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조선국왕의 굴욕적인 처신
겨울의 초입이었다.
타타르 잉굴다이가 마푸타와 재운을 거느리고 조선에 칙사로 방문한다는 첩보였다.
김채언은 이 절호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청국 황제에겐 충신일지 모르나 자신의 주군인 이한과 솔호 사람들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잉굴다이와 마푸타가 조선을 찾은 목적은 명나라 침공에 앞서 군량과 생필품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황제의 칙사 행렬이라 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 그렇지만 명국 사신 행렬과는 차원이 달랐다. 칙사 행렬 거의 전부가 말을 타고 있었고 짐을 실을 마차와 수레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당도한 칙사 일행은 평양과 개성을 거쳐 한양 도성에 도착했다.
잉굴다이와 마푸타는 조선과 인연이 많다. 때론 좋은 일로 때론 좋지 않은 일로 조선 사신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제 조선은 완전히 청나라에 굴복했다. 정묘년 이후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왕세자와 둘째 왕자는 물론이고 친명을 부르짖던 조선왕의 충신들이 성경에 볼모로 잡혀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수십 만의 죄 없는 백성들이 전쟁포로로 끌려가 환향할 날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임금으로서 이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였을까. 임금 이종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성심을 다해 칙사 일행을 맞이했다.
임금께서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를 맞이하는데 그 정성이 놀라울 정도였다. 정사인 잉굴다이조차 감복할 정도로 성의를 다하는 임금이다.
모화관 접견을 마친 임금은 인정전에서 다시 칙사를 맞았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전상(殿上)에서 일어난 임금이 상견례를 하겠다고 세 명의 칙사와 마주 선 것이 아닌가.
잉굴다이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조선을 존중했다. 비록 두 차례 전쟁에서 앞잡이 노릇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모시는 주군 청 황제 홍타이지와 청국을 위한 일이었을 뿐.
조선에 대한 그의 감정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토록 존중했던 조선은 없었다. 회유와 협박 그리고 엄청난 무력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던 조선 왕실과 조정이 너무도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전하! 외신은 감히 전하의 절을 받잡기 민망하옵니다. 그만 물려주시지요.”
임금 이종이 전상(殿上)의 동쪽에 서서 서쪽에 칙사 세 사람을 모시고 서로 맞절을 올리는 대례를 하자는 제의에 잉굴다이는 점잖게 이를 거절했던 것이다.
“과인이 배례(拜禮)하려고 함은 칙사께서 황제의 황명을 받으신 따름입니다. 군신 간의 예의를 따르고자 함이니 대인께선 주저하지 마시오.”
잉굴다이는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끝내 임금은 배례를 올렸다. 단하에서 이를 지켜보는 노신들 몇은 착잡한 마음에 눈시울을 붉히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조선 임금으로부터 제대로 칙사대접을 받은 잉굴다이지만 마음이 참으로 불편했다.
그는 조선의 사대부들이 내세우는 선비 정신에 감복했던 터라 이처럼 비굴하게 구는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게 크게 실망을 금치 못한 것이다.
조선과의 협상 또한 이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조선의 형편이 어려움을 알고 있음에도 조금 무리한 요청을 했다.
예전 같으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원의 규모를 깎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을 조정 대신들이 순순히 응했다.
조선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삼전도에서 행한 삼배구고두례는 다시는 되풀이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제 명국이 청을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데 어떻게 청국에 저항을 할 수 있겠는가.
행여 칙사의 눈에 거슬리기라도 할라치면 임금의 입조(入朝)를 명할 수도 있었다.
일국의 왕세자와 세자빈은 물론이요. 그 피붙이까지 모조리 볼모로 끌고 간 오랑캐가 아닌가.
그런 저들이 수틀리면 임금이라고 그냥 넘어갈까. 군사력을 키워 다시 맞설 수 있을 때까지는 와신상담하며 청국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잉굴다이는 그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입맛이 썼다. 이는 함께 조선을 넘나들었던 마푸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칙사 일행이 조선에서의 일정을 어느 정도 마치고 귀국할 때가 다가왔다.
모화관 마푸타의 숙소에 좌의정 최명길이 비밀리에 내방했다. 이는 마푸타의 청에 의한 것이다.
“좌상 대감! 그간 참으로 격조하였소이다.”
마푸타는 잉굴다이 못지않게 조선과 많은 교류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가까이했던 인물이 바로 최명길이었다.
최명길은 마푸타의 말이 지나가는 인사치레가 아님을 간파했다. 주화론자로 알려진 최명길이지만 실상 그는 ‘선화후주전론자(先和後主戰論者)’였다.
조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되 국력을 키워 반드시 복수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게 실행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지만. 최명길은 진심이었다.
그런 최명길이 잉굴다이와 마푸타의 존경을 받는다고 해서 최명길도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나라의 일을 위해 나선 몸입니다. 사사로이 칙사 대신을 뵙는 것 또한 불충이지요.”
깐깐했다. 청 황제 앞에서도 목을 꼿꼿이 세우고 대든 인물이니 오죽하랴.
“지난 황도에서의 일은 제가 사과드리리다.”
최명길은 명을 치기 위해 군사와 물자를 요구하는 청 황제의 면전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파병 불가를 부르짖었다.
그는 심양으로 떠나기 전에 이번 사신행에서 살아돌아오기 힘들 것임을 직감하고 가족들에게 “이번에는 내가 살아오기 어려울 것 같다. 장례 물품과 염할 때 쓸 물건을 갖고 가야겠다”고 말하며 유언 같은 작별 인사를 남겼을 정도다.
심양에 도착해 황궁의 대전에 불려간 최명길은 거듭되는 청 황제의 파병 명령에
“황상 폐하! 조선은 파병할 수 없나이다.”
“무어라. 너희들은 짐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 헌데 어찌 상국의 천자가 명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단 말이냐?”
홍타이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용상에서 일어나 최명길의 목을 칠 기세였다.
최명길은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미 목숨을 걸고 온 길이 아닌가. 자신의 목숨 하나와 조선의 안전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리할 것이라 스스로 다짐했다.
“아국의 임금께서 산성에서 내려가 항복을 한 것과 명을 치기 위한 파병은 다릅니다. 신의 일로 인해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명과의 최소한의 의리는 지킬 것입니다. 황상 폐하의 지엄하신 황명을 거부한 신을 죽이소서. 이 자리에서 죽어도 후대에 면목이 설 것입니다.”
대전에 모여 있던 청국의 신료들은 대쪽 같은 최명길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했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마푸타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청 태종은 분노했다. 그리고 죽이지는 못하고 최명길을 옥에 가두라 명했으나 결국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황명을 거역했으나 조선왕의 신하로서는 충신이었다. 홍타이지는 이런 면에서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담소를 나누던 중에 마푸타가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좌상 대감! 혹여 반정 이후에 벌어진 서북 반란 말인데..., 당시 반란수괴였던 이괄이란 자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뜬금없다. 왜 이 자리에서 이괄의 이름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최명길은 바짝 긴장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인물이지만 마푸타의 저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국의 치부거늘...어찌 묻는 것이오?”
실상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정묘년 호란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최명길은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도 반정 공신이다. 그 덕으로 조정의 노른자위 벼슬인 이조 정랑을 꿰찼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런 최명길이 보기에도 반정의 핵심 역할을 했던 이괄의 2등 공신 책봉은 문제가 많았다.
결국 그 불만이 조선을 불행으로 이끌었고 두 차례의 호란을 겪고 오랑캐의 신하국이 되도록 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런데 왜 그 아픈 역사를 꺼내 든단 말인가.
“아! 죄송하오. 이괄의 피붙이 중에 살아난 자가 있는가 해서 여쭙는 것이오?”
최명길은 마푸타가 묻는 의도를 알 수 없었으나 그 질문에 확실한 어조로 답했다.
“없소. 직계를 모조리 멸했소. 갓난아기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소. 이건 내가 보장하리다.”
최명길이 단호하게 답하자 마푸타는 이마를 찌푸리며 반론을 제기했다.
최명길의 표정으로 보아 결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괄 못지않은 대역죄인의 아들인 한윤과 그 족질(族姪) 한택은 우리 청국의 고관이 되어 있질 않소.”
“다르오. 놈들은 반란에 직접 가담했다가 강을 건너 후금에 귀부한 자들이오. 이괄의 자식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소. 이는 확인해 보면 알 것이오.”
최명길은 다소 짜증이 섞인 말투로 답했다. 계속된 질문은 조선으로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들추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더해 한윤과 한택은 매국노가 아닌가. 청국에서는 충신일지 모르나 조선으로서는 망나니 중 상망나니다.
최명길의 확고한 대답에 마푸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미심쩍은 부분이 있음을 은연중에 내색했다.
“이는 확실하지 않은 정보입니다만..., 이괄의 피붙이가 월경(越境)해서 투먼에 살고 있다는 풍문이 있어 물어본 것이니 개의치 마시오.”
최명길은 마푸타의 말이 가당치도 않다고 여겼다. 설령 그런 일이 있더라도 한윤처럼 조선에 해를 입히지도 않았지 않은가.
얘기가 좀 더 길어졌다면 이번 전쟁에서 조선 백성을 도운 조선 출신 청국 장수에 대한 소문까지 상기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스럽게도 더 이상의 질문을 삼가고 최명길에게 술잔을 권했다.
이날 이한의 존재가 조선 조정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천우신조였다.
불편한 대화가 오고 가기는 했으나 마푸타는 여전히 최명길을 존경했다. 그가 청나라 신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그런 마음의 짐 때문이었을까. 마푸타는 최명길에게 적지 않은 선물을 안겨주었다. 그건 포로 송환에 관한 것이었다.
최명길은 일전에 청국 사신행에서 8백의 조선인 포로를 되돌려 받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리고도 기회만 생기면 세자를 비롯한 포로의 송환을 간청했다.
마푸타는 조선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최명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잉굴다이와 협의해 조선인 포로 중 여인 5백을 되돌려줄 것을 확약하고 한양을 떠났다.
마푸타와 잉굴다이의 방문으로 인해 잃은 것도 있었지만 얻는 것 또한 있었던 것이다.
칙사 일행은 조선을 방문할 때와는 달리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황제의 명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여긴 까닭이다.
생각지도 않게 조선 국왕이 알아서 설설 기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 공은 칙사로 방문한 정사 잉굴다이와 부사 마푸타의 몫이다.
어찌 기분이 흡족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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