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드와 동업
“물론이지. 얘기해 보시게.”
“검투장을 음지가 아니라 양지로 끌어내는 겁니다. 예를 듦면, 검투 대회를 여는 거죠. 막대한 상금을 걸고요.”
“호오~ 그리고는?”
“대회를 상시화하는 겁니다. 검투사마다 순위를 매기고 비슷한 자들끼리 경기를 벌이면서 전적이 탁월한 자에게 챔피언 도전권을 부여하고요. 누구든 검투 경기에 참여할 수 있고, 싫다면 그만둘 자유를 주는 겁니다.”
여기까지 듣자, 나하드가 작게 탄성을 발했다.
“그렇군. 굳이 검투사를 강제로 끌고 오고, 가둘 필요가 없겠군. 또한 검술 실력이 있는 자들은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올 테고.”
시스템화된 검투 경기를 이용한 사업 아이템이 그의 머리에 연이어 떠올랐다.
지금처럼 검투사를 감시하기 위해 넓은 공터를 비워둘 필요가 없다.
경기장을 찾는 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간이 식당과 주점.
가벼운 오락거리···
그가 벌떡 일어섰다.
“잠깐 기다리게. 무엇보다 검투장의 매입이 필요하네.”
레이가 그를 만류하며 자리에 앉혔다.
“검투장은 제가 이미 구입했습니다.”
경악하는 표정으로 나하드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아니, 어떻게 벌써?”
“저와 공동 투자를 하시지요. 제가 검투장을 제공할 테니 단주님이 운영을 맡으시는 겁니다.”
의자에 풀썩 등을 기대는 나하드의 얼굴에 허탈함이 그득하다.
“허허. 자네가 이미 검투장을 소유했다니 더 할 말이 없군. 백작님과 상의해 봐야 하겠지만, 아마 적극 찬성하실 걸세.”
“기존의 검투사들이 지금 일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만으로도 경기를 치를 수 있을 겁니다.”
나하드는 계속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을 잃은 검투사들을 위한 일거리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론 뿐 아니라 제국의 황도에도 이런 공개적인 검투장을 여는 것을 검토해 주시죠. 자금은 저도 충분하니 추가 투자를 하겠습니다.”
“하하하~~”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사업이 성공한 다음에야 생각할 법한 아이디어까지 레이가 제시하고 있었다.
“좋네. 모두 찬성일세. 세부적인 지분 비율을 논의해 보세. 그후 백작님과 상의하겠네.”
레이는 이 사업으로 크게 돈을 벌 의도까지는 없었다.
돈은 이미 황실의 던전에서 얻은 보물만으로 충분했다.
다만 루퍼슨 일당의 사기를 꺾고, 자금을 어딘가에 활용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지분 비율은 금세 합의가 됐다.
레이가 양보하여 5대5로 정한 것이다.
핵심 설비인 검투장을 레이가 제공했지만, 사실 검투장 운영과 사업화는 능력 밖의 일이다.
레이는 검투장의 치료실에 남아있던 검투사들에게 좋은 치료와 큐어 매직을 활용하여 회복하게 했다.
이들이 초기 검투 대회의 적극적인 참가자가 될 것이다.
나하드는 부서진 집무실 주변을 재빨리 보수하고, 나머지 시설도 새 단장에 돌입했다.
경매장의 구조는 검투장보다는 단순했다.
검투 경기장과 비슷한 입찰장, 무대, 집무실, 귀족 대기실, 경비대 대기실, 경매품 전시실, 비고.
이를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상인 차림의 레이가 경매장 접수관에 나타났다.
뒤에는 두 명의 용병 검사가 호위로 따랐다.
정문은 문 앞에 두 명과 안쪽에 두 명이 바짝 긴장한 채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검투장의 사고 때문일 것이다.
“정지! 용무가 무엇이오?”
“경매 물품을 위탁하러 왔소. 어디서 접수를 해야 하오?”
딱딱했던 경비들의 얼굴이 풀어진다.
잦은 개관으로 경매 물품이 부족하다는 것이 직원들에게도 알려진 모양이다.
안쪽 접수관으로 한 명이 안내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접수대에 젊은 직원 두 명이 일하고 있고, 뒤쪽에 중년 남자가 앉아있다.
앞쪽의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고급스러운 의복에 호위로 보이는 자들을 둘이나 데리고 들어온 손님을 보자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물품을 맡기러 오셨나요?”
“그렇소.”
“어떤 물품인지 한 번 볼까요?”
레이는 품에서 마나를 뽑아낸 주먹만한 알카드라이트를 꺼냈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광석 표면에 반사되어 다채로운 색깔이 변화를 일으킨다.
하얀색, 파란색, 노란색···
척 보기에도 보통 물품이 아니다.
직원은 광석을 받아 들자마자 뒤편의 남자에게 가지고 갔다.
“저, 감정관님. 묘한 광석이 들어왔습니다. 처음 보는 광석인지라···”
감정관이라 불린 사내가 광석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눈을 껌뻑이며 천장을 한참 올려보았다.
틀림없이 들어본 광석인데 떠오르지 않는다.
색채가 빛의 각도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광석.
‘알, 알카. 하! 알카 뭐였는데···’
레이가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그 정도 크기의 알카드라이트를 보기는 힘들 거요. 서둘러 주시오.”
그말을 듣자마자 감정관의 머리에 광석의 정체가 떠오른다.
마탑들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가장 희귀한 광석의 하나.
연금술의 필수재이자 최상급 제련 재료.
감정관은 벌떡 일어나 접수대로 달려왔다.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이렇게 귀한 물품을 맡기시다니. 뭐하나? 빨리 진행하지 않고.”
직원을 닦달하면서도 그는 연신 레이에게 허리를 굽혔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광석이 무엇이기에 저리 난리인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말은 나오지 않았다.
광석의 크기, 모양, 무게 등을 재서 등록했다.
“알카드라이트는 이번 경매의 둘째 날 마지막 물품으로 소개하려는데 어떻습니까?”
“네. 좋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매장에 출입할 수 있는 비패입니다. 다른 물품 경매에 참여하고 싶으실 때 사용하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리 경매장 안을 눈으로 살펴보고 싶었다.
혹시 진귀한 물품을 경매에 올리면 출입패를 발급해 주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3일 후 경매 첫날.
이틀간 열리는 경매에서 첫날은 대개 격이 떨어지는 물품들이 나오기 마련.
귀족들이나 부유한 자들은 둘째 날에 직접 혹은 대리로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레이는 경매장의 분위기를 파악할 겸 첫날 방문했다.
가이드는 평민들의 출입구인 접수관 옆 남쪽 입구로 안내한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니 좌우로 긴 장방형의 거대한 홀이 나온다.
반대편의 무대를 바라보고, 경사면에 의자들이 계단식으로 놓여 있다.
무대에 가까운 앞쪽은 조금 다르다.
푹신한 깔개가 깔린 고급스러운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다.
무대 앞의 양 측면에도 비슷한 좌석들이 보인다.
‘이곳이 귀족들을 위한 특별석인 모양이군.’
예상대로 이쪽은 텅 비어있다.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좌석만 반 정도가 채워진 상태다.
미리 파악한 구조도에는 무대 좌우에 통로가 있다고 했는데 좌측 통로는 아예 막아놓았다.
보안을 위해 폐쇄했을 것이다.
동문 쪽 귀족용 통로가 어디 있는지 살펴보았다.
일반석과 특별석 사이로 이어져 있다.
레이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다.
결국 어느 출입구로 들어오든 뒤쪽 사무 구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대 옆 통로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북쪽 직원 전용 출입구로 들어가면 아마 사무 구역으로 직접 연결될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경계가 더 심할 것 같다.
‘경매가 끝난 후의 출입구별 경계 상황이 어떤지 확인해야겠군.’
경매 물품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뒤쪽 좌석에 앉았다.
‘딸랑딸랑’하는 종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우측 통로에서 누군가 무대 위로 오른다.
낯익은 얼굴이다.
파브리치오.
검투장의 사회를 보던 인물.
‘루퍼슨 상단의 일을 거의 도맡아서 하고 있군.’
귀에 익은 그의 말투가 편안하다.
“신사 숙녀 여러분! 파브리치오가 인사 올립니다!”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기다렸다.
“와아아!!!”
거의 강요된 함성이 그를 반긴다.
방긋 웃으며 허리를 펴고서 경매의 시작을 알린다.
“모든 분들이 오랫동안 고대하며 기다리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도 루퍼슨 경매장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다양하고 진귀한 물품들을 가지고 여러분의 기대를 한껏 충족시켜 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이 고객들께서 소장하고 싶었던 보물들을 발견하여 댁으로 가져가는 특별한 날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긴 인사말 끝에 경매가 시작되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첫 물품은 타베라스 산맥의 가장 높고 험한 심처에서도, 마나가 풍부한 특수 지역에서만 자생한다는 보기 드문 약재입니다. 여러분께 블랙 발레리안의 뿌리를 소개해 드립니다.”
파브리치오의 달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무대로 올라오는 물품들은 그의 설명대로라면 찾기 어려운 엄청난 보물들이어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된 전문 상가에서라면 심심찮게 발견되는 상품들일 뿐이다.
그의 언변은 화려했지만, 어쩐지 열기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몇 가지 상품을 구경하고는 경매장을 빠져나왔다.
다음날은 마차를 빌리고, 용병을 호위로 요청해서 다시 경매장을 찾았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도록 유행하는 검은 벨벳 모자를 눌러썼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가이드에게 비패와 반지 인장을 보여주었다.
그는 곧장 동문쪽 출입구로 레이를 안내했다.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 서 있던 안내원이 무대 옆 통로로 이끈다.
통로를 지나면 바로 건물 후면의 긴 회랑이 나타난다.
우측 끝이 북문쪽 직원용 출입구와 경비실.
바로 좌측이 귀족용 대기실이다.
반대쪽을 살펴보니, 사무실이 보이고 그 너머가 아마 경매 총괄의 집무실과 경매 물품의 비고일 것이다.
대기실로 들어가니, 귀족들 몇 명이 앉아있는데 모두 눈을 가리는 약식 가면을 쓰고 있다.
‘저 정도 가면이면 금방 얼굴을 알아볼 텐데···’
신분을 숨기는 용도보다는 그저 풍습인 듯하다.
누구도 아는 체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경매를 기다리는 분위기이다.
얼마 후 직원이 들어와 홀로 안내한다.
경매의 시작은 어제와 같았다.
다만 파르비치오는 어제보다는 훨씬 활기차 보였다.
둘러보니 특별석, 일반석 가릴 것 없이 좌석이 거의 꽉 차 있다.
수군거리는 소리 중간에 알카드라이트를 언급하는 것이 들린다.
아마 알카드라이트가 경매 물품에 있다는 소문을 흘린 모양이다.
물품도 귀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300년전 현자로 알려진 일리오스의 그림.
마도 시대의 조각상.
미스릴이 섞인 사슬 갑옷.
특이한 것은 갈기 늑대의 새끼였다.
초보 용병 시절 고초를 겪었던 일이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사방에서 번호패가 올라오며 경쟁이 치열했다.
알카드라이트가 나왔을 때는 참석한 귀족은 거의 모두 경매에 뛰어들 정도였다.
낙찰가는 무려 80골드.
만일 마나가 가득한 원석 상태였다면 그 이상의 가격을 받았을 것이다.
레이는 경매장을 충분히 관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하드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황도와 제국에 인접해 있는 왕국들의 수도에서 운영되던 검투장을 인수했다.
모두 비교적 인기가 없던 곳들이었다.
연극과 오페라, 전차 경주 등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레이는 그간 아공간에 보관하고 있던 금괴와 보석들을 투자했다.
향후 진행된는 검투장 사업도 모두 나하드와 50대 50의 지분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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