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대계를 위해서라면 가랑이 사이라도 기겠다.
오래지 않아 투먼에서 각종 무기와 이를 가르칠 교관들이 당도했다. 그중에는 앞서 출발했던 스무 명의 여연 출신 전사들도 섞여 있었다.
일단 교관 60여 명과 3백의 전사를 무장시킬 충분한 활과 창검을 비롯한 무기를 제공하고 본격적인 군사 훈련에 돌입했다.
이판주의 소집령에 응한 나머지 촌주들은 이한으로 인해 보릿고개를 면했던 때문인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한은 일단 체계부터 다시 세웠다. 다소 무리가 따르기는 했지만 5만의 유민을 백호 단위로 나누었다.
하나의 가구에 열여섯부터 육십 사이의 장정 하나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었다. 그 수를 모으자 무려 만여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들을 전부 전사로 쓸 수는 없었다. 그중에서 나이 서른까지의 장정을 고르고 다시 전사로 쓸 사람을 선발하자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전사로 차출되지 못한 장정 중 활을 쏠 수 있거나 조선에서 병사 생활을 경험했던 자들을 따로 분류하자 또 다시 2천의 병력이 되었다.
“2천은 정규군. 나머지 2천은 예비군이오. 강도는 다르겠지만 다 같이 훈련을 받도록 할 것이오. 보름에 걸친 훈련을 마치면 2천의 군대 중 절반은 이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상황에 대비할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각 부락의 예비군을 이끌게 될 것이오.”
놀랍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촌주 하나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우리 유민들은 이한 나리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까?”
잘못하면 반역자로 낙인찍힐 소리를 함부로 지껄인다. 잠시 여러 촌주들이 숨을 죽였다. 마치 이한에게 반역을 부추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들이야 어차피 조정의 눈을 피해 달아났기 때문에 어쩌면 반역자보다 못한 신세였다. 추노꾼에 붙들리기라도 하게 되면 처참한 말로가 눈에 훤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우리 스스로를 지키자는 것이니까. 설령 내가 반역자의 수괴로 몰리더라도 오늘 일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나리! 크흐흑.”
촌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춘궁기를 이겨낼 수 있는 금쪽같은 식량을 내주었고 후금 놈들의 침략을 물리쳐 주셨다.
그리고 이제 자경대라고는 하지만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이 땅을 지킬 길을 열어주신 분이다.
“모두 일어나시오. 지금 우린 할 일이 너무나 많소. 자아 자. 어서요.”
촌주들이 이한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그날 이후 투먼으로부터 반입된 씨감자가 파종되기 시작했고 화전 밭을 일군 곳에는 각종 씨앗들이 심어졌다.
고사리손까지 힘을 보탰다. 전사들이 군사 훈련을 받는 동안은 오롯이 남은 사람들이 농사일을 도맡아야 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쁜 나날이었다. 그건 배를 곪지 않은 삶이었기 때문이다. 유민들은 짧지만 마치 천상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얼추 사군지역의 일을 매듭짓고 나자 후금의 도성 심양에서 급보가 전해졌다. 홍타이지가 제국을 선포했다.
제국의 이름은 대청(大淸)이었고 연호는 숭덕이었다. 후금의 시조인 아이신기로 누르하치가 청국의 초대 황제로 추증되었고 태조가 되었다.
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꾼 홍타이지는 전쟁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국에 사대(事大)를 표방하고 있는 조선을 등 뒤에 두고 요하를 건너 산해관을 치는 것은 꺼림칙했다.
솔호 부락에 니루어전이었던 은정로가 닝구타 협령으로 영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건 이한이나 솔호들에게 큰 선물이었다.
후금 조정에서는 나진이 죽은 이후 그 배후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펼쳤으나 밝혀낼 수는 없었다.
요토는 닝구타에 대한 영향력이 큰 대패륵 다이샨에게 은정로를 협령으로 보내줄 것을 청했다.
한씨 집안의 반발이 있었지만 막강한 다이샨과 요토의 힘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신 나진의 부친인 한택의 경차도위 벼슬을 그의 아들 중 하나인 걸은에게 이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를 무마하였다.
후금에 귀순한 한윤이나 그의 사촌동생인 한택의 위상은 자못 만만치 않아 대패륵인 다이샨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다이샨과 요토가 솔호니루에 대한 애착이 강해 일이 원만하게 풀릴 수 있었던 셈이다.
은정로가 이한을 따로 불러 요토의 뜻을 전했다. 요토는 친왕에 올랐고 병부를 관장하고 있는 거물이 되었다.
“전하께선 아직도 너를 아들로 여긴다.”
“고마운 일이군요.”
“흐음...어째 전혀 기뻐하지 않는구나.”
“협령께선 아시잖아요. 저 이한이 갈 길을...,”
심오한 뜻이 담긴 말이었다. 은정로는 내심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차피 마음속으로 이한을 추종하고 있었다.
그가 요토의 양자가 되어 승승장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여겼지만 하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한의 그릇은 다이샨이나 요토를 훨씬 능가했다.
그래서 자신 역시 불가능한 꿈인 줄 알면서도 이한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골의 후예. 그 지닌 뜻이 너무도 커서 타인이 쉽게 거느리지 못할 위인이다. 은정로는 심양 황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도 솔호니루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진의 급사와 자신의 닝구타협령 발령은 이한의 작품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한! 비상을 꿈꾸는 이무기인가. 아니면 수많은 솔호의 목숨을 앗아갈 흉물인가. 아! 두렵구나. 내가 이한을 버릴 수 없음이...,’
은정로는 다소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물었다.
“꼭...그리 해야만 하느냐?”
이한은 자신의 대답이 가져올 파문을 잘 알고 있다. 잘못하면 은정로와 틈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건 열다섯 개에 이르는 솔호니루의 미래와도 직결된 일이었다.
“정로 아즈바이. 저 이한을 믿습니까?”
“...,”
입이 무거운 은정로는 이한을 응시하기만 할 뿐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솔호와 조선 유민들을 위한 길입니다. 저는 그들을 이끌고 고구려와 발해의 영광을 재현할 생각입니다.”
쿠웅.
전조(前朝)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동안 그런 꿈을 펼치려 했던 영웅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같은 뿌리인 여진인들이 많았고 지금 청태조 누르하치에 이어 홍타이지가 중원을 넘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한이 꿈꾸는 것은 좀 더 직접적이었다. 중원이 아닌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을 회복할 것이라고 했다.
어불성설(語不成說). 만주족이 장악한 땅에서 언감생심(焉敢生心).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나는 닝구타 협령! 반역을 꾀하는 말을 함부로 내뱉다니 죽음을 무릅쓴 것인가?”
“아즈바이...날 죽이겠다면 기꺼이 목을 내놓지요. 이한의 그릇이 그 정도라면...대업이 다 무슨 소용이겠소?”
한점 흔들림 없는 대답. 이미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는 이한을 보고 은정로는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나진...이한 너의 작품이냐?”
“맞아요. 조금만 늦었다면 유민들이 떼죽음을 당할 처지였죠. 제가 연루되었다는 건 누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한윤이 자신의 심복들을 시켜 닝구타 곳곳을 누비며 범인을 색출했으나 전혀 그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으니까.
“나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좀 더 구체적인 말을 듣고 싶다. 해줄 수 있겠느냐?”
“제 말을 듣고 나면 돌이킬 수 없을 텐데요.”
“넌 이미 내가 너를 따를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
담담한 말투였지만 단호한 심정을 밝히고 있는 은정로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던진 이한이 덥석 은정로의 손을 붙잡았다.
“난 아즈바이를 믿었소.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이오.”
“먼저 친왕 전하의 뜻을 전하겠다.”
당장은 청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분간은 철저하게 그들의 개 노릇을 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다. 충성으로 가장해야만 살길이 뚫리는 형국이니까.
“솔호니루를 맡으란 거겠지요.”
“아...알고 있었느냐?”
은정로는 놀란 마음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열여섯에 불과한 조선 유민 출신 소년에게 솔호니루를 맡긴다는 것은 의외였다.
하지만 요토로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한의 자질을 잘 알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한은 요토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맡겠다고 전해 주세요.”
“네 뜻과 배치되는 일이다.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은정로는 너무도 쉽게 요토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이한을 향해 조금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과하지욕(胯下之辱). 한신은 한낱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지요. 하물며 제국의 눈을 속이는 일일진대...그만한 치욕 쯤은 감내해야지요.”
이한의 말에 은정로는 내심 감탄을 했다. 어찌 열아홉의 나이에 이와 같은 웅지(雄志)를 품을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알았다. 앞으로 조선 침공이 다가오면 솔호 전사들의 차출이 있을 것이다. 대비해야 한다. 네가 직접 이끌 수도 있어. 각오는 되었느냐?”
“예. 우리 솔호에서 50명을 차출하겠습니다. 닝구타 전역에서 최소한 5백은 선발해야 하겠군요.”
“그럴 것이다. 물론 나도 참전할 것이고.”
두 사람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정로는 그가 모르는 이한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놀란 일은 바로 사군에 관한 것이었다. 무려 4천의 병력이 이한의 수족이 되었단 말이 아닌가.
“연해는 어떠냐?”
“조정에서 어디까지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 내 장담하지.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얘기해 줄 수 있느냐?”
이제 속일 이유조차 없다. 아니 은정로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대청제국에서 관심조차 갖지 않은 땅이다.
혹독한 추위와 제대로 된 목초지마저 없는 험지(險地)가 아닌가.
“그곳은 우리 솔호들의 목숨줄입니다. 풍족한 어장이 있고 비록 한겨울엔 눈으로 덮이는 곳이지만 꽤 쓸만한 농경지가 조성되고 있지요.”
“그래서 군대는...?”
어째 은정로가 더 애가 닳은 모양새다. 이한은 가벼운 미소를 던지며 별로 대단하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일년 안에 2천 정도는 가능합니다. 아! 수군은 이미 5백 명 이상이 양성되었고요.”
“후우..., 이한...넌 참으로 별난 놈이다. 어쩌면...네 꿈을 위해 이 아즈바이가 한바탕 칼춤을 출 수도 있겠어. 크큭...,”
은정로의 얼굴에 웃음이 감돈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던 은정로가 만면에 웃음을 보이자 이한이 어색해했다.
“그 얼굴...뭡니까? 도통 적응이 안 되네. 쯔읍...,”
“짜식..., 왜 나는 웃으면 안 돼? 항상 살얼음판을 걸어왔는데 이제 의지할 사람이 생겼는데 어찌 웃지 않겠느냐? 하하하.”
의지할 사람. 바로 이한을 뜻하는 것이다. 아직 군신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설정하고 살아온 은정로다. 이는 이심전심으로 이한 역시 알고 있었다.
“앞으로 여섯 달. 황도의 눈을 속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도와주실 거죠?”
“돕지 않으면..., 나도 솔호를 아낀다. 우리 피해도 줄여야 하지만 조선 백성들의 피해도 줄일 수 있다면 줄여야하지 않겠느냐?”
이한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단지 5백의 전사일 뿐이지만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한이 손을 내밀었다. 은정로가 그 손을 맞잡았다. 두 사내의 눈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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