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결투
34화, 살려주면 전재산을 드리겠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걸 보고, 박정기는 시내 한복판에서 결투 신청을 했기 때문인 줄 알았다.
사실은 결투를 신청한 상인이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참관인을 많이 모았던 것이다.
한스 빌럼스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번의 결투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다.
‘어디서 굴러온 놈이 감히 내 사업을 방해하고 있어?’
한스 빌럼스는 동양인 놈을 반드시 죽여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결투할 두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네!”
“알겠소.”
“서로 양보하고 화해하는 것이 어떻겠소?”
“나는 절대로 화해할 생각이 없소.”
“마찬가지입니다.”
입회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럼 여기에 서명하고 서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맹세하시오.”
“나 한스 빌럼스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결투에서 만약 죽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소.”
“나 박정기는 결투 중에 사망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입회인은 양자가 서명한 계약서를 확인하고 자신도 서명했다.
“무기는 무엇으로 하겠소.”
“나는 각자의 총으로 했으면 하오.”
“동의합니다.”
한스 빌럼스가 자신의 권총으로 하겠다고 말하자 박정기도 동의했다.
“두 사람은 합의에 따라 10보씩 뒤로 물러나시오.”
“알겠소.”
“네.”
박정기는 좌측으로 10발짝을 걸어가 섰고, 한스 빌럼스는 오른쪽으로 10발짝 걸어가 섰다.
“서로 마주보고 총을 장전하시오.”
“......”
“......”
박정기는 막상 결투가 진행되자 손이 떨려서 총알을 장전하는데 화약을 조금 흘렸다.
‘시발~ 졸라 쫄리네. 이거 진짜로 해야 돼?’
“준비 되었으면 마주보고 서시오”
박정기는 긴장해서 떨리는 손을 진정 시켜야 했다. 사격에서 손이 떨리면 말짱 꽝이다. 바로 죽는 것이다.
‘와 씨 되게 긴장되네. 심호흡을 하자 심호흡!’
“이 손수건이 바닥에 떨어지면 사격을 시작하고 3번 이상 쏠 수 없습니다.”
“알겠소.”
“잠깐! 진짜 죽여도 되는 거요?”
박정기가 말하자 참관하러 온 사람들이 와~ 하고 웃어 댔다.
“죽여도 된다고 맹세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정기는 그새 긴장이 조금은 풀어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그럼 준비! 하나! 둘! 셋!”
손수건이 나풀거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모든 게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껴졌다.
한스 빌럼스이 총이 박정기의 머리를 향해 움직였다.
‘어라! 내 머리를 맞추려고 하나? 그러면 안 되지.’
박정기가 잽싸게 상대 향해 발사했다. 막상 죽이려 하니 망설여져서 어깨를 쏘았다.
탕! 탕! 박정기가 쏜 총알은 상대방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고, 그 충격에 조금 늦게 발사된 상대의 총알이 박정기의 왼쪽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통이 깨질 뻔했네.’
박정기는 가슴이 쿵 꽝 거리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한편으로는 짜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찌르릉 울렸다.
상대가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뒤늦게 살심이 올라왔다.
‘저 자식 죽여도 된다고 그랬지?’
박정기가 총에 화약을 붓고 총알을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총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오른팔을 쓰지 못하자 장전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을 다리 사이에 끼고 왼손으로 총알을 장전하다가 자꾸 바닥에 흘렸다.
“아아악~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기도할 시간은 주겠소.”
“흑! 제발, 아아~ 잠시만 제발~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상대는 사시나무 떨 듯 하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구차하게 꿈틀거리는 벌레가 있을 뿐이었다.
한스 빌럼스은 사냥꾼 출신으로 잡은 모피를 팔러 다니다가 장사에 눈을 떴고, 그 이후로 10여년 고생한 끝에 가게를 차려 사업가로써 큰 성공을 거뒀다.
사냥을 하면서 강선이 패인 총이 명중률도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총에도 강선을 새겨 달라고 의뢰를 넣었었다.
완성된 권총으로 사격 연습을 해보니 정확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이에 자신감이 생긴 한스 빌럼스은 툭하면 시비를 붙여서 결투를 했다.
몇 번의 결투에서 승리하자, 사람들이 떠 받들어주고 마치 영웅처럼 대해줬다.
지난번에 동양 놈이 모피를 가져왔을 때 급한 일이 생겨서 입찰에 참여하지 못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처음 참여한 놈들만 따로 모임을 만들어 독점으로 거래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또다시 가져온 모피를 저희들끼리 모두 나누어 가졌다.
한스 빌럼스는 생각했다.
‘동양 놈이 죽이면 저놈들도 모피를 구입하지 못하겠지.’
저놈들이 잘되는 꼴은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정기가 시내로 나왔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달려가서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그런데 죽을 줄 알았던 동양 놈이 멀쩡히 살아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한스 빌럼스는 쓸데없는 명예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다. 결투도 남들 잘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신청한 것이다.
저 자식이 총을 이렇게 잘 쏘는지 알았다면 절대로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살려준다면 내 재산을 모두 주겠..”
탕! 크억!
한스 빌럼스는 믿어지지 않는 눈빛으로 박정기의 총을 바라보았다.
박정기의 총에서 연기가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 ’
한스 빌럼스의 의식이 끊겼다.
죽음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투에서 비겁한 행동을 하거나 반칙을 하는 경우, 그 사람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참관인이 죽여주는 경우가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스 빌럼스의 참관인으로 왔던 신사가 비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한스를 죽여 그의 명예를 지켜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상황에서 명예가 지켜 질리 없었고,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죽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박정기는 한스 빌럼스의 시신에 다가가 고개를 숙여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로써 이번 박정기와 한스 빌럼스의 결투에서 박정기가 정정당당하게 승리했음을 공표합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치지는 않았다. 모두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박정기씨는 계약 내용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수령하시오”
통역이 대신 읽어주는 계약서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한스 빌럼스의 전 재산을 박정기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참관인과 입회자의 서명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이거 진심이야? 급하니까 그냥 한 말 아니었어?’
박정기는 한스 빌럼스이 죽기 전에 전 재산을 다 주겠다고 한 말이 실제로 넘어오게 되자, 믿어지지 않았다.
유럽의 기사도 정신이 얼마나 신뢰를 중요시 여기고, 사소한 말이라도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하게 되었다.
‘말조심 해야겠다. 한국에서 처럼 말했다가는 하루에 몇 번씩 죽겠다.’
친구들과 장난하며 목숨을 얼마나 걸고, 전 재산은 얼마를 걸었던가. 여기서 그랬다가는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앞으로 손에 장을 지진 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지.’
결투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끝났고, 어디서 준비했는지 한스 빌럼스는 관속에 들어가 있었다. 박정기는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고 돌아섰다.
“이것도 가져가시오. 한스 빌럼스의 물건이니 당신이 보관하는 것이 맞겠소.”
“어! 네 감사합니다.”
입회자가 건넨 것은 한스 빌럼스이 사용한 권총이었다. 박정기가 살펴보니 강선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래서 저 인간이 그렇게 자신만만했구나.’
박정기는 이 총에 미니에탄을 사용하면 굉장히 위협적일 것 같아 기분이 흡족해졌다.
새벽에 시작된 결투는 오전이 되자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