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투사의 자유(1)
‘블링크!’
메이스를 휘두르며 발터가 앞으로 도약했다.
- 부웅~~
바람 소리와 함께 강철 헤드가 레이의 어깨를 내리친다.
레이의 몸이 희미해졌다.
발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메이스가 허공을 치고 돌아온 것이다.
“어엇. 이놈이?”
앞에 서있던 레이가 사라지자, 당황하며 좌우를 둘러보는 찰나였다.
‘푸욱!’하며 복부 앞으로 검첨이 삐죽이 솟아나온다.
“끄으윽!”
저절로 허리가 굽혀지고 배에서 피가 솟구쳤다.
튀어나온 검이 옆으로 당겨졌다.
서걱하며 배가 반쯤 갈라진다.
‘쿠웅!’하고 메이스를 바닥에 꽂으며 발터가 뒤를 보았다.
어느새 레이가 등 뒤에 와 있었다.
“이노옴~~~”
발터가 한 바퀴를 휘익 돌며 메이스로 횡으로 휘둘러 레이의 머리를 가격했다.
고개를 숙였다.
메이스가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로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발터의 몸이 반쯤 돌려진 순간.
레이의 검이 발터의 목을 옆으로 베고 멀어졌다.
발터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돌덩이에 부딪힌다.
이어서 거대한 몸체가 털썩하고 쓰러진다.
“헉헉!!”
지친 상태에서 블링크 마법까지 쓰느라 마나가 부족한지 어지럽다.
비틀거리며 어지러운 회랑을 벗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발터의 얼굴이 마주 보인다.
부릅뜬 눈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하다.
옆에 놓인 돌멩이 하나를 들어 머리에 던졌다.
퍽하고 돌에 맞은 머리가 옆으로 빙그르르 구른다.
여전히 통로와 경기장 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급하게 마나를 순환시켰다.
1분, 2분, 3분.
가까스로 마나 오브의 바닥에 약간의 마나를 채웠다.
‘힐링!’
어깨에 회복 마법을 펼쳤다.
삐걱거리던 어깨뼈가 우두둑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나가 일렁이며 찢어진 근육들을 재생시켜 이어 붙인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아아!!”
일단 몸은 거의 회복이 되었다.
호흡을 고르고, 몸을 풀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체력도 약간 회복된다.
경기장 위의 통로를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검투사들과 경비들의 전투가 여전하다.
크로스 보우 5개와 볼트 통이 계단참에 놓여 있다.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공간에 담았다.
바로 앞의 경비병이 검투사에게 검을 내리친다.
뒤에서 그의 등을 베었다.
횡으로 선이 그어지며 피가 솟구친다.
“어억!” 하며 경비병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검투사가 어리둥절하여 위를 쳐다본다.
자신들을 탈출시켜준 동료가 갑자기 위에서 나타났다.
“고맙네, 친구!”
레이는 옆으로 달려가 경비들의 뒤에서 서너 명을 해치웠다.
그제야 눈치챈 경비들이 소리를 지른다.
“뒤에도 적이다! 조심해라!”
레이의 검을 경비들이 막기에는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딱 한 번의 공격으로 한 명의 경비가 쓰러진다.
삽시간에 전투의 향방이 검투사에게 기울어진다.
“제길! 틀렸다!”
“피해!”
몰리던 경비들이 결국 회랑쪽 통로로 달아난다.
레이가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막자, 탈출에 속도가 붙었다.
검투사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루포릭과 트레비, 로잔느까지 사다리를 올랐다.
레이 혼자 아래에 남자 바깥에 있던 경비병들이 우루루 몰려 들어온다.
숨을 들이마시고 마나를 모아 발을 박찼다.
허공으로 10미터 이상을 솟구친 레이는 사다리를 잡고 계속 위로 날 듯이 뛰어올랐다.
서너 번 만에 천장에 도착했다.
막 로잔느까지 줄을 타고 내려가는 참이다.
아래에서 경비병들을 유인하며 싸우고 있는 알렉스에게 소리쳤다.
“끝났어요. 피해요!”
레이가 줄을 걸고 내려가자, 그 뒤로 비올라와 애드먼도 따라왔다.
골목을 따라 남문 쪽으로 이리저리 굽어진 길을 달려 낡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아무 시설도 없이 의자들만 놓여 있는 텅 빈 공간이었다.
80명이 넘는 검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통증이 심할 텐데도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올랐다.
조금 후 알렉스가 들어오고 1층 문이 닫혔다.
살펴보니, 허스틴 팀, 비올라 팀, 그리고 알렉스 팀 모두 자잘한 상처만 있을 뿐 큰 부상자는 없었다.
준비해 둔 약재들로 부상자를 치료했다.
부상이 심한 자들에게는 하급 포션을 꺼내 뿌리고, 큐어 매직을 살짝씩 부었다.
경매장으로 달려온 로든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지원대가 오기 바로 몇 분 전 외곽 경비들과 전투를 벌이던 적들이 갑자기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경계를 위해 배치해 둔 엑스퍼트 둘을 불렀다.
“왔던 놈들이 엑스퍼트가 맞나?”
“네, 저희 둘과 1대1로 싸웠는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런 것 치고는 상처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좀 이상했던 것이 저희와 검을 부딪치기는 했지만,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공격을 다 막아내면서도 저희들에게 강한 살수를 사용하지는 않더군요”
로든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지금쯤 검투장에 본진이 쳐들어왔겠구나. 발터가 잘 막아냈으려나?’
로든이 두 호위와 지원대를 쳐다보았다.
“당장 검투장으로 간다. 따라오도록.”
로든은 검투장으로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경매장을 떠나자마자 검투장에서 지원을 요청하러 달려오는 대원 하나와 마주쳤다.
“어찌 된 상황이냐?”
“검투사들이 빠져나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들 중 몇 명이 상당한 실력자들이어서 진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발터는?”
“단장님도 누군가와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로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시 달려갔다.
검투장에 도착하니 온통 부상자가 널려 있었다.
“발터는 어디 있느냐?”
대원들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한다.
“다친 건가? 어디 있느냐니까?”
“지금 지하 1층에서 대원들이···”
지하 1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로든은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무실 쪽으로 가니 사방이 무너져 내려 아수라장이다.
대원들 몇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단숨에 집무실 앞으로 달려갔다.
불에 탄 피투성이 거구의 시신.
떨어져 나간 머리.
발터였다.
‘발터가 당했다고? 천부적인 신력에 슈나우더 검법의 오러 연공법까지 익힌 발터가? 1대 1로는 나도 승부를 자신할 수 없는데···'
발터의 시신은 불에 타고, 검에 찔려 엉망이다.
호위들까지 모두 화염 공격에 당했다.
집무실 안은 무언가 폭발한 듯 천장까지 부서져 내렸다.
‘도대체 어떤 공격을 한 거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깜빡 잊고 있었던 금고가 떠오른다.
즉시 옆의 밀실로 들어갔다.
두 개의 금고 문이 활짝 열려있고, 그 안은 텅 비었다.
피식피식 허탈한 웃음이 새나온다.
‘그래, 이 새끼들! 어디 누가 죽나 해보자.’
로든의 눈이 스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레이는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아공간에서 장부를 꺼냈다.
수입, 지출과 관련된 자료나 검투장 운영에 관한 자료는 집어넣었다.
검투사들의 계약서만 챙겼다.
금고에서 꺼낸 돈을 꺼내 작은 주머니에 담았다.
검투사들에게 돌아가니 모두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이다.
“자, 여기 노예 계약서 원장이 있습니다. 자기 것을 확인하고 가져가세요.”
“뭐? 계약서 원장이라고?”
모두들 달려와 장부를 뒤적였다.
“여기 있다. 내 계약서!”
“세딘! 네 거다! 사라스, 네 것도 있다!”
한참 어수선하게 떠들더니 모두 각자의 계약서를 손에 쥐고 말없이 의자에 앉는다.
“하, 이 계약서 때문에 몇 년을 목숨을 걸고 싸웠나. 그것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혀서 말이야.”
“내가 처음에 빌린 돈은 고작 1실버였다고. 그게 1년 만에 열 배로 뛰었지. 결국 농사밖에 모르던 내가 여기 와서 검을 쥐게 될 줄이야.”
모두들 나지막한 소리로 옆 동료들과 노예 계약을 하게 된 경위들을 새삼스럽게 나누었다.
“그나저나 세딘, 이제 뭐하고 살 생각이야?”
누군가의 말 한마디였다.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침울한 분위기로 변했다.
“피묻은 손으로 예전 일을 할 수도 없고. 여기서 배운 거라고는 칼싸움밖에 없는데 뭘 하겠어? 용병 일이라도 해야 하나?”
“애휴~. 이제 와서 목패나 철패부터 시작하려고? 용병 일도 다 늦게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사기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알렉스가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제 바론을 벗어나면 여러분이 원하는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원장을 찢으면 더 이상 여러분을 구속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레이에게 받은 작은 주머니들을 앞에 던졌다.
“그간 고생한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지만, 새로운 곳에서 정착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하나씩 나누십시오.”
돈이라는 소리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머뭇거리다 한 사람씩 나와서 주머니를 가져간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실버가 가득하다.
“헉! 50실버!”
“뭐라고, 50실버라고?”
놀라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안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러나 많은 돈 같아도 막상 쓰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사라질 것이다.
창으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긴 겨울밤이 지나간 것이다.
허스틴 일행과 비올라 일행은 복면을 한 채 행동했기에 아직은 안전했다.
그들은 행인들 틈에 끼어 조용히 사라졌다.
나머지 알렉스 일행과 검투사들은 침착하게 남문을 향했다.
혹시 루퍼슨 일당이 성문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이상한 자들은 없었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나간 검투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루포릭과 검투사들은 본모습의 레이를 안고 감사를 표했다.
“레이라고 했지? 고맙네. 검투사들은 일단 주변의 마을에서 머물면서 살아갈 방도를 찾아보기로 했네. 필요하면 찾아오게나. 빚을 갚을 테니. 몸조심하게!”
“고맙소. 덕분에 새 삶을 찾게 되었구려.”
“레이, 그리고 다른 분들도 고맙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분분히 레이와 알렉스 일행에게 인사하고 길을 떠났다.
레이와 알렉스 일행은 가까운 타운에 마련한 주택으로 들어갔다.
씻지도 않고 모두 방으로 들어가 취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레이는 금고에 있던 금괴를 알렉스 일행에게 3분의 1을 나누었다.
“어제는 정말 고생들 많았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검투장을 없앨 수 있었어요. 당분간 성으로 들어오지 말고 여기서 지내세요. 제가 이쪽으로 올게요.”
“그래, 알았다. 루퍼슨 일당이 마지막 발악을 할지도 모르니 조심해라.”
“레이, 성안은 위험하니 늘 주변을 살피고 다녀.”
로잔느가 레이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떠나면서 알렉스의 손에 주머니를 쥐어주었다.
“응? 이게 무어냐?”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길 때 쓰세요.”
레이는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운을 떠나 성으로 들어가서 허스틴 일행을 만났다.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군. 이제 경매장만 처리하면 서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군.”
“수고했습니다. 이제 루퍼슨 일당의 동정을 살피며 다음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이건 그들의 금고에 있던 겁니다. 비용으로 쓰시죠.”
허스틴 일행에게도 금괴의 3분의 1을 전했다.
자작의 지원이 없어져 집까지 팔아야 했던 허스틴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레이는 비올라 일행도 만나 같은 논의를 했다.
숙소로 돌아간 레이는 통신 반지를 켰다.
잠시 후 반지에서 마크의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 어떻게 되었니? 알렉스 일행은 잘 만났니?”
레이는 그들과 만난 일부터 검투장을 부수고 검투사들을 탈출시킨 일, 그리고 발터를 죽인 일까지 이야기했다.
“하아! 정말 고생 많았구나. 루퍼슨 일당에게 가까이 갈수록 점점 위험이 더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이제 정말 조심해야 할 때인 것 같구나.”
“네. 다치지 않게 최대한 주의할게요. 다만 검투사들이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들었어요. 그게 좀 마음에 걸리네요.”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검투를 할 줄 아는 거지.”
“네? 그게 그거지, 무슨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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