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든의 결단
마차는 곧장 나하드 상단으로 달렸다.
“단주님, 죄송하지만 부탁을 하나 드려야겠습니다.”
나하드는 여느 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시게. 함께 온 사람들 때문에 그러는가?”
“네. 혹시 상단 내부에 내밀하게 머물 곳이 있을는지요?”
“손님용 숙소가 안쪽에 있으니 거기 머물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로 폐를 끼치는군요.”
나하드가 허허거리며 웃었다.
“자네에게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걸로 폐를 끼친다 하겠나. 허허허.”
네 사람은 숙소로 들어갔다.
로잔느를 방에 눕혔다.
“레이, 내가 쓰러진 다음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어. 고마워. 레이 아니었으면 곧장 루아스 여신께 갈 뻔했네. 하하하.”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방심했어요. 미안해요.”
“무슨 소리야. 네가 와줘서 얼마나 고마운데.”
“자, 이제 눈을 붙이고 쉬어요. 빨리 회복해야죠.”
로잔느는 손을 뻗어 레이의 손을 잡았다.
정신을 잃으면서 그대로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가장 간절한 소원은 레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제 돌아와 그가 옆에 섰다.
그의 따뜻한 음성이 가슴을 편안하게 한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레이는 손을 놓지 않으려는 그녀를 다독여서 눕혔다.
네 사람은 옆방으로 이동했다.
“당분간만 여기서 휴식을 취하면서 건강을 회복하세요. 제가 매일 들러 바깥 상황을 알려 드릴게요.”
알렉스의 눈이 번쩍 빛난다.
“레이, 이렇게 된 이상 루퍼슨 일당을 그냥 둘 수는 없어. 끝을 봐야지. 계획이 서면 반드시 상의해라.”
트레비와 티탄의 눈에서도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알렉스의 말이 맞아. 그놈들을 칠 때 반드시 같이 해야 해.”
트레비의 말에 티탄도 입을 열었다.
“레이, 나도 간다.”
티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알겠어요. 어쨌든 지금 모두들 몸이 정상이 아니에요. 회복될 때까지 당분간 쉬고 계세요.”
경매장은 엉망이었다.
로든은 이제 허탈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금을 이동시킨다는 정보를 퍼뜨렸는데도 놈은 빈 경매장을 쳤다.
‘정말 영악한 놈이다. 먹음직스러운 미끼였을 텐데도 물지 않는다.’
돈은 무사하지만, 경매에 관련된 모든 것이 불탔다.
투자금과 배당, 지급액, 거래 내역, 주요 고객 등이 담긴 자료들 모두가.
루퍼슨은 흙빛이 된 얼굴로 부서진 내부를 둘러보았다.
“로든, 경매장을 다시 운영할 수 있을까?”
껍데기만 남은 건물.
지금 형편으로는 건물 보수조차 엄두도 내지 못한다.
“형님, 금고와 내부 시설이 모두 터져나간 모습이에요. 그놈들과 싸울 때 이런 공격이 있었습니까?
“그래.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 했다. 리더인 듯 한 놈이 스크롤을 찢고 도망가더구나. 파이어 볼이었다. 폭발한 화염 덩어리에 당한 부하들만 예닐곱이 넘는다. 그뿐이 아니다. 나중에도 어디선가 또 같은 공격이 반복되었다. 그때는 피해가 더 컸다.”
로든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경매장을 습격한 놈과 같은 수법이다. 스크롤이 도대체 몇 개나 있다는 거지? 그 귀한 마도구가!’
현재 스크롤을 제작할 수 있는 마법사는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오직 마도 시대의 유물뿐인데 황실이나 왕실 정도만 소수가 남아있을 뿐.
마탑은 마도구 유출을 극비로 막고 있고.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수량이 있을 수는 없다.
한편 같은 일당이 맞기는 한 것인지도 모호하다.
‘한 놈이 경매장을 공격하는 동안 나머지 놈들은 검투 대회를 구경했다고?’
유인한 것도 아니었다.
상당한 부상을 입고 도망갔다고 하니.
그것으로 보아 놈들의 핵심은 단신으로 경매장을 습격한 녀석이다.
‘결국 가장 주의해야할 놈은 하나라는 얘기군.’
아마 그놈이 실력도 가장 뛰어날 것이다.
로든은 경매장을 나서면서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방법이 없다.
‘경매장은 폐쇄할 수밖에 없겠군.’
루퍼슨과 로든은 저택으로 돌아와 모든 인력을 불러들였다.
루퍼슨 상단이 마지막 사업인 경매장마저 접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베론 시 전체에 퍼졌다.
상단이 곧 와해될 것이라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탈하는 부하들이 늘어났다.
루퍼슨 상단은 이미 가라앉고 있는 배였다.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로든이 입을 열었다.
“형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여기를 벗어나죠.”
로든의 말에 루퍼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들은 어떡하고? 갈 때 가더라도 처리하고 가야지.”
“네. 조만간 놈들이 여기로 쳐들어올 겁니다. 모조리 없애고 홀가분하게 떠나죠.”
“그래, 그렇게 하지.”
루퍼슨은 벽장에서 술병과 잔 두 개를 들고 왔다.
“한잔해라.”
“술이요?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요. 최상의 컨디션으로 기다려야죠.”
“괜찮아. 어제 네 놈 다 상당한 부상을 입었어. 아마 한동안은 못 움직일 거야.”
씁쓸한 표정으로 루퍼슨을 보던 로든이 잔을 내밀었다.
“그러죠. 지금 기분에 잠도 오지 않을 것 같고.”
잔에 술이 부어지자 과일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로든은 눈 위로 잔을 들었다가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
입 안에 달콤한 향과 알싸한 알코올 기운이 어우러진다.
“맛이 괜찮네. 이런 술 나한테 안 어울릴 것 같아 그간 손도 안 대고 맥주만 마셨는데. 맛을 알게 되니 떠나야 하는군. 흐흐흐.”
“형님, 또 시작하면 됩니다. 그보다, 애들이 많이 빠져나갔어요. 우리가 검법을 전수해 준 호위들 말고는 믿을 놈이 없네요.”
“놔둬. 그깟 조무래기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야. 너하고 나만 있어도 충분해.”
“지난번처럼 라비슈른 백작에게 기사 몇 명 몰래 보내달라고 하면 어때요?”
루퍼슨이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필요 없어. 그 새끼들 거들먹거리기나 하지. 막상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도망갈 놈들!”
그새 루퍼슨은 잔을 비우고 새로 술을 채웠다.
“형님은 왜 그렇게 기사들을 싫어해요?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루퍼슨이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창피해서 그동안 말은 안했다만, 원래 여관 종업원으로 일했었다. 그때 1층 식당에 자주 오던 기사의 하인과 친하게 되었지. 나하고 나이가 비슷해서 말이 통했거든. 그놈에게서 검술과 기사에 대해서 들은 후 기사들의 세계를 동경하게 된 것 아니겠냐. 그간 모았던 돈을 다 털어 종자에게 사정했다. 하인으로 써달라고, 마침 그 하인이 말없이 사라지는 바람에 내가 그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지.”
로든은 그 하인이라는 자가 왜 말없이 사라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후 종자가 재미 삼아 던져주는 조언에 따라 밤을 새워 무술 수련을 했지. 그놈 비웃는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아. 마치 키우는 강아지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것 같은 표정이었거든.”
루퍼슨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검술에 재능이 있었는지 몇 년 되지 않아 종자하고 대련을 해서 그놈을 쓰러뜨렸어. 그러자 천한 출신 놈이 건방지다고 종자와 기사들이 온갖 핑계로 구박하기 시작하더구나. 그때부터 대련을 핑계로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기 일쑤였다. 내 마스터인 기사는 모른척하고 있었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루퍼슨은 얼굴을 찡그리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나는 이를 갈며 기사들이 연습하는 걸 훔쳐보고 더 노력했지. 어느 날 연무장에서 수련 기사 하나가 대련이라고 나를 부르더군.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지 온갖 조롱을 퍼부으며 나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야. 한참을 얻어맞고 있자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구나. 검을 땅에 꽂고 기대어 콜록거리는 찰나였다. 이놈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젖히고 껄껄대며 웃는 게 아니겠어.”
루퍼슨의 얼굴에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기회였다. 수천 번 연습한 대로 온 힘을 다해 그놈의 가슴에 검을 날렸지. 날이 없는 수련검이어서 베지는 못했지만, ‘뻐억’하는 묵직한 타격음이 들렸다. 틀림없이 갈비뼈 몇 개는 나갔을 거야. 마치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하더구나.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놈의 머리며, 허리며, 다리를 가리지 않고 전력을 다해 수십 번을 내리쳤다. 깨지고 부러져 피투성이가 되어 놈이 자빠졌다. 놀란 기사들이 마구 달려와 그를 돌보더구나. 얼마나 통쾌하던지.”
새 병을 또 하나 들고 와 잔에 부은 루퍼슨은 말을 맺었다.
“소동을 틈타 몰래 빠져나와 그길로 다른 영지로 도망쳤다.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내 검술이 꽤 뛰어나다는 걸 알았지. 그래서 아예 용병으로 등록하고 떠돌다가 너를 만나게 된 거야.”
잔을 부딪치며 로든도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다.
루퍼슨은 벌컥거리며 단숨에 또 한 잔을 입에 들이부었다.
“너랑 함께 다닌 지도 벌써 7~8년이 된 것 같구나. 한동안은 떠돌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뭐든 다 하지 않았냐. 특히 기사 놈들 엿 먹일 때가 제일 통쾌했지. 흐흐흐. 덕분에 용병 길드에서 징계도 많이 받았지만.”
“조시가 그날 밤 그란델 자작의 차남 해리스의 이야기를 엿듣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러고 다녔겠죠.”
“아, 그 해리스라는 멍청한 귀족 놈. 품에 무언가를 끌어안고 술에 취한 채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지. 크크크. 눈치 빠른 조시한테 들킨 게 잘못이지. 조시가 그런 얘기는 귀신같이 알아채지 않냐.”
잠시 말을 멈추었던 루퍼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 먼 길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구나. 데본 시까지 도망치고. 아칼루시아 후작령 블랙 마켓에서 철함이 페르세이언 제국의 세공 장인이 만든 작품인 걸 알아내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 수많은 영지를 지나 황도 슈토르히에서 고젤 영감을 만나 함을 개봉하고. 적당히 정착할 곳을 찾다가, 여기로 와서 라비슈른 백작의 메르뷰스 상단에 뇌물을 바치며 암흑가를 장악했는데.”
애써 쌓았던 것을 모두 잃고 떠난다는 생각에, 그의 음성에 아쉬움과 허탈함이 묻어났다.
“경매장도 매각할게요. 남은 자금을 모두 챙겨 다시 시작하면 이 정도는 또 이룰 수 있어요.”
“그래, 어디로 가는 게 좋겠냐?”
“이번에는 큰 영지의 성도로 가죠. 수도는 귀족 놈들 사이에 정치적 싸움이 치열해서 휘말리기 십상이네요. 어디 부유한 백작령을 찾아볼게요.”
취해서 방으로 들어가는 루퍼슨의 뒷모습을 보다가 로든도 돌아섰다.
아직은 쓸만한 자이다.
앞에 내세워 귀찮은 일을 맡기기도 좋고.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른다.
검술 실력도 뛰어난 데다 부하들의 눈에는 적당히 위엄도 풍긴다.
그래도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화가 치솟는다.
화근을 뿌리째 뽑아버려야만 후련할 것 같다.
허스틴은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검투장 습격 이후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났다.
루퍼슨 일당을 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레이의 연락이 한동안 뜸했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 경매장이 파괴되고 사업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때가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레이가 찾아왔다.
허스틴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를 맞았다.
“소식은 들었다. 경매장도 무너뜨렸더구나.”
“들으셨군요. 이제 당사자들을 치는 일만 남았습니다.”
루번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루퍼슨의 저택에는 몇 명이나 남아있다던가?”
“루퍼슨과 로든 외에 호위 6~7명이 핵심 전력입니다. 나머지 20명 정도의 경비 조직이 있는데 마음이 떠나 있어서 목숨을 걸고 덤비지는 않을 겁니다.”
허스틴 일행이 생각에 잠겼다.
레이의 말대로라면 이제는 정말 핵심 검사 간의 대결이었다.
자신들과 레이 주변의 검사들을 합치면 대략 10명.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이다.
“그래, 언제쯤 결행할 생각인가?”
“저희 쪽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어 좀 회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시 시간을 주시죠.”
“너무 시간을 끌지 말게. 놈들도 힘이 빠져있을 터. 이럴 때 몰아붙여 끝장을 내야지.”
“알겠습니다. 곧 다시 연락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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