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이다!
레이가 발을 내딛었다.
쉴드와 검법을 동시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속도를 빨리할 수가 없다.
이미 기사들 쪽에서는 금속음이 나기 시작한다.
“위를 조심해!”
“아래, 아래도 온다!”
‘챙챙’ 거리는 소리와 분주하게 위험을 알리는 고함이 연신 터져 나왔다.
‘으지직’ 거리며 검풍 안으로 박쥐가 빨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용병들에게도 공격의 시작이다.
사방이 ‘스스스’ 하는 소름 돋는 소리로 가득하다.
쾅쾅거리며 방패와 검에 부딪히는 박쥐들의 소리가 난전을 알린다.
“악, 내 팔, 팔이···”
“어억, 발목이!”
방패가 없는 용병들이 먼저 상처를 입었다.
갑자기 앞쪽의 질주가 멈춘다.
수많은 박쥐를 검으로 막는데 한계가 온 것이다.
“파이어 볼!”
영창 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하늘로 불덩이들이 솟아오른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감싸안고 화염구가 폭발한다.
“퍼엉, 퍼엉!”
잇따른 폭발 소리와 함께 비산하는 불꽃으로 하늘이 환하게 빛났다.
그제야 탐험단 사람들은 나무 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하늘을 가리고 빽빽이 돋은 넓적한 이파리들은 실제로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수많은 박쥐들이었다.
불덩이가 터지자 일제히 박쥐들이 날아오른다.
검은 그림자가 하늘을 이중, 삼중으로 빽빽하게 덮는다.
“허억! 저게 다 몬스터?”
“수백이 뭐야. 수천, 아니 수만 마리도 되겠는걸!”
아케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더니 고함을 친다.
“출발! 전력으로 뛴다!”
파이어 볼을 던진 후 마법사들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탐험단의 마법사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두 번째 기회였다.
이들은 한 번 마법을 발현하고 나서 즉시 다시 마법을 쓰지 못한다.
‘아마 캐스팅에 소요되는 시간도 필요하고, 마나를 정비하는 데도 시간을 잡아먹는 것 같구나.’
더구나 몸을 움직이면서는 캐스팅을 하지 못하는 게 틀림없다.
병사들의 뒤를 따라 레이도 달렸다.
마나 소모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눈으로 본 박쥐의 숫자는 힘으로 상대할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피하는 길밖에 없다.
검풍의 범위를 전면에 한정하여 좁여서 최대한 마나를 아꼈다.
“악!” 하며 병사 하나가 발목을 절더니 옆으로 쓰러진다.
그 즉시 ‘쉭쉭’ 거리는 소리가 몰려들더니 병사를 새까맣게 덮어버린다.
뒤에서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용병이 넘어진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 대열에서 낙오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1분, 2분, 시간이 흐르면서 병사와 용병이 하나씩 뒤처져 갔다.
선두가 다시 멈춘다.
“파이어 볼!”
조금 후 하늘에 다시 섬광이 터져 올랐다.
불길에 휩싸인 수많은 박쥐들이 기성을 지르며 허공에서 이리저리 선회한다.
박쥐들의 공격이 잠시 멈췄다.
대열이 다시 질주한다.
이런 일이 세 번째 반복되자 파이어 볼의 위력이 현저히 약화된다.
그 틈을 파고 든 박쥐가 마법사의 목을 스친다.
“끄으윽~~”
목에서 피가 솟구치며 마법사 하나가 고꾸라졌다.
“모라드!”
옆의 동료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목이 반쯤 잘린 마법사는 이미 의식을 잃은 후다.
그를 두고 대열은 앞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제 선두와 후미를 가리지 않고 비명 소리가 잇달았다.
필모어는 온몸이 땀에 푹 전 채 트래커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이놈의 숲은 언제 끝나는 거냐? 이러다가 다 죽겠구나!”
호흡은 거칠었지만, 눈빛은 살아있는 에르고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겁니다.”
두 번째 마법사의 희생이 나왔다.
“안돼, 데오르!”
앞서 달리는 마법사가 비틀거린다.
발목이 잘려 뒹구는 순간 박쥐들이 떼를 이루어 날아온다.
마지막 기사 베일론이 그의 뒤를 막아섰다.
‘채채챙!!’ 하며 무리 지은 대여섯 마리의 박쥐가 베일론의 검에 튕겨 나갔다.
하지만 선두와 거리가 벌어지면서 그 틈으로 날아든 박쥐 한 마리가 기사 베일론의 귀밑으로 스쳐 지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베일론은 귀에서 ‘지이잉!’ 하는 소음을 들은 것 같았다.
허리 꺾인 인형처럼 그가 마법사 데오르 위로 고꾸라졌다.
수십 마리의 박쥐들이 그 위를 새까맣게 덮는다.
“헉헉!”
레이도 숨이 턱에 찼다.
검풍의 범위를 줄인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마나를 잡아먹는 수법이었다.
더구나 윈드 쉴드는 축소할 수도 없었다.
자칫하면 동료들이 머리에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뒤에서 ‘퍽, 퍽!’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작은 신음이 새 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방패와 표창으로 보호했다고 해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새까맣게 몰려드는 몬스터의 공격이 빈틈을 파고든다.
아케인은 검막을 넓게 펼쳐 필모어와 앞쪽의 마법사들을 보호했다.
그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숲이 계속된다면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그러면 전멸이다.’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을 떨치며, 기합을 내질렀다.
“이야압! 거의 다 왔다. 힘내라!”
그때 기사 바펜이 갑자기 고함을 친다.
“밖이 보인다~~~”
아케인과 마법사, 트래커 모두 앞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하늘 한쪽에 빛이 보인다.
그 빛은 분명히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병사들과 용병들 속에서도 고함이 터진다.
“다 왔다!!! 가자!!!”
“이야아~ 살았다!!!”
데모닉 배트의 공격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이를 막아내는 검에 힘이 실렸다.
바닥을 보인 마나를 억지로 끌어올린다.
레이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사라진 지 오래다.
회전하는 검의 속도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검풍에 빨려드는 몬스터들도 다시 살아서 허공으로 빠져나간다.
‘조금만 더! 조금만!’
선두가 밝은 빛으로 접근한 것이 보인다.
“이야아!!!”
레이도 배에 힘을 주며 마지막 기합을 끌어내서 하늘로 외쳤다.
발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열 걸음, 열한 걸음···
순간 눈앞이 환해진다.
‘빠져나왔다!’
머리가 핑 돈다.
스르륵 몸이 무너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뒤를 따라온 팀원들과 몇몇 살아남은 용병들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저기 풀썩풀썩 엎어지고 넘어진다.
4~5분이 지나서 정신이 들자 모두들 끙끙대며 신음을 뱉는다.
대부분 몸에 베인 상처투성이다.
알렉스 팀이 그나마 부상이 얕은 편이라 먼저 허리를 일으켰다.
레이는 아공간에서 작은 알카드라이트 석 하나를 소환해 손에 쥐었다.
누운 채 마나 오브의 회전에 전념했다.
보석으로부터 마나가 쏟아져 들어온다.
물이 가득 찬 가죽 주머니에 구멍을 낸 것 같았다.
압축되어 있던 마나에 길을 트자 레이의 마나 오브로 폭포처럼 밀려드는 것이다.
잠깐 사이에 상당 부분 마나를 회복한 레이가 일어섰다.
이전처럼 팀원들에게 하급 포션을 바르며 몰래 큐어 마법을 펼쳤다.
찡그린 얼굴이 펴지고, 몸을 추스르는 것이 옆에서도 확연히 보인다.
쭈뼛쭈뼛 카르타가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포션에 여유가 있으면 좀 빌려주겠소? 부상들이 심해서 말이지.”
그의 얼굴과 팔, 다리도 피투성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그레엄도 따라와 같은 요청을 한다.
이제 카르타 용병단 3인에 그레엄 용병단은 단장까지 단 두 명만 남았다.
이제 알카드라이트 없이도 마나 오브가 원활하게 회전하고 있는 레이는 여유를 되찾았다.
직접 용병들을 찾아가 하급 포션을 붓고, 큐어 마법도 시전했다.
“허! 이거 상급 포션 아닌가? 어찌 포션을 바르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회복이 된단 말인가?”
카르타가 탄성을 질렀다.
그레엄 또한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포션과 마법의 시너지 효과였지만 그것을 알 리 없다.
병사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용병들은 레이의 윈드 쉴드의 방어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의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병사들 수는 단 4명.
에르고와 사드는 정말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전에 내수림에 왔을 때는, 이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수림 깊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몬스터들을 피하는 것이 가능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내수림의 바깥 지역임에도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상급일 뿐 아니라, 환경도 험악해졌다.
탐험단이 거의 붕괴 직전이다.
‘이번에 돌아가면 내수림 쪽은 쳐다보지도 않겠다.’
구석진 곳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날 트래커를 앞세워 트롤을 추적했다.
트롤의 흔적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이곳저곳에 트롤의 털들이 날렸다.
트롤의 오줌과 똥 냄새가 짙어졌다.
자신의 영역임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어 다른 몬스터들은 얼씬도 하지 않는다.
덕분에 트롤을 추적하는 동안에는 몬스터의 습격이 사라졌다.
박쥐의 숲을 막 나섰을 때는 초원이었던 풍경이 관목숲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거목숲으로 바뀌었다.
추적 3일째 되는 날의 풍경이었다.
에르고가 사드에게 속삭였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 같지 않은가?”
“네, 그렇군요. 발에 밟힌 풀이 아직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어요. 하루가 되지 않은 듯합니다.”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트롤의 서식처를 곧 찾을 수 있겠군.”
아케인이 앉아서 발자국을 보고 있는 에르고에게 물었다.
“어떤가? 가까이 온 것 같은가?”
“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들키지 않도록 더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탐험단은 일체의 소리를 죽이고 트래커를 따랐다.
발자국은 산 중턱으로 향했다.
멀리서 아래쪽을 보니 산허리 우묵한 곳의 나무 뒤에 바위 절벽이 솟아있다.
“더 이상 가까이 가면 위험합니다. 저 나무 뒤에 동굴이 있군요. 거기가 트롤이 사는 곳 같습니다.”
탐험단은 나무 그늘 뒤에서 동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고요하다.
필모어가 크게 숨을 내쉰다.
“여기가 맞단 말이지?”
에르고를 보고 물었으나, 사드가 얼른 입을 열었다.
“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 저 동굴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그럼 일단 여기에 숨어있어야겠군. 너희들은 여기를 위장하도록!”
병사들이 나뭇가지를 베어 사방을 가리고, 냄새를 없애는 야초액을 몸에 뿌렸다.
필모어가 마법사와 기사들을 모았다.
“트롤이 보통 가족을 이루어 산다고 했습니다. 동굴에 몇 마리가 있는지 확인하고, 한 마리가 남아있을 때를 노려야 할 것입니다.”
기사 바펜의 의견에 갈디아크가 덧붙인다.
“마법사님들과 기사들의 공격 방향을 미리 정해야 할 것입니다. 트롤의 가죽은 튼튼하기는 하지만 오러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특히 눈이 약하다고 하니, 마법사님들이 눈을 공격하면 어떨까요?”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결국 트롤을 감시해서 한 마리가 남을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마법사들의 공격은 주로 머리, 특히 눈쪽을 겨냥한다.
용병들이 트롤의 시선을 끌고, 기사들이 트롤의 약점을 공격한다.
인간형 몬스터 공격의 정석적인 패턴이었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트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마리가 동굴에서 걸어 나온다.
먼저 나온 놈은 4미터를 훌쩍 넘기는 덩치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뒤의 큰 놈은 거의 5미터에 육박한다.
팔 하나가 사람만 하고, 손에는 부러진 나무를 대충 두드려 만든 것 같은 길이 2미터 정도의 몽둥이를 들고 있다.
트롤의 손에 있어 몽둥이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육중한 나무 둥치라 해야 할 것이다.
시커멓게 손때 묻은 둥근 몽둥이는 스치기만 해도 무엇이든 부서트릴 것 같다.
온몸을 덮은 흑갈색 털 속에 적색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고 있다.
최상급 몬스터의 특성 그대로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쏟아진다.
평범한 사람은 살기를 마주 대하기만 해도 몸이 얼어붙을 것이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쿵쿵 울린다.
트롤 두 마리는 산 위쪽에서 내려보는 사람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탐험단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보고 있었다.
말로 듣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은 켈베로니안 협곡의 너비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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