찔러온다.
- 챙, 챙!
알렉스는 검끝을 회전시켜 공격을 막으며 옆으로 달렸다.
티탄은 대검을 윙윙거리며 좌우로 휘둘렀다.
다수로 달려들던 경비대원들이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알렉스는 경비들의 눈에는 곧 잡힐 것만 같았다.
“포위해라! 도망가지 못하게 해!”
몇 명이 알렉스의 뒤로 돌아가려 계속 시도했다.
하지만 주위를 살피며 틈을 내주지 않는 그를 포위하는 것은 보기만큼 쉽지 않았다.
지하 2층 복도는 트레비와 로잔느, 그리고 루포릭에 막혔다.
그러자 지상에서 내려간 경비들은 아예 경기장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왔다.
“검투사들이 사다리로 탈출한다!”
결국 탈출로가 발견되었다.
달려온 경비 몇 명이 어깨에서 크로스 보우를 꺼내 자세를 잡는다.
‘투웅!’하며 가장 먼저 날아간 볼트가 줄에 매달려 있던 검투사의 허벅지에 꽂혔다.
“아악!” 하며 검투사가 몸을 뒤튼다.
줄사다리가 꼬이며 매달린 검투사들이 모두 비명을 질렀다.
“크로스 보우다! 조심해!”
‘퉁, 퉁!’하며 두 번째, 세 번째 볼트가 계속 검투사들에게 날아갔다.
총 다섯 발의 볼트가 발사되었다.
좌우로 몸을 흔들며 피하려 애썼지만, 몇 명의 팔과 다리에 볼트가 박혔다.
“저놈들부터 막아!”
사다리 밑에 있던 검투사들이 관중석 위로 뛰어올랐다.
관중석의 계단에서 새로운 전투가 벌어졌다.
크로스 보우를 막는 동안 부상자들을 부축하여 위로 올렸다.
치료실에 있던 부상자들 중에도 운신할 수 있는 자들이 합류했다.
발터 일당 셋과 레이가 마주 선 채 마나를 응집했다.
서로 강력한 한 수를 준비하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마나 운용에 빠른 레이가 먼저였다.
‘발터의 방어막은 직선 공격으로는 뚫을 수 없다.’
레이는 최근에 익힌 공간 공격을 떠올렸다.
‘스노우 블라섬’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꽃.
공간을 채우며 선회하여 날리는 화염은 막을 방법이 없다.
하복부에서 마나가 파도처럼 밀려 올라왔다.
마나를 검 끝에 몰아서 누르고 또 눌렀다.
검신에 은회색 마나가 쌓여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다.
팔과 검이 폭발할 것 같이 마나를 응축한 순간.
‘스노우 블라섬!’
레이의 기합과 함께 그다지 크지 않은 폭음이 검첨에서 퍼져나갔다.
- 퍼엉!!
그 순간 눈꽃 같은 수많은 마나의 화염이 회랑을 채우며 쏘아졌다.
긴 동작 같지만, 발터와 두 검사에게는 마주 보고 자세를 취한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오러 공격이다. 막아라!”
발터의 말에 두 호위는 각자 검막을 펼치며 전면을 방어했다.
그러나 스노우 블라섬은 상대의 앞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격이다.
마나의 눈송이가 천장으로 올라가더니 화산의 불꽃들처럼 쏟아져 내렸다.
직선이 아니라 좌우로, 위아래로, 때로는 옆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발터는 빠르게 방어막을 위로 올렸다.
불꽃들은 검이든 사람이든 닿자마자 폭발하기 시작했다.
- 펑, 퍼벙, 펑!
작지만 셀 수 없는 화염들이 세 사람을 휘감았다.
처음에는 몇 개의 불꽃이 몸에서 터졌지만, 방어가 약화되면서 수백 개의 화염이 이들의 몸에 부딪혀 폭발했다.
세 사람의 몸과 주변으로 불길이 몰아치며 타올랐다.
“으아아악!!”
얼굴과 몸이 불길에 이글거리며 타들어가자, 호위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머리카락을 털고, 손으로 옷을 두드린다.
표창 세 개를 소환해 마나를 싣고 뿌렸다.
‘쇄액~’하는 미세한 소음과 함께 표창이 두 호위에게 날아왔다.
뭔가 다가오는 느낌에 “앗!” 하며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뜬다.
손으로 앞을 가리려 했다.
늦었다.
이미 표창이 이마를 꿰뚫고 있었다.
머리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것 같다.
‘덜컥’하고 머리가 젖혀지며, 표창이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손을 반쯤 얼굴에 올린 자세로 몸이 정지한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미세한 파공음을 들은 발터는 봉을 앞으로 내밀었다.
‘터엉!’하며 표창이 튕겨 나간다.
‘지금이다! 발터도 불길 속에서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
표창을 던짐과 동시에 레이가 발터를 향해 쇄도했다.
발시언 1장.
발터의 복부 한 점을 향해 레이의 검이 불 속을 파고들었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지만, 발터의 감각은 오히려 더 활짝 열려있었다.
상대의 기운이 쏜살같이 다가온다.
불길을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한다.
‘하나, 둘, 셋!’
레이가 사정권에 들어오자, 메이스를 최대한 길게 잡고 크게 휘둘렀다.
- 우우웅!
바람소리와 함께 불길 속에서 메이스가 튀어나왔다.
달려드는 레이의 상체를 박살낼 듯 횡으로 호선을 그린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마나를 발로 분출하며 속도를 더 높였다.
찌르던 검을 세워서 맞부딪쳤다.
- 꽈아앙~~~
폭음과 함께 검이 우측으로 튕겨졌다.
가속한 레이의 좌측 어깨가 발터의 가슴을 들이받는다.
- 뻐어억!
발터는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다.
온몸을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퍼진다.
“으윽!” 하며 처음으로 발터의 입에서 신음이 새 나왔다.
육중한 그의 몸이 뒤로 날았다.
집무실 문을 부수며 안으로 처박힌다.
레이의 몸도 굴러서 벽에 충돌하고 나서야 멈췄다.
충격으로 폐가 우그러들어 숨을 쉴 수가 없다.
내장이 진탕된 듯 입으로 피가 올라온다.
“욱욱~”
억지로 허리를 폈다.
피를 게워냈다.
“푸하학~”
크게 조여졌던 폐가 펴지며 숨이 터졌다.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며, 정신을 모았다.
‘힐링!’
복부에 회복 마나를 불어 넣었다.
기도가 열리고, 폐와 심장이 안정된다.
뒤틀렸던 내장들이 자리를 되찾는다.
벌떡 일어서서 문이 떨어져 나간 집무실을 보았다.
짓뭉개진 목제 테이블 속에서 발터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다.
‘파이어 볼!’
레이의 가슴 위에 커다란 불덩이가 피어났다.
불덩이를 압축시켰다.
화염의 마나가 축소되면서 파괴력이 응축된다.
가운데 검은 핵이 뭉쳐지면서 부피를 키웠다.
전체 불덩이의 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주위의 공기마저 태우는 것 같다.
~ 하압!
그대로 화염구를 집무실로 던졌다.
발터가 눈을 번쩍 뜬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모두 타고, 얼굴과 팔이 짓물러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다.
‘슈우웃’하고 날아오는 화염구를 메이스로 쳐낸다.
그 순간 집무실 안의 공기가 화염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쐐애액~~
공기도, 소리도 빨려 들어갔다.
집무실 안이 마치 진공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꽈드득’거리며 철판이 뒤틀리는 소음이 났다.
곧이어 거대한 폭발음이 집무실을 흔들었다.
“콰우웅!”
작은 불덩이가 마치 철구와 같은 힘으로 터져나왔다.
발터의 옷이 펑펑 뚫리면서 전신에 구멍이 생기는 듯 경련이 이어졌다.
그의 몸이 뒤로 튕겨져 벽에 부딪혀 고꾸라진다.
레이도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거대한 불꽃이 문으로 쏟아져 나와 석벽을 부수었다.
우르르거리며 석벽의 돌덩이가 떨어진다.
‘윈드!’
바람으로 불꽃들을 흘려보내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집무실 천장의 석재 덩어리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성인 몸집만 한 화강암 덩어리가 쓰러진 발터의 머리를 때렸다.
- 쿠웅, 쿵, 쿵!
돌덩이들이 쏟아지면서 집무실안에 쌓였다.
흙먼지가 문으로 퍼져 나온다.
안은 완전히 무너져 마치 돌과 흙으로 막힌 갱도 같았다.
‘휴우우~’하고 길게 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한 수 한 수마다 온 힘을 다하는 바람에 마치 몇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옆의 닫혀있는 방이 금고가 있는 곳이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모았다.
‘언락!’
덜커덩하며 묵직한 문이 열린다.
안에 큰 금고 두 개가 벽에 부착되어 있다.
양쪽을 스캔해보니 전장에 있던 것과 같은 특수한 잠금장치는 아니다.
언락 매직으로 두 개 금고를 모두 열었다.
첫 번째 금고는 각종 자료들이다.
이 안에 검투사들의 노예 계약서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전부 아공간에 담았다.
두 번째 금고에는 3일간의 입장료와 도박 수입이 자루에 담겨있다.
가장 안쪽에 함이 하나 있어 열어보니 골드바다.
비상시를 대비한 자금인 모양이다.
모두 아공간으로 옮기고 집무실 앞으로 지나갔다.
그 순간 “으아아아~~” 하는 고함과 함께 돌덩이가 문안에서 튀어나온다.
황급히 팔목으로 돌들을 쳐냈다.
돌무더기를 헤치고 거구의 사내가 일어난다.
전신에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먼지가 그 위를 덮어 사람인지 괴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뭐야? 발터?’
불에 타고 돌에 깔렸는데도 살아서 일어나는 발터를 보며 레이는 섬찟함을 느꼈다.
‘이게 정말 인간이란 말인가?’
믿어지지가 않는다.
번뜩이는 눈빛에서 쏘아지는 살기가 레이의 몸을 송곳처럼 찔렀다.
“하아아!”
기합과 함께 발터가 뛰쳐나오더니 레이의 허리를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레이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여기서 피하려다가 단 한 번이라도 메이스에 가격당하면 그걸로 끝이다.
지친 상태에서도 여전히 빠른 두 사람의 봉과 검이 허공에 수십 개의 선을 그리며 맞부딪쳤다.
오러와 마나 블레이드가 충돌하는 폭음이 회랑을 진동시킨다.
‘여전히 엄청난 파괴력을 보인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이게 죽어가는 자의 공격이란 말인가.
레이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콰앙!’하며 메이스를 받아친 레이가 또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설 때 무너진 석판에 발이 걸렸다.
휘청하며 아주 짧은 순간 균형이 무너졌다.
발터의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흔들리는 레이의 좌측 어깨를 메이스 헤드가 빌어쳤다.
몸을 최대한 우측으로 틀며 충격을 완화시켰다.
‘퍼어억!’하며 왼쪽 어깨에 타격이 왔다.
몸을 핑그르르 회전시키며 발을 박찼다.
훌쩍 3~4미터를 물러선 레이가 어깨를 빙빙 돌렸다.
“이번에는 오른쪽 팔을 부숴주마.”
일그러진 입꼬리를 올리며 발터가 메이스를 들었다.
곧장 연속 공격을 해왔다면 레이로서도 뻑뻑한 어깨 때문에 곤란했을 것이다.
자신감에 발터가 말을 한마디 내뱉는 순간.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며 정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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