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입(1)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그의 검에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때로 부드럽게, 때로 강하게.
전투의 극적인 전환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었다.
힘이 실린 베기를 막은 타리크가 이어지는 부드러운 공격을 예상하며 발을 옮기는 찰나였다.
루포릭이 도약하여 앞으로 쇄도해 왔다.
전력이 실린 검이 사선으로 타리크를 덮쳤다.
그 역시 황급히 힘을 모아 검을 부딪혀갔다.
- 콰우웅~~
관중들이 터져 나온 폭음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들려 왔던 소리의 두세 배는 됨직한 무거운 굉음이었다.
타리크의 몸이 휘청하며 우측으로 밀렸다.
그의 검을 치고 나간 루포릭이 몸을 그대로 회전시키며 같은 지점에 또 한 번의 검격을 휘둘렀다.
두 번째 폭음이 터지자, 어깨에 오는 충격이 전신으로 퍼진다.
그 순간 루포릭의 찌르기가 전투 시작 후 처음으로 타리크의 목으로 날아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타리크가 눈을 꽉 감았다.
‘이런, 끝이다!’
목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나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사방이 고요하다.
관중들마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와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신호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경기장이 들썩거리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챔피언!!”
“챔피언!!”
레이와 일행들 모두 루포릭의 검술에 감탄했다.
“저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전투를 끌고 갔던 것이군. 그리고 때가 되자 마무리를 지은 거고. 정식으로 검법을 배웠다면 대단한 검사가 되었겠는걸.”
모두 트레비의 말에 수긍하는 눈빛을 보냈다.
경기가 끝나고 늦은 밤 레이의 방으로 모였다.
“오늘 경기장은 잘들 보았지? 검투사의 탈출을 막으려고 출입구를 두 곳만 만든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 같아. 트레비, 계획에 변동은 없겠어?”
“이리 알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그대로 추진한다. 생각보다 관중석과 경기장이 넓은데. 밤에는 그곳에 경비가 없다는 점이 다행이군.”
중요한 시설과 금고, 검투사의 숙소 등은 모두 지하에 있다.
텅 빈 경기장을 감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 1주일 후 다시 경기가 시작되니 내일부터 철저히 준비하자고.”
추격이 어려운 좁은 길을 통한 탈출로를 확보해야 했다.
남문이 열리기 전까지 잠시 은신할 곳.
외성 밖에서 가까운 마을로의 경로 등.
알렉스와 티탄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준비했다.
트레비와 로잔느는 매일 치료소에서 교육을 받았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레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철방에 들러 검을 구입한 것이다.
100개에 가까운 많은 양이었다.
다음으로 검투장 사방에 낮은 주택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이틀의 시간을 소비한 후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평민들의 거주지 안이었다.
단층 주택 사이 공터에 커다란 오크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검투장 첨탑까지 시야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 설치를 하면 되겠군.’
레이는 인적이 끊긴 밤중에 이곳을 다시 찾아왔다.
아공간에서 세사를 꺼내 굵은 둥치에 감았다.
다른 쪽 끝은 표창에 묶는다.
그간 연습한 추적 마법을 발휘할 시간이다.
‘거리는 대략 100미터? 그간 연습한 대로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첨탑의 공간 좌표를 향해 표창을 던졌다.
어두운 밤하늘에 회색 표창이 소리 없이 날아간다.
첨탑에 도달할 때쯤 좌표를 바꾸어 호선을 그리게 했다.
표창이 첨탑을 한 바퀴 돈다.
다시 좌표를 손바닥 위로 설정해 표창을 불렀다.
첨탑까지 두 줄을 연결한 표창이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됐다! 이 가는 세사를 발견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세사를 나뭇가지에 묶었다.
이제 나머지는 비올라 팀의 몫이다.
경기가 열리기 4일 전.
나하드의 수하 중 입이 무거운 자를 대동하고 레이는 외성 밖 암시장을 찾았다.
정해진 날짜 없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열리는 시장.
공개된 시장에서 매매할 수 없는 장물이나 고가의 물품. 불법 약재.
그리고 노예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거래되는 불법 마켓.
그렇다고 왕성이나 영주성에서 시장을 강하게 규제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의 일부는 결국 귀족들에게 이런저런 명목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서서히 해가 기울어 철수 시간이 가까워 올 무렵이었다.
바깥에 마차를 세운 두 사람이 시장으로 향했다.
레이는 호위 무사로 분하여 하이론이라는 상인의 뒤를 따랐다.
“몸이 건장하고 싸움을 잘할 것 같은 자를 고르란 말씀이죠?”
“그렇소. 적당하기만 하면 되오. 아주 뛰어날 필요까지는 없소.”
무기, 책자, 약초, 보석 등.
갖가지 상품들을 늘어놓은 상인들이 좌판을 덮기 전 조금이라도 더 판매하기 위해 호객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철창들이 길게 늘어져 있는 천막이 나타난다.
“저깁니다. 따라오시죠.”
하이론은 앞서서 천막 쪽으로 다가갔다.
40은 넘어 보이는 얄팍한 인상의 사내가 뛰어온다.
흉작으로 노예 수요는 줄어들고, 빚을 갚지 못해 노예로 팔리는 자는 많아졌다.
암시가 닫히기 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상품을 찾으시는지요?”
아주 싹싹한 말투로 허리를 연신 굽힌다.
“튼튼한 남자 노예 하나 봅시다.”
“아이고, 마침 괜찮은 상품들이 몇 있습니다. 이리 오시죠.”
예닐곱 개의 철창 중 하나에 20세 전후의 남자 노예를 모아놓고 있다.
다섯 사내의 눈이 철창 밖을 향한다.
일부는 공허한 눈빛이지만 적개심 어린 눈빛의 사내도 있다.
덩치도 있고 힘깨나 쓸 것 같다.
하이론이 하나하나 눈길을 주며 레이의 눈치를 본다.
찍어 두었던 사내에게 눈길이 가는 순간 슬쩍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험어험! 저기 저 노예를 봅시다.”
“아이고, 제가 보유한 상품 중 가장 괜찮은 놈입니다요. 안목이 보통이 아니시군요.”
철창에서 사내를 밖으로 꺼냈다.
양발에 쇠사슬이 묶여 도망을 치기는 어려워 보인다.
눈빛을 보니 아직까지 팔리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저런 눈빛의 노예는 데리고 가봐야 사고만 치기 마련이다.
하이론은 별반 살피지도 않고 가격을 물었다.
“마지막 손님이니 특별가에 모시겠습니다. 50실버만 내십시오.”
적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하이론은 레이의 신호에 따라 흥정도 하지 않고 가격을 지불했다.
열쇠를 받아 들고 노예를 끌고 돌아섰다.
상인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채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마차로 돌아갔다.
하이론을 바깥에 있게 한 후 레이는 노예를 데리고 마차로 들어갔다.
둘이서만 마차에 타자 사내는 마차 안을 둘러보며 의아해한다.
수면향을 적신 천으로 사내의 입을 막았다.
“욱욱, 뭐, 뭐하는···”
사내는 반항했지만, 레이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다.
스르르 옆으로 넘어지더니 잠에 빠진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사슬을 발목에 채웠다.
그의 얼굴을 관찰한 후 최대한 비슷하게 디스가이즈 마법을 펼쳤다.
“자, 이제 가시죠.”
하이론이 눈을 크게 뜨며 노예로 변장한 레이를 쳐다본다.
“아니, 이게 어떻게?”
“쉿. 아무 말 하시면 안됩니다.”
“아, 예!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하드 경께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이론은 레이를 데리고 다시 노예 상인에게 갔다.
문을 닫고 있던 상인이 인상을 찌푸린다.
“아니, 손님. 왜 노예를 다시 데리고 오셨는지?”
“이것 보게. 제일 튼튼한 놈이라고 해서 흥정도 하지 않고 구입했는데 마차에서 옷을 벗기고 살펴보니 속이 부실하기 짝이 없어. 사납기는 또 얼마나 사나운지.”
“저, 다른 상품으로 교환하기를 원하시는지요?”
“무슨 소리인가. 한 번 속았으면 됐지. 내가 또 속을 줄 아는가? 잔말 말고 돈을 돌려주게.”
상인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 한 번 구입한 상품은 반납이 안됩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안된다? 사기를 쳐서 물건을 팔고도 반납이 안된다? 너희들이 사업을 접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 백작 각하의 호위 기사들을 당장 부르랴?”
상인의 코가 씰룩인다.
‘이런 씨부럴 놈. 어따 대고 협박이야, 협박이!’
영업을 끝내는 마당에 백작가의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끄응! 정히 그러시다면 수수료는 떼고 드리죠. 원주인에게 알린 뒤라 그냥 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수수료? 그것이 얼마인가?”
“30퍼센트입니다. 수수료 떼고 35실버 돌려드릴 테니 받고 가시든가, 아니면 호위를 부르든가 마음대로 하십시오.”
상인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세게 나갔다.
계속 저자세로 나가다가는 고스란히 돈을 되돌려줘야 할 판이다.
하이론은 잠시 고심하다가 못 이기는 척 35실버를 받았다.
“내, 정말 많이 참는 줄 알게. 그 잠깐 사이에 15실버를 떼다니. 에잉!”
하이론은 혀를 차며 쇠사슬의 열쇠를 상인에게 건네고 돌아섰다.
그가 레이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레이는 고개만 미미하게 끄덕였다.
“이리 와라, 이 쓸모없는 놈! 그 눈깔 때문에 될 일도 뒤집어지는구나.”
상인은 철창을 연 후, 쇠사슬을 거칠게 잡아끌며 레이의 등을 찼다.
우당탕하고 레이가 철창 안으로 굴렀다.
“베르토, 여기 눈빛 사나운 두 놈은 검투장으로 보내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봐야 안 팔릴 놈들이다. 여기서 처리한다. 요즘 검투장에 사람이 모자라다니 35실버를 달라고 해라.”
“네. 그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는 오히려 거친 자들을 원하니까요.”
천막이 걷히고 마차에 철창이 옮겨졌다.
레이와 또 한 노예는 작은 철창으로 옮겨졌다.
천으로 덮어 밖을 보지 못하게 한 채 마차는 성안으로 달렸다.
반 시간 후 레이는 경비들에 의해 검투장 지하 3층으로 이송되었다.
이미 도면으로 확인한 바와 같이 지하 2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딱 하나뿐이었다.
통로는 계단 위와 아래에 각각 철문이 달려있고 경비들이 두 명씩 배치되었다.
레이와 노예를 데리고 두 명의 경비가 아래로 내려갔다.
“여, 또 새로 들어온 검투사인가? 좀 쓸만한 자들인가? 한두 번은 버텨야 할 텐데!”
“모르지. 튼튼한 자들이라고 했으니. 흐흐흐!”
사슬이 풀린다.
근무 중이던 자들이 철문을 열어주었다.
좌우로 빙 둘러 철창이 보였다.
나하드의 자료에 따르면 작은 감방처럼 보이는 곳이 검투사들의 거처이다.
좁은 것이 흠일 뿐, 안은 깨끗하고 식사도 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은 넓은 공간으로 수련장으로 쓰인다.
레이가 구석에서 두 번째, 같이 온 노예가 가장 구석의 방이 배정되었다.
챔피언과 상급 검투사들이 차지한 가운데 방들은 층 전체가 보이고, 다른 방들보다 2배 이상 크다.
방에 들어가니 침대와 작은 테이블, 의자, 그리고 구석에 변기가 놓여 있다.
청소에 신경을 쓴다지만 퀴퀴한 냄새가 코로 들어온다.
지하의 습기를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침대에 누웠다.
삐걱거리기는 소리가 거슬리지만 잠자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경기가 없는 날의 생활은 단순하다. 하루 세 번의 식사. 그리고 오전과 오후의 수련 시간.’
수련이라고 해봐야 원하는 자와의 목검 대련이나 단독 훈련이 다이다.
이 훈련 시간에 루포릭을 설득해야 한다.
저녁 식사 시간부터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까지는 철창이 닫힌다.
방에서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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