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 초토화
마나에 의존하지 않고 어둠을 이용해 스르르 흘러가는 그림자를 느끼려고 애써보았다.
‘어쌔신에게도 그들만의 기운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기척을 숨기고, 살기를 감춘다 해도 기운 자체가 없는 생명체가 어디 있겠는가.’
눈을 감았다.
벽에 등을 붙이고 들어오는 공격을 막으면서 이동하는 그림자를 상상했다.
방안의 공기, 침대, 탁자, 의자···
이들과 다른 움직이는 기운이 있다.
어두운 방안은 정적 속에 있다가, ‘챙챙’하는 금속음이 들리고 다시 조용해지기를 반복했다.
어쌔신 5호의 검이 또 막혔다.
몸을 낮추며 자리를 옮긴 5호의 복면 속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린다.
두 명의 2급 어쌔신이 시선을 분산시킬 때 자신이 사각지대에서 검을 날리고 있다.
그런데도 상대는 여유있게 이를 막아낸다.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목표에 대한 분석이 잘못된 것 아닐까?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불안감이 든다.’
어쌔신들의 냉정함이 흔들리면서 잠깐씩 기운이 새 나왔다.
레애의 감은 눈이 잘게 깜빡인다.
‘느껴진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방안 다른 물체와는 다른 기운이었다. 더 집중해 보자.’
서너 번의 공격을 더 막아냈다.
이를 통해 어쌔신들이 빠르게 이동할 때 기운을 조금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속이 비어있는 유리공 같구나. 물에 들어가면 물색, 풀숲에서는 풀색. 주변과 곧장 동화되는 기운이라. 재미있구나.’
모든 공격이 무산되자, 어쌔신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의 왼손에 표창이 소환됐다.
‘슉’ 하는 소리가 난다.
벽에 붙어있던 어쌔신이 목을 잡으며 앞으로 쓰러진다.
또 한 번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탁자 아래에 있던 어쌔신이 그래도 바닥에 무너진다.
어쌔신 5호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음을 느끼고 창으로 몸을 날렸다.
열린 틈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다.
상대는 자신의 재빠른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됐다. 도망칠 수 있다.’
막 몸을 내미는 순간 뒤통수가 따끔한다.
‘쿵’ 하고 창 아래쪽 벽에 부딪힌 5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디텍트!’
마킹 마나를 발현시킨 후 골목 건너 지붕 위에 엎드려 있는 복면인에게 전력으로 쏘았다.
복면인이 일어서는 찰나 아슬아슬하게 마킹이 성공했다.
그는 암살이 실패한 것을 알아채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날렸다.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속도였다.
오늘 감시 임무를 맡은 어쌔신 8호는 신법에 자신이 있었다.
목표와의 거리 정도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자신을 쫓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8호는 교육받은 대로 행동했다.
골목을 지나고 담을 넘었다.
문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래 쪽의 작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변장을 풀었다.
반대 방향의 출구로 나가 행인으로 위장해 지부로 돌아갔다.
레이는 죽은 자들의 몸을 뒤졌다.
역시 신분을 알 수 있는 물건은 없었다.
다만 모두 허리에 병 하나씩을 차고 있었다.
주둥이가 길고 뾰족해서 병뚜껑을 열고 기울이면 안에 든 것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살짝 냄새를 맡아보니 수면향이 맞다.
하나는 비었고, 두 개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다.
두 병을 챙기고 디텍트 마법을 펼쳤다.
동북쪽 주택가 방향에서 마나 향기가 느껴진다.
8호는 지부에 도착하자 주변을 살피고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제국 수도에서 볼 때 지부라고 하지만 왕국에서는 전체를 관할하는 사실상의 본부이다.
집무실에는 지부장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지부장님, 실패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실패라고? 3명이 갔는데 실패했다고?”
“수면향을 뿌리고 한참 뒤에 셋이 진입하여 제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투 끝에 모두 죽는 걸 보았습니다.”
지부장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그럴 리가. 설사 엑스퍼트라고 해도 빛이 없는 곳에서는 1급 어쌔신을 어찌할 수 없거늘. 2명의 2급이 받쳐주었는데도 실패했다고?”
본부의 목표 분석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지부의 어쌔신 몇 명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다.
물론 숫자로 밀어붙이면 해결되겠지만, 의뢰 하나 때문에 지부가 망하자는 짓이고.
연속된 실패로 자리가 위태롭다.
본부의 실수를 분명하게 항의하지 않으면 일선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지부장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알았다. 너는 일단 숙소로 복귀해라.”
이 와중에도 하룻밤을 대기했다고 하품이 나온다.
본부에서 내려온 지시서를 다시 열어본다.
‘목표의 위험 등급 2급.’
확실하게 적혀있다.
‘제길! 망할 놈들이 엉터리 정보를 주고도 실패하면 현장에 책임을 돌리겠지? 먹히든 먹히지 않든, 날이 밝자마자 전서구를 날려야겠군.’
또 하품이 나온다.
‘나도 늙었군. 예전에는 며칠 밤을 새워도 기지개 한 번 펴지 않고 끄떡 없었는데···’
지시서의 글자가 약간 이상하다.
방금 전보다 흐릿해 보인다.
‘왜 이러지? 갑자기 눈이 뻑뻑하네.’
지부장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머리를 책상에 처박는다.
방안이 조용해졌다.
그림자 하나가 창에 붙어 마나 블레이드로 창틀을 갈랐다.
창이 소리 없이 통째로 빠진다.
레이가 창을 타고 안으로 들어왔다.
‘지하에는 어쌔신들 십여 명이 자고 있다. 굳이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겠지.’
스캔 매직으로 건물을 훑어본 결과 1층에 집무실과 회의실, 2층에 방이었다.
지하에는 비밀 훈련장과 숙소가 설치되어 있다.
‘이런 조직이면 어딘가 비밀 공간이 있을 텐데···’
스캔 매직으로 집무실 위아래와 사방 벽 너머를 살폈다.
‘천장과 바닥 아래는 없고. 이쪽 벽도 이상 없고··· 여기다!’
집무실 책상 좌측 벽 뒤에 작은 밀실이 보인다.
벽을 두드려 보고, 걸려있는 그림도 치워보았다.
어떻게 비밀 공간을 여는지 알 수가 없다.
‘할 수 없지.’
단검을 꺼내 마나를 불어 넣었다.
마나 블레이드가 단검 길이만큼이나 길게 검 끝으로 솟는다.
벽을 찌르니 목재로 된 벽이 흠집만 나고 단검을 튕겨낸다.
‘보통 나무가 아니구나. 쯧!’
마나 블레이드에 ‘사프니스’를 매직을 중첩해서 부었다.
‘윈드 쉴드’의 회전력을 응용한 ‘윈트 커터’ 매직까지 더했다.
마나 오브를 최대한 돌리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마나 블레이드를 다시 한번 벽에 찔러 넣었다.
쑤욱 하고 검이 벽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대로 아래로 내려긋고 다시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벽을 사각으로 자르고 나니 전신이 후끈 달아오른다.
짧은 시간에 마나를 폭발적으로 퍼부은 영향이다.
통로가 생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수납함 예닐곱 개가 벽에 열을 지었다.
열어보니 각종 도구와 특수 장비, 병기와 특수 방어구들.
일단 아공간에 수납함 전체를 담았다.
어쌔신들의 수법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었다.
가장 안쪽 구석에는 대형 철제 금고가 서 있다.
폭이 1미터에 높이 1.5 미터.
두드려 보니 얼마나 단단한지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무게도 엄청나서 당겨도 움직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나 블레이드를 일으켜 금고 옆면을 찔렀다.
레이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
아예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보통의 강철이 아니구나. 오러 사용자들이 억지로 부수는 것도 막도록 특수 제작되었군.’
팔짱을 끼고 금고를 응시했다.
‘가만! 이렇게 크고 무거운 물체도 아공간 수납이 가능하려나?’
레이는 금고에 손을 대고 아공간에 들어가 있는 금고를 상상했다.
순간, 앞에 있는 금고가 사라지고 아공간 속에서 나타났다.
‘성공이다! 이렇게 큰 물건도 저장이 가능하구나.’
밖으로 나와 지부장의 몸을 뒤져보았다.
나오는 것이 없다.
책상 위의 펼쳐진 접힌 자국이 가득한 종이를 읽어보았다.
목표: 용병으로 추정되는 20대 후반 남자
위험 등급: 2급
용모: 키 180센티. 적갈색 머리. 하늘색 눈동자, 두터운 코.
장기: 표창
기간: 최단
이력: 최근 파티노파 부두목 살해.
불꽃을 소환해 태워버리고 문을 나섰다.
창으로 햇살이 비춰 들어왔다.
‘이런, 깜빡 잠이 들었나?’
고개를 들고 마른 세수를 한 지부장이 책상 위를 보았다.
종이가 타고 남은 재가 펄럭인다.
‘책상 위에 재가?’
섬뜩함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황급히 사방을 둘러봤다.
“헉! 저게 뭐야?”
밀실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대수림 안에서도 찾기 힘들다는 단단한 흑철목으로 벽을 둘러쳤는데 그걸 잘라냈다.
후다닥 일어나 밀실로 뛰어 들어간다.
‘제발, 제발!’
안이 텅 비어있는 걸 확인하자마자 입에서 허탈한 욕지거리가 나온다.
“이런 씨부랄! 어떤 새끼가!”
벽을 짚은 손이 덜덜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가 힘들다.
각종 무기류와 특수 장비들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다.
오직 본부에서 조달되는 물품들.
거기에 길드의 비밀이 보관되어 있는 금고까지.
금고가 열리고 그 속의 자료들이 유출되면 자신은 아마 쉽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본부 간부들의 분이 풀릴 때까지 살려두고 살을 잘라내며 고문할 지도···
아니, 조금씩 불에 그을려 죽일 지도 몰랐다.
전신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책상으로 돌아와 서랍을 열고 안의 비상종을 울렸다.
지부에 대기하던 전 인원이 집무실에 모였다.
이들도 들어오자마자 집무실 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를 못한다.
지부장이 8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침착하려 해도 목이 떨려왔다.
“누, 누구 짓인 것 같나?”
대충 짐작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8호가 고개를 숙이며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뗀다.
“어제, 그놈 짓 아니겠습니까?”
“끄응!”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지부장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암살로 해결될 단계를 넘어섰다.
“내가 가보는 수밖에 없겠지?”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다.
“제기랄. 8호만 남고 모두 나가봐.”
마치 자신의 잘못이기라도 한 듯 안절부절하는 8호에게 화풀이처럼 말을 내뱉었다.
“앞장서라. 놈이 있다는 여관으로 가자. 씨발. 거기 있어야 할 텐데···”
레이는 방으로 돌아와 금고를 꺼내 놓고 시신들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클린 마법으로 방을 치웠다.
이 짓도 여러 번 하니 익숙해진다.
지부에서 가져온 도구 중에 신기한 것이 많았다.
살상용 독이나 마비산, 수면향 등 독극물들.
그리고 이들을 발라서 투척할 수 있는 바늘 모양의 작은 침.
‘이건 당장 쓸 일은 없겠군.’
팔에 감기는 가는 사슬 고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사, 다양한 길이의 단검들, 무기가 발사되는 장치, 소형 방어구와 방패···
팔에 감기는 사슬은 길이가 50~60미터는 되어 보인다.
마나를 실어 고리를 던지니 목표한 곳에 걸리면서 감긴다.
‘괜찮네. 튼튼하고! 사용도 간편하고.’
은빛의 세사는 특수한 상급 몬스터나 마화된 식물에서 나온 재료로 만들어진 듯하다.
빛 반사가 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당겨보니 살을 파고들어 힘으로는 끊을 수가 없다.
단검에 마나를 씌우고 당겨도 버틸 정도로 질기다.
‘이것도 대단한 도구네. 대형 무기가 없어서 그렇지, 이정도면 무기고를 통째로 탈취한 거나 다름없군. 어, 책자도 있네!’
다양한 독과 침입용 도구, 특수 무기들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보인다.
‘재미있군. 나중에 천천히 한번 봐야겠다.’
물건들을 보니 금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열고 싶은 욕심이 든다.
‘언락 매직을 익힐 걸 그랬나?’
하지만 거기까지는 너무 과하다.
아예 어쌔신 길드와 원수지간이 되려는 게 아니면 이정도에서 그치는 게 좋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이 일으킨 일이 원인이니 말이다.
식당으로 내려와 따뜻한 수프에 호밀빵을 적셔 먹고 있자니 누가 앞에 털썩 앉는다.
하루 만에 10년은 폭삭 늙은 얼굴이다.
“뭘 원하시오? 떠나지 않고 있는 걸 보니 협상하자는 것 같은데?”
“먼저, 한 가지 묻지. 책상 위에 있던 명령, 누가 의뢰한 거지?”
“알고 있을 텐데. 날 죽여도 그건 말 못하오. 그리고 사실 알고 있지도 않고.”
레이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당신이 알고 있는 추측만 얘기해 봐.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냥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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