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건주위 오랑캐의 습격
휘이익.
이한은 나뭇가지 하나를 자신의 반대편으로 던졌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여러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 사이에 이한은 포복으로 숨어 있던 적송을 벗어나 놈들의 위를 점했다.
김채언은 이한의 움직임을 눈으로 뒤쫓았다. 여차하면 자신이 몸을 드러내 미끼가 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암살 솜씨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자부하던 그조차도 이한의 위장술과 예측 불허의 움직임을 쫓을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이한이 장검과 단검으로 세 놈의 모가지를 따 버렸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몸을 날려 사라졌다.
건주위 전사들은 공포로 온몸이 굳어버렸다. 몇 놈 되지 않는 적에게 벌써 스무 명이 넘는 전사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강으로 퇴...각하라!”
더 이상 약탈은 의미가 없다. 잘못하다간 능선을 넘기도 전에 몰살을 당할 상황이다. 우선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놈들의 의도를 간파한 이한은 마음이 급했다. 그는 숨어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시란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용케 그 의도를 알아챈 시란이 조용히 뒤로 몸을 뺐다. 이한은 나머지 세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 꼼짝도 하지 말라고 전했다.
한동안 공격이 없자 건주위 전사들이 하나둘 조심스럽게 중턱 아래로 움직였다.
방패로 위쪽을 가리고 공격에 대비하며 비탈길을 내려가는 니루 전사들의 호흡이 가빠졌다.
놈들이 잔목 숲을 막 벗어나 개활지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놈들이 여기서 전속으로 달음박질치면 막을 방도가 없다.
쉬익. 쉭. 슈슉. 시익. 쉬익.
갑자기 쏟아진 다섯 발의 화살은 정확하게 전사들의 몸에 틀어박혔고 남은 놈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주변의 은폐물에 몸을 숨겼다.
김채언의 수하들이다. 시란이 그들과 함께 놈들의 배후를 친 것이다. 이제 수적으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한은 이미 놈들의 뒤를 점하고 있었다. 이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득보가 수신호를 읽었다. 삼면에서 일거에 놈들을 치겠다는 신호였다.
마음이 급했다. 잘못하다간 가장 먼저 뛰어든 이한이 중과부적으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적군은 부상자까지 합쳐 열넷.
‘놈들은 지금 패닉상태다. 모두 은폐하고 있어 화살 공격으로 타격을 줄 수 없어. 그렇다면...,’
이한은 쌍시 연노에 철시를 채웠다.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장화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쉬식.
“커헉...!”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위 뒤에 숨어 있던 후금 전사 한놈에게 쌍시가 날아들었다. 철시 한발은 얼굴에 한발은 목을 파고들었다. 절명이다.
놀라서 몸을 일으키는 적군 세 놈을 향해 몸을 날린 이한이 대검으로 한 놈의 심장을 찌르고 자신의 검으로 날아드는 적군의 월도를 비껴내며 몸을 회전하면서 뒷덜미를 깊게 베어버렸다.
세 놈 중 두 놈이 눈 깜짝할 새에 당하자 나머지 한 놈은 괴성을 지르며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눈먼 칼질에 당해줄 이한이 아니었다.
왼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던져 놈의 허벅지에 박아버린 이한이 도약하며 휘두른 검에 목이 날아갔다.
순간 사방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득보가 득달같이 달려들며 칼을 휘두르자 두 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채언 아즈바이 역시 바닥을 기듯이 다가갔다가 득보가 적을 공격하는 순간 몸을 일으켜 세우고 목표했던 적군의 급소를 찔렀다.
이한이 공격을 시작하고 숨 몇 차례 쉴 정도의 짧은 시간에 적군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다. 살아남은 놈은 부상을 당한 적군 세 놈뿐이다.
갑주 여기저기에 피가 낭자한 이한을 본 득보가 다가와 심각한 얼굴로 살피기 시작했다. 득보의 표정이 가관이다. 아주 울기 일보 직전이다.
“형! 왜 이래? 나 이한이야. 이 정도 전투에서 상처 입을 정도는 아니라고.”
“후우..., 주군! 무모하셨습니다. 아시죠?”
“응...알아. 미안해.”
맥이 풀려버린 득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이한에게 더 따져봐야 뭐하겠는가.
둘이 잠시 티격태격하는 동안 채언은 시란과 바얀을 시켜 후속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자경대가 합류했고 적군의 시신에서 무기와 갑주 따위를 벗겨 전리품으로 취한 뒤 비탈진 음지에 땅을 파서 매장해버렸다.
사로잡은 세 놈을 이끌고 여연의 이판주에게로 향했다.
촌주를 비롯해 마을의 원로들이 초조하게 자경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경대에 속하지 않은 마을의 장정들도 무기가 될만한 것들을 소지하고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나리! 어...어떻게...?”
촌주 이판주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투먼으로 떠났던 이한이 오랑캐를 물리치고 세놈을 붙잡아 돌아왔으니 유민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다행히 빨리 소식을 들었소. 자경대 병사 둘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으니 빨리 치료하시오.”
마지막 격돌에서 적군의 완강한 저항에 두 명이 부상을 당했다. 다행히도 중상이 아니었다. 촌주는 서둘러 부상자들을 옮기고 상황을 처리했다.
생각보다 일 처리가 능숙했다. 경황 중에도 흔들림 없이 대응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한은 촌주 이판주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한명련의 수하였다는 말만 들었다. 단순한 병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경대를 시켜 오랑캐들이 타고 왔던 뗏목과 강가에 매두었던 군마들까지 모두 수습했다. 놈들이 왜 굳이 말을 끌고 왔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도 여연 마을을 약탈하고 추가로 더 많은 전사들을 불러들여 다른 마을까지 노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이한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여연 부락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추가 도발을 막기 위해선 놈들이 강을 건널 생각 따위 아예 접도록 해야만 했다.
“촌주! 자경대를 전부 소집해 줄 수 있겠소?”
“예. 각 부락에 필수 인력만 남기고 모두 소집해 보겠습니다.”
촌주의 확답을 들은 이한이 바얀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실기하면 모두 위기에 처할 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한번 결정하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이한이다.
“바얀!”
“예. 주군!”
“즉시 투먼으로 돌아가 스무 명의 전사들을 선발해서 돌아오라. 올 때 연노 오십 개와 보총 서른 정도 함께 준비해 오도록 해.”
“주...주군!”
득보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리는 시늉을 했다. 두 개의 무기 모두 외부에는 극비였다. 만일 이것들이 외부에 누출되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한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을 담그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알아 형! 철저하게 비밀을 준수하도록 조치할게. 이번 한 번만 믿어줘.”
이한의 표정을 본 득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사군 지역을 확실하게 이한 자신의 영지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놀랄 정도로 냉철하고 예리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이한을 믿기로 했다. 단순한 똥고집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한은 초기형 투먼 보총은 외부에 유출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후금이나 조선이 이를 개량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화약의 생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연노 또한 이미 존재하는 것을 특수한 형태와 소재로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성능을 내기 힘들고 더구나 대량생산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사용을 자제하도록 규정을 만들 예정이다.
이한의 사군 방문 기간이 길어지자 서달과 휘경 선생이 직접 여연을 찾았다.
“주군! 투먼, 토성, 연해의 일이 켜켜이 쌓여 있는데 대체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서달이 볼멘소리를 한다. 지금 그 일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
교역에 관한 것이야 김대복과 시게루가 나서 그럭저럭 일처리를 하고 있지만 이한의 부재로 다들 어려운 실정인 것은 분명했다.
이한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질 참상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두 분 잠시 저와 얘기 좀 나누시죠.”
이제 열아홉에 불과했지만 타고난 혈통 때문인지 아니면 이한이 특별한 것인지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무척 강했다.
서달이 먼저 이한을 따르자 휘경 역시 묵묵히 뒤를 따랐다.
어느새 여연 부락에 자신의 별채까지 마련한 이한이 득보에세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지시하고 두 사람을 이끌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홍타이지가 조선을 칠 것입니다.”
“...,”
이한의 말에 두 사람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주변 정세에 대해서는 이한이 항상 한발 앞서 나갔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다면 틀림없을 것이다.
“궁금하시겠지만 이는 후금 도성에서 흘러나온 정보니 믿어도 됩니다. 당장 다음 달이면 후금이 청으로 국명을 바꾸고 칭제(稱帝) 건원(建元)을 할 것입니다.”
“정...정말입니까?”
휘경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확실합니다. 홍타이지는 명국을 치기 전에 눈엣가시 같은 조선을 먼저 손보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사군지역과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많은 조선사람이 끌려갈 것입니다.”
항상 인구가 부족한 후금이다. 그들이 비옥한 요동 평원을 차지했지만 농사에 대한 재주는 별로 없었다.
한족들이 꽤 있지만 조선인 만큼 농사를 잘 짓는 족속도 드물었다. 조선인 포로는 만주족에게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존재였다.
“으음..., 이곳 사군지역은 유민들이 많지요. 굳이 포로로 끌고 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길만 열어주면 만주족의 수족이 될 것입니다.”
비록 외부로 알려지지는 않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스며든 유민의 수가 5만을 헤아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조선에 반감을 지닌 자들이다. 만일 후금...아니 새로 건국될 청국이 이들을 붙잡아가게 되면 조선은 두고두고 골치를 앓을 것이다.
하나같이 조선 조정과 위정자들에게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조선 조정에 이를 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도 눈과 귀가 있는데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알고 있더라도 막을 힘이 없을 뿐.”
“후우..., 큰일이로군. 그래 어찌하겠단 말입니까?”
이한과 휘경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달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지금 이한이 가장 조심스러워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의부 서달 하나다.
서달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다. 아비 서아지가 무예와 함께 글공부도 시켰기 때문에 비록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곳 사군부터 무산 일대까지를 우리 영역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주...주군!”
휘경이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제국을 칭하는 후금과 아직 만만치 않은 조선 사이에 새로운 영토를 만들겠다는 것은 나라를 세우겠다는 말이 아닌가.
“아직 스승님께서 우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간도와 연해를 중심으로 저의 세력을 만들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내비치는 이한의 눈에는 정광(晶光)이 넘쳤다. 서달은 자신의 아들이자 제자인 이한의 말에 얼른 무릎을 꿇었다.
“주군! 비록 늙고 힘없는 저이지만 가는 길을 끝까지 따르겠나이다.”
“저 역시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한에게 부복했다. 핏덩어리 이한을 지금까지 끌어준 사람들이다. 피붙이 하나 없는 이한은 두 사람에게 친혈육보다 더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의 충성 맹세를 확인한 이한은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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