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든의 분노
그가 막 사라지는 순간 방문이 부서져 나갔다.
우르르 검을 쥔 사내들이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엇!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없잖아?”
“창밖! 창밖을 봐라!”
앞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내밀어 위아래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3층 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때 길 건너편에 희미한 형체가 생기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바닥에 엎드린 레이는 곧장 위장포로 몸을 가렸다.
다시 알카드라이트를 쥐고 마나를 순환시켰다.
효율이 대폭 떨어진다.
이제 내성이 생긴 알카드라이트는 더 이상 활용하기 어려워졌다.
10초, 20초, 30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적들이 건물 내부뿐 아니라 주변에도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위장포를 둘러쓴 채로 골목 안으로 움직였다.
시선이 가려지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진법을 펼칠 공간이 필요하다.
‘찾았다!’
건물 귀퉁이 빗물을 모으는 곳이 움푹하게 들어가 있다.
진법판을 꺼내 마나를 불어넣었다.
건물이 스르르 앞으로 늘어나더니 레이가 서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휴우우!”
천천히 숨을 내쉬고 휴식을 취했다.
탁탁거리는 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너는 저쪽 골목으로, 너는 반대편으로 달려라.”
갈라진 골목을 따라 시커먼 그림자들이 좌우를 살피며 뛰어간다.
조금만 늦었어도 부딪힐 뻔했다.
마나 연공에 들어갔다.
이미 큐어 매직과 힐 매직을 쏟아부었고, 포션도 마신 상태.
무언가를 중복한다고 해서 회복이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신체의 자체 회복을 기다리는 수밖에.
밤새 전장 주변은 수색으로 소란스러웠다.
아침 해가 뜨고 골목 골목에 햇빛이 비쳤다.
인적이 끊겼던 거리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아~~”
길게 숨을 내쉰 레이는 연공을 끝마쳤다.
마나 오브가 밤샘 연공으로 거의 찬 것 같다.
옷을 갈아입고, 클린 마법으로 몸을 깨끗이 했다.
변장을 떠올렸지만 생각해 보니 필요가 없다.
어젯밤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레이가 눈을 뜨니 다시 한밤중이다.
짐을 챙긴 후 아르디우스의 연공실로 텔레포트했다.
역시 처음 마나를 느끼고 마나 오브를 만들었던 연공실이 가장 마음이 편하다.
그대로 편안한 의자에 앉아 하루를 꼬박 마나 연공과 명상에 들었다.
이번 전투도 꽤 아슬아슬했다.
사실 정말 급하면 텔레포트로 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마법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아직 진정한 적과는 마주치지도 않은 상태다.
마법으로 직접 상대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둔다.
그렇다 해도 다수의 적과 좁은 공간에서 싸우는 것은 난해한 과제다.
이제 루퍼슨 일당은 수하들이 점차 방어를 위해 모일 것이다.
수백 명을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수하들을 상대하다가 루퍼슨 일당을 놓칠 경우이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루퍼슨 일당이 도망치면 다시 추적할 수 있을까.
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다수를 상대하기 위한 기술을 잠시 수련하고 돌아가자.’
화염 속성의 마나로 표창을 던지는 방법을 더 진전시킨다.
전장에 달려온 루퍼슨과 로든은 3층에 몰아넣은 범인이 사라졌다는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레이에게 상처를 입혔던 엑스퍼트 두 사람이 다가온다.
“틀림없이 부상을 입혔네만, 방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네. 아쉽게 됐어.”
“할 수 없죠. 두 분의 탓이 아닙니다. 워낙 빠르고 교활한 놈이군요.”
말하는 로든의 눈이 이글거렸다.
“일단 우리는 돌아가야겠네. 그동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백작께서도 상황을 궁금해하시고.”
“그간 감사했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백작 각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두 사람이 전장 밖으로 나갔다.
로든은 지하로 내려가 활짝 열린 세 개의 금고를 허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돈이나 물건은 차치하고, 대부 원장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원금이든, 이자든 받아낼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닫혀 있어야 할 철창이 옆으로 젖혀진 게 보인다.
“그놈이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지?”
“데포르 조장으로 변장했습니다. 옷도 똑같고, 얼굴에 흉터까지 똑같았습니다.”
“데포르 놈은 어디 있었고?”
뒤에 있던 데포르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어제 귀가하던 도중 괴한의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보니 옷이 벗겨져 있었습니다.”
천장의 야명석 빛에 무언가 반짝이는 듯했다.
어렵사리 대답을 한 데포르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의 고개는 기울어진 상태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돌바닥에 텅하고 떨어진 데포르의 머리가 데굴데굴 옆으로 굴렀다.
“으허억~” 하며 여기저기서 신음이 새 나왔다.
“여기 안에서 경비를 서던 놈들이 있었을 것 아니야?”
잔뜩 움츠린 조장과 대원 둘이 고개를 숙였다.
“데포르인줄 알고 들어오게 했는데 순간 당했습니다.”
또 한번 빛이 번쩍였다.
세 개의 머리가 바닥에 뒹굴었다.
이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지하 밀실 안에는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퍼졌다.
로든이 철문을 열고 나갔다.
경보가 울리면 계단 참에서 숨겨진 철문이 내려온다.
그 짧은 순간에 대원들을 해치우고 철문을 벗어나 계단으로 이동했다.
계단을 살폈다.
‘여기서 전투가 치열했다고 했다.’
계단은 온통 피투성이다.
“놈이 나타나자마자 크로스 보우를 날렸다고 했지?”
“네. 틀림없이 서너 개가 명중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호되지 않는 다리나 팔이었습니다.”
위를 쳐다보았다.
계단 위까지 꽤 거리가 있다.
‘그 몸으로 계단 위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까지 한 번에 해치웠다?’
레이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그의 전투를 복기했다.
계단 뒤에서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의 검을 피한 것도 보통 감각이 아니다.
3층으로 올라가니 부서진 문과 조각난 창틀이 보인다.
‘여기서 의자를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사라졌다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옥상 쪽을 바라보았다.
뛰어오르기에 어려운 거리는 아니다.
‘의자를 던지며 시선을 끌고는 위로 피한 건가?’
4층으로 올라온 로든은 루퍼슨과 마주 앉았다.
“형님, 이거 보통 놈이 아니네요. 누구도 열지 못한다는 금고를 털고는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에서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휴우! 장부가 사라진 터라 전장 사업은 접어야 합니다.”
“기가 막히는구나. 어떻게 변장을 해서 안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모르겠구나. 이 갈아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을 어찌한다?”
루퍼슨의 부리부리한 눈에 독기가 서렸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원한이 있는 놈입니다. 차근차근 사업을 망치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경매장이나 검투장이 되겠지요.”
“잡을 수 있겠냐?”
“이제 사업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놈을 잡지 못하면 발 뻗고 잠을 잘 수도 없을 거예요. 라비슈른 백작께 기사를 지원해달라고 다시 요청하겠습니다.”
“그래, 우리가 없어지면 백작의 메르뷰스 상단도 성치 못할 거다.”
두 사람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레이는 연공실로 돌아간 다음 날 산을 올랐다.
오랜만에 파이어 볼을 전개했다.
‘파이어 볼!’
압축된 작은 공 크기의 불덩이가 날아가 나무에 부딪힌다.
- 콰아아앙!!
산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다.
주변의 거목들이 흔들리면서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진다.
불덩이에 휩싸인 나무는 산산조각이 나서 둥치만 남았다.
검을 뽑아 마나 블레이드를 둘렀다.
기합과 함께 마나 블레이드를 화염 속성으로 바꾸어 표창으로 날렸다.
수십 개의 마나 표창이 나무에 꽂히더니 ‘펑펑’ 거리며 폭발한다.
나무는 여기저기 구멍투성이로 변했지만, 조각나는 정도는 아니다.
확실히 폭발력 자체는 마법이 더 강력하다.
파괴력 강화를 위해 마나 표창의 개수를 줄였다.
10개, 5개, 3개.
3개로 줄이자, 마나 압축도 강해지고 파괴력도 상승했다.
그러나 여전히 파이어 볼 매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무 밑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파괴력을 높이는 방법을 고심했다.
‘안되겠다. 발상을 바꿔보자. 표창에 아예 파이어 볼의 속성을 부여해 보자.’
파이어 볼의 마나 재배열에서 폭발을 유도하는 구성만을 뽑아냈다.
마탑에서 단계를 밟아 수련한 마법사들이 보았다면 기겁을 할 장면이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사용하여 완성된 마법을 분해하여 일부 속성을 빼낸다니.
대마법사라도 된 걸로 착각하느냐며 호통을 치고도 남을 일.
마법과 검법을 혼자 궁구하며 수련한 레이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폭발 속성을 지닌 마나 표창의 발현에 전념했다.
3일, 4일이 지나면서 마나 표창은 불꽃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거목의 중간이 움푹움푹 패여 나갔다.
일주일이 지난 오후.
검에 마나를 불어넣고 마나 표창을 뿌렸다.
세 개의 마나 표창이 흩어져 나무들에 부딪혔다.
“꽈앙!” 하는 폭음이 연속됐다.
세 그루의 나무 허리가 불덩이에 휩싸이며 터져나갔다.
이번에는 단 하나의 마나 표창을 던졌다.
고막을 찢는 굉음이 울린다.
폭발하는 화염이 주변 4~5미터를 휩쓸었다.
나무는 아예 가루처럼 불꽃으로 무너져 내렸다.
’됐다. 다수와 상대해도 일단 충분히 시간을 벌 정도는 되었다.‘
마지막 남은 과제.
마나 표창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며 목표를 향하는 방법.
공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레이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목표를 한 점에 두지 않고 마치 화살의 과녁처럼 원형으로 지정했다.
마나 표창을 날렸다.
표창은 공기 저항과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아갔다.
지정된 범위를 벗어나려 하면 튕겨서 안으로 들어왔다.
표창은 사방으로 튕기고 흔들리면서 과녁에 박혔다.
- 콰아앙!
폭발력이나 속도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드디어 해냈다!‘
스노우 블라섬의 공간 공격도 이제 같은 방법으로 성공시킬 수 있게 되었다.
양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연공실로 돌아와 금고에서 꺼내 온 것들을 모두 풀어놓았다.
대부 자료들은 대부분 평민들과의 거래 원장이었다.
전부 불태워 버렸다.
두 번째 금고의 함들을 열었다.
보석함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골드와 실버가 들어있다.
마지막 금고에서 나온 것들은 조각품, 그림, 장식품 등 값나가는 골동품이나 예술품들이었다.
그다지 흥미가 가는 물품들은 아니다.
딱 하나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함이 있었다.
로퍼가 설명해 주던 황도 세공 길드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캔!‘
함의 내부를 대략 살펴보았다.
’맞다. 로퍼의 설명 그대로다.‘
잠금장치의 구조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언락 마법을 시전했다.
’덜컹‘하며 덮개가 열린다.
안은 텅 비어있고, 바닥에 놓인 책자 하나가 전부이다.
표지를 읽어보았다.
- 슈나우더 검법
’아, 루퍼슨 일당이 그란델 자작에게서 훔쳐 달아난 함이 이것이구나.‘
다만 그 안에 있다고 들은 최상급 포션은 이미 사용한게 맞는 것 같다.
슈나우더 검법서는 복사본을 가지고 있기에 원본이라 해서 특별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후에 비올라에게 전해주기 위해 아공간에 다시 보관했다.
’돌아간다!‘
베론의 숙소로 텔레포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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