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다
마이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비올라를 쳐다보았다.
“총관 갈라토가 배신했다. 대대로 충성을 해오던 가문인데. 하아, 여전히 믿기지가 않는구나! 비올라, 비밀통로를 열 테니 서둘러라. 애드먼 경, 비올라를 잘 부탁하네.”
비올라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오라버니도 같이 가셔야죠. 왜 저만 먼저?”
“적들은 통로를 곧 찾아낼 것이다.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가 뒤쫓아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피해라. 네가 있으면 오히려 거동이 어렵다.”
마이어는 비올라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리고는 집무실 후면 벽에 교차해서 걸린 장식용 검 쪽으로 다가갔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 아래에는 작게 축소된 모형 방패가 걸려있었다.
방패를 잡아 빼더니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번을 돌렸다.
틈새 하나 보이지 않던 후면 벽이 스르르 밀리면서 사람 하나가 빠져나갈 입구가 드러났다.
비올라가 머뭇거리자, 윌리암스가 애드먼을 재촉했다.
“애드먼 경, 서두르지 않고 무엇 하나? 어서 아가씨를 모시게!”
애드먼은 버티는 비올라의 어깨를 잡고 입구로 들어갔다.
마이어가 돌아서자, 벽면은 천천히 원상복귀되었다.
“윌리암스 경, 편히 쉬어야 할 말년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윌리암스는 힐끗 문을 쳐다보았다.
“살 만큼 살았는데 뭐 아쉬움이 있겠습니까. 다만 그전에 믿음을 저버린 놈들에게 단단히 교훈을 내리고서 말입니다.”
“콰아앙~~~”
오러를 합쳐서 내뿜었는지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고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후작가의 기사단은 들어오는 적을 향해 가차 없이 검을 날렸다.
호기롭게 가장 먼저 뛰어 들어온 짧은 콧수염의 젊은 기사 하나가 후작의 기사와 검을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윌리암스가 옆을 스치며 문 쪽으로 달려가 뒤따르는 기사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하고 두 기사의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후속 공격을 위해 검을 올리던 젊은 기사는 옆구리가 후끈하며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내리는 순간 흉갑 아래로 피가 터져 나왔다.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절망스러운 탄식이 흘렀다.
“우욱! 도대체 언제?”
쿨럭거리며 기침을 내뱉으려는데 머리가 핑 돈다.
마주한 상대의 검이 그의 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밀고 들어온 기사들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러의 번쩍임이 넓은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엑스퍼트 간의 대결은 실낱같은 속도의 차이로 승부가 갈린다.
‘아차’하는 찰나에 팔과 다리가 잘려져 피 웅덩이에 잠겼다.
양측의 실력은 비슷했지만, 수적으로 밀리는 후작가의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갔다.
결국 마이어와 윌리암스만이 남았다.
서너 명의 상대 기사를 벤 윌리암스의 왼팔은 팔꿈치에서부터 잘려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마이어 역시 전신이 붉게 물든 상태였다.
집무실 끝으로 밀린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윌리암스 경, 고맙습니다! 보답할 길이 없어 미안하군요.”
“괜찮습니다. 후작님 덕분에 그간 즐거웠는걸요.”
두 사람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빙 둘러싼 적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방금까지 고아한 가구가 놓여있던 집무실이 지옥을 연상케 하는 참혹한 전장으로 변했다.
테피스트리와 그림으로 장식된 사방의 벽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
집무실 바닥은 잘려 나간 팔과 다리, 그리고 피 웅덩이 속에 쓰러진 시신들로 가득 찼다.
애드먼은 비올라를 이끌고 비밀통로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알브히드 후작가는 무를 중시하는 가문.
그 전통에 따라 비올라 역시 검술을 꾸준히 연마해 왔기에 체력은 여느 사내 못지않았다.
그날 왕도의 알브히드 후작과 차남 나일즈, 그 휘하의 기사들은 왕실과 공작가의 기사 26명과 동귀어진했다.
후작의 영주성에서도 왕실 제2기사단이 대공자 마이어를 쓰러뜨린 것은 무려 기사 13명이 희생된 다음이었다.
후작가의 마지막 핏줄 비올라는 종적을 감추었다.
화사한 봄꽃들이 한창 피어나던 왕국력 387년 4월 8일의 일이었다.
*****
비올라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알고 있겠지만 로든 일당을 쫓는 것은 가보를 찾기 위해서예요. 배신자 총관을 없애면서 행방의 실마리를 알아냈죠. 레이 덕분에 일단 검법서 사본은 구했지만, 원본도 되찾고 싶군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다만 철함에 있던 포션은 안타깝게도 이미 없어졌겠죠. 일당들이 엑스퍼트가 된 것을 보면 말이에요.”
레이는 최상급 포션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엑스퍼트와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의문을 눈치챈 비올라가 덧붙였다.
“포션이라고 하지만 실은 우리 가문에 내려오는 단약이에요. 역사상 최고의 연금술사라 일컬어졌던 7서클의 마법사 노이츠 글래스고우님이 저희 선조였어요. 황실 마법사로 선임되어 새로운 성을 하사받았죠. 훗날 그분이 비밀리에 가문에 남긴 보물이 마나 연공의 단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단약이었어요.”
연금의 최고 마법사 노이츠.
마탑의 탑주는 아니나 황실 마법사 중 단약 제조에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다.
“총 10개였어요. 그동안 직계 후손 중 검술에 자질이 있는 분에게 5개를 썼고 그들 중 세 분이 소드 마스터가 되었어요. 우리 가문이 유독 소드 마스터를 많이 배출한 이유에 대해 철저히 비밀을 유지해 왔는데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죠.”
비올라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가법에 따라 한 가주가 오직 하나의 단약을 사용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아끼던 것이었는데 사라져 버린 거죠. 이제 남은 건 철함뿐. 그거라도 되찾아야죠.”
레이는 그제서야 로든 일당의 검술 실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도 파텔의 던전에서 단환을 복용하여 엑스퍼트에 진입했다.
파텔 탑주의 단환이 육체를 재구성하는 놀라운 효능을 가졌지만, 사실 그가 연금술의 대가는 아니다.
연금의 대가 노이츠 마법사가 오직 마나 연공만을 위해 만들었다는 보물.
로든 일당은 이미 은패에서 금패를 넘나드는 실력을 지닌 상태였다.
그러니 포션을 복용하고 엑스퍼트에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녀 비올라의 이야기를 들은 후 충분히 협력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로든 일당의 보물 따위는 누가 가지든 상관없었다.
“나머지 일당을 찾는 일에 협조를 구해도 될까요?”
비올라가 애드먼을 쳐다보앋다.
반색하는 얼굴이 보인다.
그간 허스틴 일행과 레이의 뒤를 쫓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을 겪은 참이다.
빨리 답하라는 눈빛이 역력하다.
“좋아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레이는 행낭에서 로든 일당의 초상화를 꺼내 전했다.
“제가 움직이면서 얻는 정보는 원하시는 방법대로 정보길드나 용병길드에 봉함으로 전달하겠습니다. 대신에 이자들을 찾아 공격할 때 힘을 합치면 좋겠습니다.”
비올라가 환한 얼굴로 즉시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다만 당분간은 레이씨를 따라가지 못할 거에요. 슈나우더 검법을 익혀야 해서요.”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나누고 향후 일에 대해 논의한 후 헤어졌다.
*****
허스틴은 레이를 찾지 못하자 곧장 무관으로 돌아갔다.
관원들과 사범들은 대부분 쓰러지거나 피한 뒤였다.
담벽 뒤에서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루번과 모르트가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허스틴이 다문 잇사이로 말을 내뱉었다.
“그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틀림없이 골목길로 가는 것을 보고 뒤쫓았는데,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더군. 하아!”
루번과 모르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번에는 성과가 있을 것이라 은근히 기대한 터였다.
“마스터, 너무 걱정마십시오. 놈이 얼굴을 많이 알린 터라 어디로 가든 쫒을 수 있을 겁니다. 일단 무관 일로 아침에 소동이 날 테니 그 전에 성을 빠져나가시죠.”
숙소에 도착하니 무관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조니스도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짐을 챙기게. 즉시 동문으로 가겠네. 경비대에는 미리 돈을 먹여놨으니 나가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야.”
네 사람은 말을 몰고 서둘러 성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날이 밝자 예상대로 성내는 발칵 뒤집혔다.
영지에서 가장 큰 대형 무관의 관주가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관원들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고, 무관은 불타올랐다.
용의자들은 모두 복면을 착용하여 얼굴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일부 관원을 상단으로 유인한 자의 인상착의가 남았다.
영주성 치안병들이 조니스의 얼굴이 엉성하게 그려진 초상화를 가지고 여관과 식당들을 수소문했다.
관원들 전부가 조사대상이었다.
일부 무관에 나타나지 않은 자들도 거처를 수색했다.
하지만 이때 레이는 비올라 일행과 헤어져 수십 킬로미터 밖을 달리는 중이었다.
허스틴 일행 역시 그보다 더 먼 곳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케른햄 백작령 남부.
성도 브리엔트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산자락.
인적없는 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앉은 레이는 고민 중이었다.
게이드와 조시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라 제국으로 가보느냐, 아니면 고향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니 부모님께 들르느냐.
제국의 영토는 최소 왕국의 대 여섯 배 이상.
셀로포네 왕국에서 엘디니아 왕국을 거쳐 대륙 서쪽으로 십여 개의 영지를 지나야 황도 슈토르히에 도달할 것이다.
일단 제국으로 방향을 잡으면 연내로 고향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통신 반지의 헤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지 너머에서 마크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 걱정하고 있었다. 게이드를 쫓는다고 했는데 아무 일 없니?”
“네. 걱정말라고 했잖아요. 마크 삼촌!”
마크를 부르고는 잠시 목을 다듬는다.
“게이드를 해치웠어요.”
반지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반지가 반짝였다.
“레이, 잘했다!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느껴지는구나. 하아! 다친 곳은 없니?”
“네. 약간 상처가 있었지만 다 나았어요.”
실상 금이 간 것 같은 늑골과 뒤흔들린 몸의 내부는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저도 그게 고민이에요. 나머지 놈들의 흔적이 제국의 수도로 이어져 있어요.”
“제, 국, 이라고?”
띄엄띄엄 들리던 마크의 음성이 다시 끊어진다.
“곧장 제국으로 향할지 아니면 부모님께 먼저 들러봐야 할지. 어떤 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레이야, 아마 한시라도 빨리 나머지 놈들도 찾고 싶을게다. 하지만 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가거라. 지친 몸으로 무리하다가는 네가 도리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야.”
어쩌면 레이가 기다리던 말인지도 모른다.
게이드를 죽인 후 자신의 마음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무겁게 느껴진다.
나머지 셋을 하루빨리 찾아서 복수를 하고 싶은 초조함.
하지만 복수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이 초조함 아래에 깔려있었다.
또한 지금의 실력으로 로든 일당을 상대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발시언 검법을 더 수련해야 할 것 같다.
마침 비올라 일행도 슈나우더 검법을 익히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요, 마크. 돌아갈게요. 가서 봬요.”
“잘 생각했다. 얼른 오거라. 하하하. 당분간 잠이 오지 않겠구나. 이만 자거라.”
“네. 끌게요.”
반지의 헤드를 돌려 통신을 종료했다.
‘그래, 집에 돌아가자.’
잠자리에 누운 레이의 얼굴이 편안한 표정을 찾았다.
***
고풍스런 저택 후정의 연무장.
장신에 근육질의 사내가 온몸에 땀을 적신 채 커다란 수련용 브로드 소드를 휘두르고 있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컴컴한 하늘에 수십 개의 검광이 얽히며 주위를 밝힌다.
그 뒤를 따라 거센 바람이 돌풍을 일으키며 주변을 휩쓸었다.
그의 몸 전체에서 뻗어 나오는 기세는 연무장 전체를 덮을 듯하다.
사내가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포석을 밟는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저택 앞쪽에서 시작하여 연무장으로 다가온다.
횃불에 일렁이는 얼굴이 어둡다.
“밤늦게까지 웬 수련입니까?”
“오랫만에 몸 좀 풀었다. 요즘 수련을 게을리했더니 몸이 찌뿌듯해서 말이야. 너야말로 새벽 수련을 빼먹는 적이 없지 않냐. 거기다 일이 없을 때면 아침부터 밤중까지 검을 휘두르는 놈이!”
“형님!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뭐가?”
“게이드 형이 죽었답니다. 방금 길드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검을 든 자세를 풀지 않고 듣던 루퍼슨이 수련검을 던져버리며 고개를 홱 돌린다.
그의 표정에서 미소가 걷혔다.
“뭐? 얼마 전에는 조시가 죽더니, 이번에는 게이드까지? 어떻게 된 일이라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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