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번의 도움
그 순간 좌측 담장 위에 두 개의 그림자가 숨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헉!’ 하며 숨이 덜컥 멎는다.
공격해 온다면 도저히 버틸 기력이 없다.
적이 아니기만 빌며 후정의 담장을 박찼다.
잠시 고통에 시달리던 허스틴은 레이의 발걸음 소리에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가 짜릿하며 근육이 당긴다.
‘제길! 말을 듣지도 않고, 잡지도 못하고. 도무지 일이 풀리지 않는군.’
벨트에서 하급 포션을 꺼내 어깨와 다리에 뿌리고는 곧장 레이의 뒤를 쫓았다.
“기다려! 할 말이 있다!”
“애드먼! 도와줘!”
옆에서 소곤거리는 소리에 사내가 “또요?” 하고 묻는다.
“그럼, 저대로 둘 거야? 자작가 놈들의 수작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레이를 구해야 계속 앞장서서 길을 찾을 테고.”
“이러다 대거 투척 전문가가 되겠어요”
애드먼을 그러면서도 대거를 오른손에 들어 오러를 가득 밀어 넣었다.
어둠 속에서 대거가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약간 절뚝이며 달려가는 허스틴의 등을 향해 대거를 던졌다.
‘슈우웃’ 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대거가 순식간에 허스틴에게 쏘아진다.
살기를 느낀 허스틴이 몸을 급히 돌리며 검을 쳐냈다.
- 카아앙!
둔중한 금속음이 나면서 튕긴 대거가 담벽에 꽂혀 손잡이가 부르르 떨린다.
‘상당한 오러가 담긴 기습이다. 에전에도 레이를 쫓을 때 경험했던 것 같은데... 뒤를 봐주는 자들이 있는 건가.’
허스틴은 재빨리 대거가 날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둘러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방을 경계하며 서 있던 허스틴은 참지 못하고 담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담벽 그늘에 붙어서 피하고 있던 두 조직원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빌어먹을! 엑스퍼트가 이렇게 흔한 검사였어?”
“야, 섣불리 끼어들었다가 죽을 뻔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살아난 게 어디냐? 관주 처소로 가서 날 밝을 때까지 피해 있자.”
그들은 소리를 죽이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는 무관 건너편 골목으로 뛰어들자마자 미리 봐두었던 구석진 곳에 진법판을 펼쳤다.
허공이 일렁이더니 옆 건물이 확장되면서 공간을 가로막는다.
이제 누가 지나가더라도 건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레이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우우!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그들이 적이 아니었다.
‘담장 위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이 허스틴을 막아주었다. 누구지? 지난번에 대거를 날려서 도와준 자들 같은데...’
마나를 전신으로 순환시켰다.
진탕된 내부를 달래고 비어있는 마나 오브도 빨리 채워야 한다.
담을 훌쩍 뛰어넘은 허스틴이 골목을 달려 옆으로 방향을 꺾었다.
‘엇! 사라졌다!’
반대쪽을 보았다.
그쪽에도 아무것도 없다.
은신한 자의 공격 때문에 잠깐 지체한 것이 추격을 망쳤다.
당황하여 머뭇거리던 허스틴은 마음을 정한 듯 처음 방향대로 달려 나갔다.
그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레이가 안도의 숨을 쉬려는데 발소리가 들린다.
‘응? 또 누가 있는 건가?’
상인 차림의 남자와 여자가 조심스럽게 허스틴이 간 방향으로 뛰어간다.
큰 키의 갈색 머리 남자, 단발의 적갈색 머리의 여자.
낯익은 인상들이다.
‘어라? 저들은 분명히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자들인데. 남자 하나와 여자. 상인. 상인. 행상··· 그래, 사건이 있고 나서 허스틴에 이어 마을을 찾아온 자들이 맞다. 지금까지 허스틴의 뒤를 쫓고 있었단 말인가! 허스틴은 나를 쫓고 있었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대륙을 건너는 먼 길을 움직였는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그렇다면 나를 도와준 게 저 남녀였구나. 루퍼슨 일당에게서 찾는 물건이 있는 모양이군. 결국 허스틴 일행처럼 슈나우더 검법서와 포션을 원하는 것이겠지.’
뭐가 됐든 일단 게이드가 먼저였다.
저항할 상태는 아니지만 레이는 천천히 게이드의 보호구를 벗기고 사지를 묶었다.
‘아직 죽으면 안된다. 큐어!’
큐어 마법을 펼쳐서 게이드의 부상을 완화시켰다.
“끄으응~”
정신이 돌아오는 듯 게이드의 눈이 떠진다.
온몸이 불로 지지는 듯 쓰라리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본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 하며 묶인 것을 깨닫고 위를 쳐다보았다.
방금의 기억이 떠오른다.
대결을 했던 자의 얼굴이다.
‘후우~ 다 끝났군. 이정도 부상이면 회복 불가능이다.’
레이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목까지 차오르는 살기를 가라앉히기가 버겁다.
“눈길을 보니 나를 아는 것 같군? 누군가?”
“4년 전쯤 그란델 자작령에서 개척 마을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불태운 적이 있지?”
“호! 그때 살아난 자인가? 누군가 도망친 것 같기는 했는데···”
“나머지 놈들은 어디 있나? 입을 열면 편히 죽여주지.”
게이드가 피식하며 입가에 비웃음을 짓는다.
“그걸 내가 말할 거라고 생각하나? 어차피 죽을 마당에?”
“조시도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네가 있는 곳을 토해내고 죽었지.”
게이드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스친다.
“조시가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네 짓이었군. 하지만 그놈이 그랬다고 나까지 똑같이 취급하지는 말게.”
“두고 보지.”
아이스 애로우를 소환했다.
손바닥 위에 한 뼘 길이의 짧은 얼음 화살이 형성된다.
화살을 게이드의 발등에 꽂았다.
‘퍽!’ 하며 화살이 발바닥을 뚫고 나온다.
“끄윽!” 하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게이드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파이어 애로우를 불러내서 이번에는 손등에 꽂았다.
불길이 손바닥을 뚫고 타오른다
“끄으윽!”
이번에는 신음이 조금 커지고 몸까지 경련한다.
그렇게 양발에는 아이스 애로우를 꽂았다.
양팔에는 파이어 애로우를 찌른 후 마나를 주입했다.
하반신은 발끝부터 얼어붙기 시작해 덜덜 떨리는데, 손바닥에 꽂힌 채 타오르는 불꽃은 팔을 태우며 올라온다.
섬광에 입었던 화상이 다시 불타는 것 같다.
몸의 반은 얼고, 반은 타오르면서 상반되는 두 가지 극한의 고통이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나머지 놈들은 어디 있지?”
“아악~ 모, 모른다. 정말 몰라!”
작은 불꽃들을 소환해 가슴의 그을린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상처 속으로 불꽃들이 헤집고 들어갔다.
게이드의 몸이 텅텅 튄다.
사지를 뒤틀며 비명을 지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꺼어억! 정, 정말 모른단 말이다.”
한숨이 나왔다.
아무래도 서로에 대한 정보를 비밀로 한다더니 사실인 것 같다.
뭔가 번뜩 머리를 스친다.
이놈은 조시의 죽음을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서로 있는 곳을 모르면서 조시가 죽은 것을 어떻게 알았지?”
“끄윽! 로든 그놈만 알고 있다. 다들 어디에 있는지.”
“그럼 로든이 소식을 전하고 있는 건가?”
게이드가 고통으로 입을 악다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불 화살과 얼음 화살에 마나 공급을 끊고, 큐어 마법을 펼쳤다.
“허억, 허억~~”
약간이나마 신음 소리가 잦아든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다시 불이 타오를 거다.”
“으윽~ 로든이 아주 중요한 정보가 있을 경우에만 정보 길드를 통해 소식을 전달한다.”
“정보 길드라고? 어디를 말하는 거지?”
“헉, 헉! ‘마레의 날개’다.”
‘마레의 날개가 게이드의 정보를 숨긴 이유가 이거였군. 이놈들이 마레의 중요한 고정 고객인 거지. 어지간한 보수로는 정보를 풀지 않겠군···’
로든의 정보가 가장 필요했다.
“로든은 혼자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자와 같이 있나?”
게이드가 머뭇거린다.
무언가 아는 것이 있는 눈치이다.
레이의 손에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자, 잠깐. 아마 대장 루퍼슨과 같이 있을 거다. 둘은 늘 붙어 다녔으니까.”
“그들과 어디서 헤어졌지? 대충 어느 나라로 갔는지 짐작할 것 같은데?”
게이드가 또 머뭇거린다.
손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키운 후 게이드의 얼굴에 던졌다.
불꽃이 게이드의 얼굴에 부딫혀 ‘펑’ 하고 터진다.
순간, 그의 머리카락, 눈썹, 수염과 함께 얼굴 피부가 불길에 쓸렸다.
“끄아악!!”
발버둥을 치며 몸을 뒤틀지만, 밧줄이 몸을 조이면서 고통만 가중시킬 뿐이다.
다시 그에게 큐어 마법을 시전했다.
“으어, 으어억!!!”
뒤집혔던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신음이 잦아든다.
“어디서 헤어졌고, 그들은 대충 어느 방향으로 갔지?”
“제국, 페르세이언 제국의 수도 슈토르히에서 헤어졌다. 탈취한 철함을 거기서 열고, 나는 여기로 온 거다. 로든은 아마 제국 근처에 있는 치안이 불안정한 국가로 갔을 거야. 그게 다다. 더 이상 몰라.”
조시에게 들은 바와 거의 일치한다.
이 자도 아는 것은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제국으로 가서 알아봐야 할지 잠시 고민이 들었다.
경련하던 게이드의 몸이 서서히 안정되고, 흔들리던 동공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푸우~’ 하고 숨을 크게 내쉰 게이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흐흐. 나는 여기서 끝났지만, 너도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헉헉. 루퍼슨 대장과 로든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을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욱’ 하고 검이 뽑혔다가 검집으로 돌아갔다.
게이드의 일그러진 얼굴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땅바닥에 처박힌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 아래에 웅덩이를 이룬다.
수많은 사람의 피로 땅을 물들였던 게이드.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피로 웅덩이를 만들고 거기에 얼굴을 묻었다.
두 번째의 복수가 끝났다.
어두운 하늘 저 어디에서 부모님이 내려보고 있을 것만 같다.
걱정하는 표정일지, 웃는 얼굴일지 알 수가 없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 놈을 찾아 복수를 했지만, 이들이 단기간에 이렇게 강해졌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아무리 슈나우더 검법이 뛰어난 검술이라 해도. 그렇다면 핵심 인물인 대장 루퍼슨과 로든은 어느 정도의 실력이라는 거지?’
그 자리에서 계속 감정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현실로 돌아왔다.
게이드의 옷을 뒤져보니 이 자도 옷 안쪽이 두툼하다.
천을 뜯어보니 슈나우더 검법의 필사본이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다시 옷에 넣었다.
‘도움을 받고 모른척 할 수는 없지.’
지금쯤 상단 지원을 갔던 관원들이 속은 것을 알고 돌아올 때가 다 되었다.
‘얼굴을 바꾸어야 한다.’
복면을 벗어 던졌다.
얼굴선을 곱게 하고 눈과 코도 가늘게 바꾸었다.
아공간에서 얇고 화려한 푸른빛의 고급스러운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어디 부유한 상단의 자제라도 되는 듯한 차림이다.
이정도면 안심하고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정신을 집중하여 두 남녀의 기운을 느끼려고 멀리 마나를 퍼뜨렸다.
잠시 눈을 감고 있자니 그들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진법판을 회수하고 몸을 건물 위로 날렸다.
건물 지붕에 진법판을 설치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근처의 골목을 뒤지던 남녀가 몸을 낮춘 채 무관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허스튼이 사라졌어. 레이를 찾지 못했으니 무관으로 갔겠지. 하아, 레이를 만났어야 정보를 캐보는 건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뒤를 따라다니다 보면 잃어버린 물건을 회수할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힘내세요.”
“고마워, 애드먼. 그런데, 잠깐! 웬 피 냄새가 이렇게 나지? 무관에서 여기까지 냄새가 퍼질 리는 없지 않아?”
“그렇네요. 어? 저기 사람 하나가 죽어있는데요.”
두 사람은 레이가 관주를 메고 피했던 것을 상기하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자!”
“아무래도 관주 같습니다.”
잘린 머리를 뒤집자 불에 그을린 관주의 얼굴이 보였다.
“맞군요. 레이가 한 일 같습니다.”
애드먼은 말을 하며 관주의 옷 주머니와 벨트를 뒤졌다.
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
실망하면서 옷 안쪽 여기저기를 두드리던 찰나, 품 안쪽에 두툼한 것이 느껴진다.
“엇, 옷 속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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