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위기에 처한 백마산성을 구원하라!
“너흰 지금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거기 너!”
“예. 쇤네는 돌삼입니다요..., 예...예.”
“대답은 짧게 네. 알았나?”
“네...네.”
“이놈. 대답은 짧게 네. 알았느냐?”
“네.”
평소 사람 좋기로 소문난 신돌삼이지만 큰 체구에 당당한 젊은 사내의 기세에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는지조차 모르는 돌삼의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다.
“앞으로 너 신돌삼은 훈병 1이다. 네가 누구라고...?”
“후...훈병 1...입니다.”
“그래. 그리고 너...너는 훈병 2다. 너는 훈병 3...,”
이한의 지목을 받은 사내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나와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투먼 전사 중 교관 자질을 갖춘 자들이 훈련을 맡았다.
그날부터 훈련병들의 지옥이 펼쳐졌다. 이한이 원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부대다. 자신이 이진한 시절에 경험했던 미 해병대 시절의 각종 교육을 바탕으로 제작한 교본으로 맹훈련에 돌입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4백 년 후에나 나올 전투 교본인데 어찌 중세의 인간들이 이를 소화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한은 그런 자신의 판단이 착각에 불과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보름이 지나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투먼 사람 중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제공했다. 밤에는 정음으로 만든 교재로 필요한 것을 교육시켰다. 이는 휘경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진행했다.
그렇게 투먼에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몰아칠 때 용골산성의 이대남 역시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대남은 별무대 하나와 예비대 하나를 합쳐 천여 명의 병력으로 용골산성에 입성하여 수성전에 돌입했다.
음력 2월 15일
백마산성에 주둔 중인 조선군 3백을 치기 위해 청군 유격장수 요호가 이끄는 최정예 팔기군 병사 3백이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초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이 조정의 명으로 청군을 도와 명군이 차지하고 있던 가도 정벌에 참전하느라 백마산성은 무주공산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주력군은 모두 임경업이 차출하여 데리고 간 바람에 산성을 방어할 여력이 없었다. 팔기군이 굳이 백마산성을 노린 이유는 괘씸죄였다.
처음 압록강을 넘어 창성진을 공략하고 백마산성을 치려고 했으나 임경업이라는 장수의 위명이 자못 대단해 우회해 버렸던 것이다.
이제 항복을 받고 퇴각하는 마당에 투항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백마산성이 곱게 보일 리 없는 청군이다.
가도 전투를 마치고 임지로 복귀 중이던 임경업에게 급보가 당도했다.
임경업은 그 누구보다 친명사대주의자였다.
그는 세가 불리해 청군에 부역하고 있으나 틈만 생기면 복수를 다짐하고 있던 인물답게 부장 최효일과 함께 2백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급히 백마산성으로 내달렸다.
이런 첩보가 용골산성에 당도했다. 이대남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지금 용골산성에는 소문을 듣고 찾아든 피난민이 무려 만여 명을 웃돌았다.
이는 별무대가 백성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인근 고을 백성들을 선무(宣撫)해서 산성으로 청야입보(淸野入保)를 시킨 덕분이다.
이는 옛날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군 30만을 요동에서 평양까지 유인하기 위해 펼쳤던 바로 그 전술이다.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지만 청야입보 작전은 피해가 만만치 않은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곡식 한 톨, 가축 한 마리, 바람과 추위를 견디고 버틸 움막 하나조차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산성으로 대피하는 무자비하고 잔혹한 작전이다.
이는 전쟁에 지면 군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적군에게 도륙을 당할 위기시에만 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렇다고 쉬운 작전도 아니다.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작전에 동조해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이대남은 눈물을 머금고 청야를 실시했고 청군의 약탈과 살육, 포로 사냥에 두려움을 느낀 인근 백성들이 이에 응했다.
당장의 위기는 넘겼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았다. 위급한 백마산성을 방치할 경우 그곳을 점령한 적군이 여세를 몰아 용골산성까지 넘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대남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1중대장 장대길을 불러 백마산성 지원을 명했다.
“세 불리하면 무조건 퇴각하라. 알았느냐?”
“예. 장군.”
이대남은 대장이라는 호칭보다 장군으로 불렸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비록 정규 별무대 하나뿐이지만 실제 완편 별무반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혈통 좋은 준마로 훈련시킨 군마를 탄 120명의 별무대 병사들이 조용히 용골산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3일 치의 건량과 투먼소총, 동개활, 그리고 마석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각종 냉병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마산성 정문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도착해 은신하고 있던 장대길의 눈에 첩보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당초 알려지기로는 겨우 3백의 팔기군이라고 했으나 그 수가 무려 천여 기에 달했다. 현저히 열세인 전력으로 전투를 벌여야 하는 장대길은 고심했다. 그때였다.
“중대장 나리! 성 왼편 능선에 조선군이 매복해 있습니다.”
척후의 보고를 받은 장대길은 그들이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이 이끄는 군대라는 걸 알아챘다.
“으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꼼짝도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나리.”
대길이 이대남에게 받은 명령은 무엇보다 수하들의 생존이었다. 별무대는 일당백의 전사들. 함부로 전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소수가 지키는 백마산성이지만 내부에는 피난민들로 가득했다. 만일 산성이 무너지면 백성들은 개나 소처럼 줄에 묶여 끌려갈 것이다.
공성전을 펼칠 채비를 마친 청군 장수 요호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충차와 사다리를 밀고 들고 달리는 청군의 기세는 사납기 그지없다. 어쩌면 단 한 차례 돌격에 성벽이 점령당할 것만 같았다.
성을 넘으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자 사이에 피 튀기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숨죽여 지켜보는 별무대 병사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는 좌측 능선에 매복해 있던 임경업의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성벽 한 곳이 뚫렸다. 팔기군 십인장 하나가 사다리를 걸고 성벽을 타고 넘은 것이다. 그 뒤를 따라 사다리를 타 넘는 청군이 꼬리를 이었다.
만일 놈들이 성벽을 점하고 수비군을 주살한 뒤에 성문을 개방하면 산성은 그걸로 끝장이 난다.
좀이 쑤셔 엉덩이를 땅바닥에 두지 못하는 부하들을 보는 장대길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임경업이 참지 못하고 먼저 뛰쳐나갔다. 그 뒤를 따라 그의 부하들이 달음박질을 쳤다. 매복지와 성문 사이는 그리 멀지 않았다.
갑자기 등 뒤에서 조선군이 튀어나오자 요호와 부장들이 기겁했다. 하지만 그 규모가 겨우 2백여 명에 불과한 것을 보고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기병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것은 청군의 기본 전술이다. 그러나 협소한 산성 앞이었고 공성전에 한눈을 팔고 있어 아직 제대로 말에 탄 병사가 거의 없었다.
“어서 말에 타라.”
지휘관들이 소리쳐 외쳤지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임경업의 기병대는 청군이 말에 올라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차라리 말을 타기 위해 움직일 시간에 화살로 공격을 퍼부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다.
요호는 당황했다. 조선군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백마산성 안에 흘러들어온 피난민이었다.
그런데 달려드는 적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잘못하면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아 급히 공성을 멈추고 적을 막으라 명했다.
그는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렸지만 변경 산성에서 벌어진 일쯤을 가지고 문책을 당할 것 같지 않았고 설령 나중에 발각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천둥벌거숭이처럼 갑자기 툭 튀어나와 자신의 군대를 공격하는 조선 기병을 맞서 싸우는 병사들이 평소와는 달리 제대로 대응조차 못했다.
오랑캐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임경업과 그의 수하들은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2백이 넘는 요호의 병사들이 임경업의 기마 돌격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성을 타 넘던 청군이 급히 퇴각하며 전투에 돌입했다. 넓은 들판이 아닌 산성 앞 좁은 땅 안에서 벌어진 기마돌격은 단 한 차례 격돌로 더 이상 돌격을 감행할 동력을 상실했다.
이제 서로 엉겨 붙어 개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임경업이 청군 유격장수 요호를 보았다.
“이놈 요호. 목을 내놓거라.”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언월도를 휘두르는 임경업의 무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를 막아서는 청군의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버렸다.
평소 조선 장수들을 발아래로 내려보던 요호였다. 청군 내에서도 꽤 뛰어난 장수로 인정받던 요호였지만 임경업의 칼솜씨와 용력을 보고는 기가 질려버렸다.
“마...막아라!”
부장들이 요호의 앞으로 몸을 날려 보호하려고 했지만 임경업의 쇄도가 더 빨랐다.
스걱.
칼을 들어 막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병기를 마치 검처럼 다루는 임경업의 언월도에 요호가 목을 잃었다.
지휘관인 요호가 쓰러지자 청군이 당황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임경업의 기병 역시 지칠 대로 지쳤다. 잘못하면 양패구상을 할 상황이다.
산성군이 성문을 열고 나서기에는 위험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이미 적지 않은 병력이 성안으로 침투한 청군을 막기 위해 희생을 한 상태였다.
“장군! 저러다 임경업과 수하들이 모조리 당하겠소이다.”
“기다려라!”
애가 탄 부장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굴었다. 장대길은 개입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임경업과 조선 기병의 생사도 중요했지만 백마산성을 위협하는 청군의 몰살이 더 중요했다.
이제 산성 앞에서는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기세에서 밀리기는 했으나 청군은 아직 5백에 가까운 병력이었다.
반면에 임경업의 부대는 절반으로 줄어든 백여 명에 불과했다. 그조차도 격전을 치른 상태라 도저히 적군을 당해낼 것 같지 않았다.
“준비하라!”
이제나저제나 공격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고 있던 별무대 전사들이 저마다 힘주어 무기를 잡았다.
“먼저 성문 쪽의 적군에게 화살비를 쏘아라. 발사!”
백여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명중률을 보였다. 청군은 갑자기 허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에 손도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우두머리가 사라진 부대여서인지 눈앞의 적군만 상대할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드는 화살까지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청군을 보고 정대춘은 다시 투먼소총 발포를 명했다.
“발포!”
산성 앞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청군과 느닷없이 들려오는 총소리에 접전을 벌이던 양측이 모두 얼어붙었다.
“재장전! 발포!”
연이어 사격이 펼쳐졌고 청군은 그제서야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을 읽고 허둥거렸다.
겨우 백여 보 거리에 불과했다. 어떻게 자신들의 눈을 벗어나 숨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백여 명이 넘는 사수와 포수가 매복해 있었다.
“마..막아라. 놈들을 막으란 말이다.”
요호 대신 군대를 지휘하던 장수가 발악하듯 명을 내렸지만 장대길의 별무대를 향해 달려드는 청군은 없었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는 청군을 본 장대길이 대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전원 기마(騎馬)!”
명을 내리기 전에 이미 승마를 하는 전사들이 보였다.
“돌격하라!”
임경업의 부하들이 청군과 교전 중에 피를 뿜고 쓰러지는 장면에 감정이입이 된 별무대 전사들은 무서운 속도로 말을 몰았다.
기마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청군 팔기군은 눈 앞에 펼쳐진 장면에 겁을 집어먹었다. 기마 돌격은 자신들의 전유물로 여겼다.
그런데 제대로 된 갑주를 차려입은 조선군 기마 돌격을 감행할 줄이야.
전투는 기세 싸움이다. 아무리 강한 병사라도 공포는 전염성이 강했다. 게다가 요호가 이끌고 있는 천여 명의 병력은 정통 팔기가 아니었다.
노예병이 절반이 넘었고 정식 팔기에 속하지 않은 잡병 또한 상당수였다. 임경업의 돌격에 이미 많은 수의 정예 팔기군이 쓰러진 마당이다.
선두로 치고 나간 장대길이 무풍지대를 달리듯이 적진을 휩쓸기 시작했다. 별무대의 십인장 이상 장교급은 그 실력이 어지간한 조선군 초관(哨官)을 능가했다.
근 1년 반 동안 오로지 전투 훈련에 매진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험한 훈련으로 다져진 별무대 정예 장교들이 앞장서서 적군을 쓸어버리자 전사들도 힘을 냈다.
장대길의 기마대가 펼치는 엄청난 공세를 본 임경업도 힘을 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조선군이 협공하자 전투는 생각보다 쉽게 끝나버렸다.
노예병들이 먼저 무기를 버리고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자 나머지 살아남은 놈들도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투항한 적군은 몇 되지 않았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겨우 백여 명만이 항복했고 나머지는 죽거나 부상입은 놈들이었다.
“경상자를 제외하곤 모조리 죽여라!”
장대길의 입에서 명이 떨어지자 별무대 전사들은 주저없이 청군 중상자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여기저기서 단말마의 비명이 이어졌다. 그 모습에 임경업과 부하들은 기가 질려버렸다.
“누...누구요?”
“의병입니다.”
임경업에 질문에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튀어나오는 답변은 의병이다. 장대길은 이미 부하들에게 이를 숙지시켜 놓았다.
자신들의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떻게 이처럼 강한 의병군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묻거나 답할 상황은 아니었다.
임경업은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질문을 내뱉을 수 없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처지가 아닌가.
“영감께선 산성 안의 병력과 백성을 위무하셔야 하지 않소이까?”
“그게 걱정이오. 군량도 없는데 너무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소.”
“으음. 좋습니다. 저희가 피난민들을 데리고 가지요.”
“어디로 간단 말이오?”
임경업은 의아했다. 지금 상황에서 조선 북쪽 끝에 위치한 백마산성의 백성을 이끌고 피할 곳이 있단 말인가.
“어차피 이곳에 있다간 영감의 병사들까지 아사를 면치 못할 것이 아니오. 저희가 숨어 있는 곳에는 당분간 굶주림을 피할 양식이 있소. 백성들을 데리고 가겠소.”
임경업으로서는 차마 반대할 수 없었다. 책임지지 못할 피난민이다. 궁금했다.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이 어딘지.
그러나 그걸 물어볼 염치가 없었다. 장대길은 서둘러 산성 안의 백성들을 수습하여 성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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