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제 발로 걸어 들어간 호랑이 굴
빅토르와 동료에 대한 처우가 달라졌다. 포승이 풀리고 음식이 주어졌다. 서로를 죽이고 죽인 원한이야 쉽게 풀기 힘든 일이지만 불가항력이라 여겼다.
그 원한의 찌꺼기를 껴안고 있다간 서로 공멸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아는 것이다.
이한은 빅토르와 다른 한 명의 동료를 요새로 돌려보냈다. 둘은 이한 일행과 함께했지만 특별한 괴롭힘이나 감시는 없었다.
늦은 오후에 요새 안으로 들어간 빅토르가 다음 날 아침 일찍 연락을 취해 왔다.
“나리! 빅토르의 초대를 받아들이실 겁니까?”
생각보다 견고해 보이는 목책의 높이에 조금은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치 거대한 감옥을 보는 기분이다.
마치 죽음의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랄까. 꺼림칙했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사안이다.
이한 역시 빅토르를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다. 직관적으로 그가 믿을만한 사내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요새 주민의 생존이 달린 문제다.
빅토르가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다면 요새로 들어간 순간 살아서 걸어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열 명은 밖에 남는다. 시란 네가 맡아라. 그리고 후발대가 도착하면 요새 내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즉각 움직여라. 알았느냐?”
이한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위험이었기 때문에 긴장을 풀지 않고 철저하게 대비를 했다.
“예. 주군!”
득보와 바얀은 자신의 곁을 떠날 수 없다. 득보는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설령 자신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이한만은 지켜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흑조.”
“예. 나리.”
“요새에 들어간 순간부터 우린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간 꼴이 된다. 하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했다. 난 흑조를 믿는다.”
“나...나리!”
김채언은 감격했다. 시간이 꽤 흘러 어느 정도 서로를 알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겨누었던 자에게 보내는 절대적인 신뢰라니.
이런저런 조치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에야 요새로 향했다. 모두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스무 명 규모에 비해 좀 더 강력한 느낌을 주는 기마대였다.
“리칸! 어서 오십시오.”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한과 빅토르는 헤어지기 전에 자신의 신분에 대해 정리를 마쳤다.
인구 20만을 다스리는 동쪽 끝에 위치한 나라의 칸.
성씨 리와 왕이라는 기마 유목민족의 용어 칸을 결합한 이한이 신분을 나타내기에 적합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고 그렇게 소개한 것이다.
빅토르가 이한의 고삐를 넘겨받았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한이 자신의 뒤에 도열한 기마대를 가리키며 간단히 소개했다.
“반갑소. 내 친위대요.”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닌 스무 명의 기마 전사들. 그들의 무장은 독특했다.
동쪽 기마족이 마상 궁술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하나같이 각궁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비록 생긴 모습은 달랐지만 전부가 아르케부스를 한 정씩 지녔다는 점이다.
“처음 뵙겠소. 난 이반 표도르비치라고 하오.”
두터운 털모자를 쓴 이방인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이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목례를 하지도 않았고 저자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흐음. 스트로가노프의 감독관 놈이군. 놈을 따르는 자들이 생각보다 여럿이군.’
카자크인이나 몽골인처럼 보이는 자들은 약간의 경계심과 함께 짙은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반면에 이반을 비롯한 서쪽 이방인들은 다소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빅토르와 이반 사이의 힘의 우열이 그렇게 크지 않은 모양이다.
수적으로야 빅토르의 세력이 훨씬 컸지만 교역권을 쥔 이반의 입김이 무시 못 할 정도라고 느껴질 정도다.
“오! 이반. 당신은 차르께서 파견하신 관리요?”
이반은 다소 놀랍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수만 리 떨어진 동토의 끝자락에서 만난 젊은 이방인의 입에서 차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거기에 더해 자신을 차르의 신하가 아니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하하하. 맞소. 난 차르의 신하요. 아!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속해 있지만 엄연히 차르님의 신하가 맞지요.”
묻지도 않은 말에 장황하게 답하는 이반의 심리를 간파한 이한이 그의 콧대를 더 세워준다.
“루스국 차르께서 시비르를 점령하고 초원까지 노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이반 그대는 차르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맞는 것 같군.”
이한의 말에 이반의 입이 귀에 걸린다. 이 모습을 본 빅토르가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다.
이한이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이반을 농락하는 것을 아는 자는 어쩌면 자신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질적인 지도자인 빅토르와 숨어 있는 실력자인 이반이 나서 일행들을 대접하자 분위기는 자못 화기애애했다.
탁배기나 마유주와는 다른 독한 술이 나왔다.
보드카(водка).
밀, 호밀이나 수수, 옥수수와 같은 곡물을 원료로 사용하지만 포도와 같이 당분이 높은 과일도 보드카의 원료로 사용한다.
증류한 고순도의 술을 희석시켜 마시는데 그조차도 독한 술기운을 갖고 있을 정도로 독주(毒酒)다.
이한이 챙기기 전에 채언이 이미 일행들에게 보드카를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 둔 상태였다. 이한도 사냥으로 잡은 짐승의 해체한 고기를 내놓았다.
모피를 얻기 위해 짐승을 잡지만 식용으로 사용할 신선한 짐승을 얻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양 측은 술과 고기를 나누며 상당히 가까워졌다. 물론 서로 경계하는 모습을 완전히 거둘 수는 없었지만.
이한과 빅토르가 의기투합하는 모습에 빅토르의 수하들도 경계심이 낮추었다.
“리칸! 술과 음식은 넉넉하니 마음껏 즐기도록 하십시오.”
이한의 곁에 붙어 유난히 친근하게 구는 이반을 바라보는 빅토르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가 이반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눈짓으로 경고를 보냈다.
‘빅토르가 놈을 경계하는군. 역시 믿을만한 사람이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빅토르에게 답을 한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는 술을 받아마셨다.
빅토르는 이한이 자신의 경고를 눈치챈 걸 알았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가 소변을 보는 척하며 밖으로 나섰다. 채언이 빅토르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선 빅토르가 김채언에게 낮은 목소리로 따졌다.
“칸께선 너무 겁이 없는 것 같소.”
빅토르의 목소리는 약간의 불만과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경고를 이한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불만처럼 보였다.
“빅토르님의 걱정이 뭔지 잘 압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나리께선 매우 똑똑한 분이오.”
“아...알았소. 먼저 들어가시오.”
김채언은 빅토르가 뭔가 할 일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게 무얼까 의심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번 믿기로 한 이상 지나친 경계는 오히려 불화를 낳을 수도 있기에 다시 잔치가 벌어지는 곳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술을 좋아하는 득보지만 술을 단 한 모금도 입에도 대지 않고 이한 주변에서 잔치를 즐겼다.
처음부터 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득보에게 어떻게든 술을 권하려는 이반의 부하들의 노고도 헛수고로 끝났다.
이윽고 밤이 다가왔다. 오후 내내 술잔치를 벌였으니 천하의 술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이한과 수하들은 이반이 안내한 숙소에서 일찍 잠에 빠져들었다. 그곳은 요새 안의 기도소에 딸린 건물이었다.
으슥한 밤.
동토의 밤은 늦여름임에도 아주 쌀쌀했다.
요새의 목책을 지키는 수비병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잠에 빠져 있는 시각. 기도소 주변으로 몰려든 열명 가량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어 생김새를 구분할 수 없었지만 유독 한 사람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이반 표도로비치. 그가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기름을 먹인 횃불이 들려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횃불을 던질 것이다. 뛰쳐나오는 놈들은 모조리 척살하라.”
“예.”
다시 한번 작전을 전달한 이반이 긴장한 얼굴로 살며시 문고리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이밀고 건물 안을 살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코를 골며 단잠에 빠져 있는 이방인 무리를 본 이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빅토르 이놈. 네놈이 이방인을 끌어들여 우리 스트로가노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을 내 모를 줄 알았지. 내일 아침 네놈이 어찌 나올지 기대가 되는군. 후후.’
이미 빅토르의 계략을 눈치챈 이반이 선수를 친 것이다. 당장 빅토르와 그의 수하들을 칠 수는 없다. 그들이 없으면 요새는 유명무실해진다.
다만 빅토르가 기대를 걸고 있는 이방인의 우두머리와 그 친위대를 제거해버리면 카자크 전사들이 딴마음을 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이런 내막을 가문에 알리고 공을 인정받으면 된다. 언제까지 이 동토의 땅에서 빌빌거릴 생각은 없다.
휘리릭.
기름을 잔뜩 먹인 횃불이 건물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것도 세 개씩이나 되었다.
콰아앙.
횃불을 던져넣은 이반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목조건물에 갇힌 이방인 무리는 이제 불에 타죽거나 목숨을 걸고 문을 열고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놈들은 가볍게 목을 쳐 버릴 심산으로 기다리고 있던 이반은 의아했다.
이미 건물 안은 연기로 가득해서 건물 벽면에 난 조그만 창문으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에서는 밖으로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감관 나리. 놈들이 모두 질식해버린 거 아닐까요?”
부하 하나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채 묻는다. 이반 역시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놈들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 않는 한..., 모두 죽었겠지. 흐음...문을 열어라.”
질식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이제 시체만 치우면 끝난다고 여긴 이반이 부하들을 시켜 문을 열어젖혔다.
아직 연기로 가득한 실내는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았다.
“횃불을 켜라.”
화르륵. 몇 개의 횃불에 불이 붙고 건물 안의 모습이 점차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쉿. 쉬식. 쉬시식.
갑자기 뒤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문 바로 앞에 있던 이반은 당하지 않았지만 절반이 넘는 수하들이 화살에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가...감군 나리..., 으윽.”
“이...이런..., 건물 안으로 숨어라.”
급한 나머지 제일 먼저 건물 안으로 몸을 날린 이반은 당혹스럽다. 도대체 누가 자신을 공격한단 말인가.
화살은 쉴 새 없이 계속 쏟아졌다. 얼른 문을 걸어 잠근 이반의 곁에는 겨우 넷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는 철시 한 발을 맞아 발을 절뚝거리고 있었다.
아직 연기가 다 가시지 않아 숨쉬기가 곤란했지만 참을 정도는 되었다.
‘빅토르. 이 개자식. 감히 나를 배신해.’
이반은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과 수하들을 공격한 자가 이한이 아닌 빅토르라고 판단한 것이다.
빅토르가 적을 끌어들여 자신과 함께 함정에 빠뜨리고 동시에 제거해버릴 계책을 세우고 실행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반이 건물 안에 갇혀 살아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빅토르! 너의 귀띔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통구이가 되었을 거다. 고맙다.”
“아...아닙니다. 칸께선 이미 저자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었음을 잘 압니다.”
역시 감각이 무척 빠른 자다.
이한은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탈출로를 마련해 둔 상태였다. 사방이 막힌 건물이지만 그게 돌이나 벽돌로 쌓은 게 아니라 그저 나무로 만든 벽이었다.
득보와 몇 명이 이미 벽채의 땅바닥을 파서 밖으로 도망갈 틈을 만들고 그곳을 건물 안의 집기로 덮어놓았다.
이반의 수하들이 가끔 문을 열고 잠이 들었는지를 살피는 통에 빨리 빠져나갈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빅토르로부터 이반의 습격 소식을 접한 이한 일행은 미리 파놓은 개구멍을 통해 건물 밖으로 피했다.
안에는 마치 사람이 누워 자는 것처럼 여기저기 나무 뭉치 위에 이불을 덮어두었다.
상황이 역전된 뒤 실내를 가득 채웠던 연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드러난 모습에 이반은 기겁했다.
횃불에 탄 것은 질식한 이방인의 시체가 아니라 그저 이불을 뒤집어쓴 검게 타고난 나무토막이었다.
낭패한 모습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이반 표도로비치는 밖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반! 여기 네 마누라와 자식들이 있다. 순순히 걸어 나오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이한이라는 이방인의 말을 통역하는 빅토르의 목소리였다. 철저하게 당한 것이다.
빅토르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펼친 것이 아니라 적과 아예 손을 잡아버린 것이 아닌가.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의 울부짖음을 들은 이반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안에서 농성한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삐이걱.
불에 타서 반쯤 검게 그을린 문이 힘겹게 열렸다. 그리고 이반 표도로비치와 부하 넷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곳엔 이한의 부하 서른 명과 빅토르의 카자크 전사들이 진을 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빅토르! 이 배신자.”
흘러내릴 것처럼 비대한 이반의 턱살이 부들거렸다. 가족을 바라보는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초점을 잃었다.
“배신...이라. 하하하. 네놈이 차르의 신하라고 했느냐? 넌 단지 스트로가노프의 개다. 우리 카자크의 피눈물을 짜내는 사냥개..., 오늘은 네놈이 죽지만 다음번엔 스트로가노프다. 여봐라. 저놈을 묶어라.”
이한의 묵인하에 빅토르가 사후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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