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협곡
알렉스 일행은 생각에 빠진 레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쉿, 레이는 늘 저런 식으로 걸으면서도 검법에 대해 연구를 한다는 거지?”
“응, 그냥 보고만 있어달라더군. 레이의 실력이 급성장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네.”
이틀이 지나고 3일째 되는 날.
트래커가 전달한 바에 따르면 목표 지점까지는 하루 거리였다.
레이는 여전히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앞쪽에서 마수의 기운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마수 중에서는 꽤 강한 축에 속한다.
탐사대가 길을 멈췄다.
마수와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10분 정도가 지나가 미세하게 오러가 감각에 잡힌다.
아마 그랜트가 결국 오러를 사용하는 모양이다.
오러에 잘린 거목 하나가 넘어지면서 옆의 나무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나무 하나가 잘린 여파가 대여섯 그루의 나무까지 미쳤다.
연쇄 현상을 쳐다보던 레이의 머리에 번뜩 이것을 마나에도 적용할 방법이 떠올랐다.
‘마나의 입자를 굳이 바위 끝까지 관통시킬 필요가 있나? 내가 원하는 것은 마나가 전달하는 정보이지, 마나 그 자체가 아니지 않나?’
레이는 마나 입자를 바위 표면으로 이동시켰다.
접촉한 바위의 마나에 정보를 전달하여 그 다음, 그 다음으로 이어갔다.
바위의 반대쪽 면에 다다르자, 마지막 정보를 전달받은 마나 입자를 공기 중으로 이끌어냈다.
허공을 떠돌며 정보를 수집한 마나가 돌아와서 역순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처음 바위로 보냈던 마나에까지 정보가 도달했을 때 마나를 불렀다.
손바닥 위에 앉는다.
바위 뒤의 상황에 대한 미세한 정보가 의식에 들어온다.
‘성공이다!! 드디어 사물을 통과하여 스캔이 가능해졌다. 이제 던전 안에서도 벽 너머 건너편의 정보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3일 만의 성취였다.
레이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대수림에 밤이 찾아왔고 드디어 탐사팀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위가 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서 좁은 구멍을 통과하는 것 같은 거친 바람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협곡 탐사의 첫 아침이 밝았다.
탐사대 모두 밖으로 나와 협곡을 바라보았다.
발 앞에 맞은 편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이 입을 벌리고 있다.
어떤 분노한 신이 대륙을 도끼로 내리쳐 바닥까지 둘로 쪼갠 듯하다.
다시는 양 대륙이 이어지지 못하도록.
옅은 운무가 협곡을 따라 흘러가고 아래쪽은 그저 시커먼 어둠이다.
탐사대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무시무시한 광경에 압도되어 한참을 굳어있었다.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아침을 준비했다.
이제 협곡을 내려가려면 든든한 식사가 필요할 터.
닭고기가 들어간 따뜻한 죽과 잡곡빵은 야영에서의 아침치고는 훌륭했다.
그러나 워낙 두려운 광경을 본 탐사대는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프레드먼이 탐사대를 모았다.
“이제 출발이오. 협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수 미터마다 철정을 박은 후 던전 입구까지 굵은 밧줄을 묶어서 이어놓았소. 얼어붙은 절벽에 줄을 설치하느라 수년 동안 생명을 잃은 병사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요. 이를 십분 감안하여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오.”
미리 하강 준비를 해놓았다고 들었는데 이것을 말하는 모양이다.
“아래로 내려가면 수시로 냉기를 품은 돌풍이 불어닥칠 거요. 즉시 벽에 몸을 붙이고 줄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자 선두부터 출발하시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에 글로브를 끼고, 보온을 위한 가죽 투구까지 착용했다.
그동안의 행렬을 그대로 유지하며 한 사람씩 줄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트래커와 숙영지 경계 병사 두 사람이 탐사대가 내려가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레이는 아공간에서 아르디우스의 로브를 꺼내 입고 줄로 팔과 다리 허리 등을 꽉 조였다.
로브는 충격과 더위,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준다.
그간은 워낙 눈에 띄는 복장이라 입은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안전이 중요하다.
아공간에서 사각의 철판 하나를 꺼냈다.
무늬조차 없는 그저 평범한 철판이었다.
일행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이리 오세요.”
레이는 철판을 한 사람씩 팔에 대면서 웜 마법을 시전했다.
동시에 팔에 ‘스트렝쓰’를 걸었다.
아마 한 시간 정도는 한기를 견디고 팔 힘도 강화될 것이다.
일행들이 낮은 음성으로 다투어 묻는다.
“레이!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그 철판, 혹시 마도구야?”
“팔이 후끈후끈하고 힘이 솟는 느낌도 들어!”
레이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쉿’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고 있던 일행들의 어깨가 쭉 펴지고, 눈에 자신감이 차오른다.
이 정도 컨디션이라면 협곡도 문제없이 돌파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의 두 개 용병단에 이어 알렉스 팀의 차례다.
레이가 앞으로 나섰다.
자신이 먼저 내려가면 상황에 대처하기가 쉬울 것이다.
일행들도 이제 레이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반대하지 않고 따랐다.
어린아이 팔뚝 굵기의 줄을 붙잡고, 얼음벽에 박힌 철정에 발을 얹었다.
팔에 힘을 주고 발을 뗀다.
손힘만으로 몇 미터 내려가자, 다음 철정이 발에 닿는다.
힘을 잠깐만 쓰면 곧 발 디딜 곳이 있어서, 깊이 내려가도 지치지 않을 것 같다.
처음 일, 이십 분 정도는 무난했다.
죽음의 협곡이라는 말이 과장인가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수십 명이 외줄을 타고 내려가는 데도 모두 단련된 무인들이라 빠른 속도로 하강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분이 지날 때쯤이었다.
멀리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에서 기사단장이 오러를 실어 외쳤다.
“돌풍이다. 벽에 붙어라!!”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철정에 발을 얹은 후 줄에 팔과 다리를 얽었다.
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지더니 줄에 매달린 사람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 우우우웅!
- 퍼버버벅!
살을 에는 차가운 한풍이 얼굴을 마비시킨다.
바람 속에는 얼음 조각과 모래가 섞여 송곳이 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하으윽!!”
여기저기서 신음을 참는 소리가 흐른다.
몸이 저절로 젖혀지면서 줄이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던전에서 필요한 장비들을 짊어진 병사들은 그 무게 때문에 더 위태로웠다.
병사 하나가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줄에 얽고 있던 다리가 미끄러진다.
몰아치는 돌풍에 곧 하반신이 줄에서 떨어졌다.
한 번 줄에서 멀어진 몸은 버티지 못하고 바람에 날렸다.
결국 팔로만 몸을 지탱하며 허공에 매달린 병사가 도와달라며 울부짖었다.
“살려줘! 안돼!”
병사의 얼굴이 찢어지며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옷이 바람에 펄럭이며 온몸이 사방으로 흔들린다.
꽉 쥔 손에 힘이 빠지면서 손가락이 점차 풀려갔다.
“으아아악~~”
바람에 날려가는 병사의 비명이 매달린 사람들을 섬찟하게 하더니 금세 멀어져갔다.
광풍은 멈출 줄을 몰랐다.
- 콰아아아아!
버티던 사람들도 몸에 계속 밀려드는 한기로 전신이 굳어갔다.
또 한 명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시커먼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은 두 사람을 먹어 치운 후에야 허기가 조금 가신 듯 서서히 멈췄다.
분개한 기사 단장의 고함이 더 커졌다.
“서둘러라! 다음 돌풍이 오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매달린 용병들도 마음이 조급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기온도 급강하했다.
글로브, 솜을 채운 갬비슨, 두터운 가죽 외투.
추위에 대비한 방한복들도 소용없었다.
하강 후 30분.
옷들도 얼어붙고, 손마디가 뻣뻣해졌다.
알렉스 일행은 레이의 마도구가 얼마나 고마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옷이 다 얼어붙고 있는데도 팔에서 한 가닥 온기가 계속 퍼져 몸을 덥혀주고 있었다.
밧줄을 잡고 있는 손도 평소보다 든든하다
.
그때 멀리서 또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악마의 웃음소리 같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얼음 섞인 돌풍이 매달린 사람들을 강타했다.
- 퍼벅! 퍼버벅!
이제는 기사단과 알렉스 일행, 그리고 일부 용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몸이 젖혀진 채 팔과 다리로 줄을 감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팔이나 다리가 풀리면 곧장 죽음이었다.
“끼이익, 끼이익~~”
수십 명을 매달고 있는 철정이 신음을 내질렀다.
퍼니발 용병단에서 몸이 가장 무거운 아바르는 늘 자신의 다리 힘을 자랑했다.
맥주 통처럼 우람한 허리와 나무 기둥 같은 허벅지.
팔 힘도 약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강풍이 몰아치는 줄에 매달린 거구를 붙들기에는 힘이 부친다.
팔이 마비되는 것 같다.
발버둥을 쳤지만 고개가 젖혀지고 상체가 흔들리면서 팔이 펴지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손으로 줄을 쥐었다.
어깨가 빠지는 듯 고통이 밀려왔다.
팔근육이 투둑거리며 찢어지는 것 같다.
추위에 곱은 손이 풀리는 순간 다리로 매달린 아바르가 비명을 내뱉었다.
“도와줘! 제발 나 좀!!”
버티던 아바르의 다리가 그를 이기지 못했다.
“으아아아!!”
비바람에 날리는 낙옆처럼 아바르가 긴 비명 속에 사라졌다.
위에서도 또 한 명의 병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두 번째 돌풍은 결국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라앉았다.
이제 겁에 질린 용병들이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아래에 있는 놈들! 빨리 내려가라!”
“왜 꾸물대는 거야, 이 새끼들아! 다 죽고 싶냐?”
“못 가겠으면 뛰어내려라, 이 망할 자식들아!”
아래 사람의 머리를 밟고, 겹쳐진 다리를 쳐내며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기사단장은 동요를 막으려고 소리를 질렀다.
”거의 다 왔다. 침착해라. 이제 곧 도착이다!“
그러나 공포에 휩싸인 용병들의 귀에 그의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얼마 후 공포는 현실이 되었다.
그 무시무시한 소리가 또 오고 있는 것이다.
추위와 두려움에 지친 탐사대를 강풍이 덮쳤다.
‘으드득’ 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뼈가 뒤틀릴 정도로 팔과 다리를 줄에 휘감는다.
갖은 수단을 동원해 줄에 몸을 얽어 버텨냈다.
이제 남은 자들은 특히 실력이 출중한 자들이었다.
바람이 부는 시간이 거의 지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끝내 강풍을 이겨내는 것인가 기대가 커지는 찰나였다.
레이는 아래쪽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불안했다.
철정 중에서 특히 하나가 크게 흔들리는 것 같다.
용병 중 하나가 다급하게 외친다.
”철정이 빠질 것 같아. 내려가! 내려가라고!“
줄을 감은 다리로 아래에 있는 용병의 머리를 쳤다.
끼익끼익거리며 흔들리던 철정 하나가 ‘타당’ 소리와 함께 빙벽에서 튕겨 나간다.
팽팽하던 줄이 그 순간 늘어졌다가 위아래 철정에 걸려 활시위처럼 당겨진다.
늘어지는 줄에 매달린 두 용병이 밧줄이 곧장 ‘핑’하며 당겨지자 버티지 못했다.
”으아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매달린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두 명이 동시에 바람에 쓸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 개의 철정이 빠져나가자, 위와 아래에 있는 철정에 가해지는 압력이 급격히 증가했다.
두 개의 철정이 함께 덜컹거렸다.
용병들이 당황하며 불안정한 철정을 피해 위와 아래로 움직였다.
“퍼벙! 펑!”
퍼니발 용병대 중간의 철정 두 개가 또 튕겨 나갔다.
“줄을 놓치지 마라!”
다행히 용병들은 단단히 줄에 매달렸다.
레이가 위쪽을 향해 소리 질렀다.
“철정이 빠진다. 줄을 꽉 잡아요!”
“텅! 텅! 텅!”
연속적인 소리가 들리며 아래쪽 철정 전부가 실밥이 뜯어지듯 허공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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