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스 목장
‘끄응~’ 하고 눈을 뜬 사내는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고개를 옆으로 틀다가 앉아있는 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후다닥 일어나더니 좌우를 둘러보고는 침대에서 얼른 내려온다.
“이런 실수가! 죄송하오. 내가 어제 취해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오. 며칠간 잠을 못 잤더니 이게 무슨 무례인지···”
“괜찮습니다. 덕분에 말동무가 생겨 즐거웠었어요. 아침이나 드시러 가시죠.”
일어나서 앞서자, 사내 페리스가 어쩔 줄 모르며 따라왔다.
팔던 토끼 고기를 좀 넣은 듯한 뜨근한 스튜가 나왔다.
한 그릇을 들이키더니 속이 풀린 듯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다.
“목마장이 성도 샤프란 방향에 있다면서요?”
“네. 여기 항구와 성도의 중간쯤에 있죠. 동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습니다만.”
레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말을 이었다.
“잘 됐군요. 저도 어차피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함께 출발하시죠.”
“아, 하지만, 저는 말이 없어서 같이 가기가 좀···”
“괜찮습니다. 저도 여기까지 북대륙에서 도보로 온 걸요. 헤어질 때까지 같이 걸어가죠.”
그는 낯선 이의 호의에 당황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말을 살 때부터 쭉 봐온 바로 레이가 나쁜 이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짐을 챙겨 나서자, 말이 페리스에게 다가가 ‘히힝’ 거린다.
“디셈버! 잘 잤니?”
말의 목을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토닥여 주자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부빈다.
“이놈이 딸과 같은 달에 태어나서, 딸이 디셈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죠. 얼마나 영리한지!”
눈에 애정이 넘쳐흐르는 것이 보인다.
아예 말을 페리스에게 맡기자, 반색하며 고삐를 잡았다.
9월로 접어들며 공기가 쌀쌀해져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다가왔다.
떠나보냈던 말과 시간을 더 갖게 되어 즐거운지 페리스의 얼굴이 환하다.
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좋은 말을 고르는 법, 말을 데리고 다닐 때 관리하는 법, 말 먹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기르는 가축 중에서도 말은 특별한 놈이었다.
사람과 가깝지만, 여전히 야생의 성질을 내면에 간직한.
드넓은 들판에서 달릴 때 말은 가장 기뻐하며 심지어 사람을 태웠을 때조차 마찬가지이다.
땅을 박차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때로는 풀밭을 때로는 자갈밭을 달리면서 기운을 뿜어내는 말을 보면 원시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의 기운이라···’
레이는 디셈버의 등에 손을 대고 내부를 스캔해 보았다.
‘허! 집에서 기른 토끼를 스캔했을 때와는 비교가 안되는군. 폐와 심장, 혈관에 맥동하는 기운이 수백 배는 강한 것 같다.’
‘말을 통해 선천적인 기운을 익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디셈버의 등에 마나를 흘려보내 폐를 잠깐 조여보았다.
전신에서 무언가 강렬한 기세가 솟아서 폐로 모인다.
이 기운은 폐를 어루만지고 활동에 힘을 실어주며 정상으로 회복하도록 도왔다.
감각을 최대한 그 기운에 집중했다.
‘엄청나게 강한 기운이다. 마나와도 다르고, 공기나 피의 흐름과도 다르다. 이 감각을 기억해야 한다.’
페리스가 무어라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레이는 폐에 모인 기운을 마나로 뒤에서 밀어보았다.
기운이 약간이나마 움직인다.
‘기운이 의지에 반응을 보인다. 조금만 더!’
마나를 반대 방향으로 보내면서 기운을 인도했다.
머뭇거리던 기운이 두 번 세 번 마나로 유인하자 뒤를 따른다.
‘성공이다. 기운을 원하는 방향으로 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길은 평지를 지나 낮은 언덕 위로 향했다.
미세하나마 디셈버의 호흡이 빨라졌다.
이번에는 레이가 전신의 기운을 의지로 불러와 폐로 모았다.
적은 양의 기운이기는 하지만 레이의 의도에 따라 폐로 기운이 달려온다.
폐의 활동이 조금 수월해진 것 같다.
신이 난 레이는 기운을 심장으로 인도했다.
심장의 수축과 이완에 힘이 실린다.
‘됐다. 이제 힐링 매직을 온전하게 시전할 수 있을 것 같다. 힐링 마나를 이상이 생긴 부위에 부여하고, 의지로 기운을 불러와 해당 부위를 정상으로 회복시키면 완성이다!’
일행이 굽어진 길을 돌아 해가 비치지 않는 숲 그늘로 들어갔을 때였다.
길 양쪽에서 험상궂은 사내들이 튀어나온다.
“이봐, 콜슨. 저놈들 맞지?”
사내들 틈에 낯익은 얼굴이 끼어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전날의 그 거간꾼이다.
“아, 그놈들 더럽게 오래 걸리네. 말을 탔다기에 금방 올 줄 알았더니 얼마나 기다린 거야. 씨발!”
페리스가 함께 있는 걸 본 거간꾼의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마침 말 판 놈도 함께 있네. 저놈도 함께 털면 꽤 수입이 되겠는걸. 흐흐흐.”
한참 명상에 빠져있던 레이는 방해꾼들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모처럼 조금의 잡념조차 없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는데 평정이 깨지고 말았다.
‘그래도 성과가 컸다. 한동안 막혔던 난관이 뚫린 기분이야.’
거간꾼을 빼고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든 사내가 넷.
페리스는 돈주머니가 든 가슴에 손을 얹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이 제대로 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페리스, 페리스! 정신차려요. 걱정하지 말고 디셈버를 데리고 옆으로 물러나 있으세요.”
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옆 나무 아래로 움직였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다.
“레, 레이. 조심하시오!”
손을 직접 쓰기도 귀찮았다.
길옆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크하하하! 저놈이 드디어 정신을 놓았구나. 나뭇가지를 칼로 착각하고 말이야.”
“이리 와서 무릎을 꿇어라. 가진 것을 모두 내놓으면 혹시 살려줄지도 모르지. 흐흐흐!”
힘없는 행상이나 노점상들을 괴롭히는 놈들은 어찌 저리 똑같은지 모르겠다.
나뭇가지를 들고 저벅저벅 다가갔다.
앞에 있는 힘깨나 쓸 법한 덩치가 입꼬리를 올리며 훌쩍 뛰어오더니 칼을 목으로 휘두른다.
“어?”
분명히 목을 쳤는데 어느새 놈이 비켜서 있다.
- 쉬이익!
나뭇가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둘러서 있던 사내들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이다.
- 빠각!
나뭇가지는 덩치의 왼쪽 팔을 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끄아아악~~”
바스라지듯이 부서진 팔을 붙들고 덩치가 땅바닥을 뒹군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고통이다.
레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에 있던 사내가 ‘어어어~’ 하면서 덩치와 레이를 번갈아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뭇가지가 칼을 든 사내의 팔에 떨어졌다.
또 한 번 통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칼 든 사내 역시 바닥을 뒹굴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사내들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자, 잠깐! 우리는 그저 콜슨이 말을 뺏겼다고···”
헝클어진 머리에 눈썹도 삐죽삐죽 튀어나온 사내가 몽둥이를 든 채 손을 떨었다.
레이는 계속 앞으로 나갔다.
뭔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또 들리며 세 번째 사내가 팔을 잡고 쓰러진다.
그 순간, 뒤에 숨어있던 한쪽 눈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레이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온다.
“죽어라, 이 새끼!”
레이는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섰다.
마치 행인이 많은 거리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피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이상하게도 느리게 움직이는 레이를 맞추지 못하고 지나쳤다.
옆으로 스치는 사내의 팔과 다리를 연속으로 두드렸다.
- 빠악, 빠악!
이번에는 두 번의 소리가 이어졌다.
달리던 방향으로 땅에 주욱 미끄러진 사내가 신음 한 마디 내지 못하고 입에서 거품을 뿜는다.
콜슨이라 불린 거간꾼의 얼굴이 시체처럼 죽어간다.
“이럴 수가! 마, 말도 안돼!”
그는 마지막 사내가 쓰러지자 돌아서서 곧장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순식간에 사내는 언덕 아래로 멀어진다.
사내가 힐끔 고개를 돌려, 그대로 서 있는 레이를 보고 안도하는 찰나였다.
무심히 쳐다보던 레이의 손이 허공에 선을 그었다.
작은 빛살 하나가 햇빛에 반짝이며 날아가더니 달리는 사내의 허벅지를 뼈째 관통하고 숲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째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온다.
거간꾼의 몸이 눈덩이처럼 언덕을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디셈버를 붙잡고 길옆에서 보고 있던 페리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레이가 나뭇가지를 던지고 쳐다보자 흠칫 몸이 떨린다.
“페리스, 이만 가죠!”
“네, 네!”
페리스는 갑자기 조심조심 다가와서 레이의 뒤를 따랐다.
레이는 모르는 척 언덕길을 내려갔다.
언덕을 지날 즈음 길옆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거간꾼이 보인다.
‘그 먼 거리에서 뭔가를 던져서 이 자를 맞춘 건가?’
놀라운 실력이었다.
이런 자와 동행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날이 저물어 길가에서 잠자리를 준비했다.
페리스가 보니 뭘 도우려 해도 도울 게 없다.
물을 떠오니 어느새 피워놓은 모닥불에 팬이 걸려있다.
각종 곡류와 고기까지 들어간 스튜가 구수하게 끓는다.
옆의 땅은 이미 평평하게 다져져서 낙엽을 깔고 모포까지 덮어놓았다.
귀신에 홀린 듯하다.
물은 왜 떠 왔을까?
모닥불 앞에 앉으니, 꼬치에 꿰어 구운 육포를 내민다.
색이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 고급 제품이다.
“고맙소!”
육포를 먹으면서 스튜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
고기와 곡물이 적당히 섞인 뜨끈한 스튜는 속을 풀어주고 마음도 느긋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용병 생활을 오래 하셨소?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용병 일을 그리 오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동안 경험은 많이 쌓았죠.”
페리스는 긴장이 풀리는지 몇 가지 질문을 더 하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가 떠온 물은 결국 설거지 용이었다.
다음 날은 평온한 여정이 이어지고 페리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단 며칠을 떨어져 있었는데도 딸이 그리운 눈치다.
귀가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단다.
그런데도 그의 걸음이 조금 느려지는 기분이다.
“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갈림길이오. 어쩌실 생각이오?”
페리스는 디셈버를 곁눈으로 보면서 헤어지기가 아쉬운 눈치이다.
속마음을 알 것 같아 살짝 웃음이 나온다.
“댁에 들러 하루 묵어도 될까요?”
페리스가 펄쩍 뛰며, 성큼성큼 앞으로 간다.
“하하, 당연하죠. 며칠 묵어도 괜찮소. 우리 안사람 음식 솜씨가 제법이라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초원은 파란 풀빛과 붉은 노을이 만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지평선을 경계로 하늘에는 양털 구름이 노을을 가득 품은 채 빛을 따라 뻗어가고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야산을 안은 초원은 땅거미를 예고하는 듯 짙푸른 색의 풀잎이 물결처럼 펼쳐진다.
목책 너머로 2층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다.
페리스가 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목책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페리스가 소리를 지른다.
“여보, 아리안! 나 왔어!”
곱게 휘어진 눈매에 도톰한 입술을 가진 고운 여인이 현관 앞에 나와 손을 흔든다.
“여보, 나 왔어. 아리안은 어때?”
“별일 없어요. 그런데 이분은?”
“아, 참. 우리 디셈버를 사주신 분이야. 길이 비슷해서 동행했는데 도적놈들에게서 구해주기도 했지.”
“도적이요? 다치지 않았어요?”
“어, 괜찮아. 자,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하자고.”
레이는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페리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몇 대를 이어 살았다고 한 집에는 오래된 가구와 손때 묻은 집기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잘 닦고 쓰는 듯 먼지 한 톨 쌓인 곳 없이 깔끔하다.
부인은 부랴부랴 말린 꽃잎으로 만든 차 한 잔을 내왔다.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두 사람은 아리안을 보러 갔다.
은은한 향이 풍기는 차 한 모금을 마시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조금 후 2층에서 내려오는 페리스의 얼굴이 그리 밝지가 않다.
‘막상 딸의 상태를 보니 다시 걱정이 되는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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