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35화, 훌륭한 집사를 얻다.
결투를 끝낸 박정기가 참관인 일행들과 얀센의 배로 돌아오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에바가 달려와 박정기에게 와락 안겼다.
“어~ 왜?”
쪼~옥!
에바가 박정기의 빰에 뽀뽀를 했다.
“너무 멋있어요. 내 생에 최고의 결투였어요. 어머! 이거 피잖아요.”
“어~ 괜찮아. 에바 진정하자고, 진정해.”
“안돼요. 감염되면 귀를 자를 수도 있어요.”
팔에 맞은 총알 때문에 감염이 돼서, 결국 팔을 자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기억 때문인지 에바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사실 귀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에 찰과상 정도 다친 거지 뭐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밴드 하나 붙이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에바는 치마를 죽~ 찢어서 귀와 머리를 싸맸다.
에바에게 팔을 잃은 아버지 사연을 들었었기 때문에 박정기는 말리지 못했다.
김좌근은 흥분한 나머지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해 본적이 없었다네. 동생 정말 대단하이.”
“감사합니다, 형님 앞에서 체면치레는 해서 다행이네요.”
“무슨 말인가? 겸손한 말은 안 해도 되네, 마치 태조대왕의 현신을 보는듯했다네.”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역적으로 몰리고 싶습니까?”
“여기에 듣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옆에 서있던 몸 구종이 얼굴을 돌렸다. 그것을 캐치한 박정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 취급을 못 받아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김좌근이 자신을 믿어줘서 그러는 건지?
만약 전자면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테고, 후자면 감동해서 눈물을 삼켰겠지.
아무리 봐도 눈물을 삼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암튼 나라도 잘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박정기.
참관인들의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몰골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행색이 초라한 30대 남자, 얼굴에는 멍 자국이 남아있고, 피죽도 못 먹은듯한 몸은 휘청거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가슴에 큰 가방을 안아들고 겁을 먹은 표정으로 눈길을 피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죽은 한스 빌럼스의 집사입니다.”
“오! 이쪽으로 불러주세요.”
“네!”
통역이 한스 빌럼스의 집사에게 가서 몇 마디 건네고, 함께 박정기의 앞으로 왔다.
“안녕하십니까? 톰 호프만입니다. 한스 빌럼스 사장님의 집사일을 맡고 있습니다.”
“영어를 잘 하시는군요. 그런데 왜 오신 거요?”
“한스 빌럼스 사장님의 재산이 모두 선생님께 양도 됐으니 재산 내역을 알려드려야 해서 따라왔습니다.”
박정기는 재산 내역이란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보는 사람이 많아서 침착하게 응대했다.
“오! 그렇단 말이지요?”
“네! 이속에 모두 있습니다.”
“언제부터 그 사람과 일했습니까?”
“10여년 됐습니다.”
“그런데 얼굴은 왜 그렇게 된 건가요?”
“넘어져서 다쳤습니다.”
뻔한 스토리에 속아 줄 박정기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때렸습니까?”
“아닙니다. 제가 넘어져서 다친 겁니다.”
“아,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사업체도 가지고 있지 않았나요?”
“모피 가게와 모피공장, 창고 6동, 그리고 무역선이 3척 있습니다.”
“무역선이요? 어디에 있나요?”
박정기는 조선 사람을 싣고 가는 게 급한 일이라 무역선에 관심이 많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모피를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무슨 모피요? 우리도 모피를 파는데?”
“선생님의 모피는 최고급인 밍크와 비버 가죽 아닙니까. 유럽에서 밍크나 비버가 멸종이 돼서 구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취급하는 모피는 사슴이나 소가죽, 늑대가죽, 토끼가죽들입니다.”
서민들이나 산업용으로 쓰이는 가죽을 취급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물량이 상당히 많아보였다.
“아! 그렇군요.”
“직원도 있겠군요.”
“네 직원과 노예를 포함하면 246명입니다.”
“아직도 노예가 있습니까?”
“몰래 영국에서 사들여 왔습니다. 공장에서 가죽 다듬거나 염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노예만 몇 명입니까?”
“187명입니다.”
“그렇게 많아요?”
“네, 사장님께서 인건비를 아껴야 한다고 하셔서....”
“악질이군요.”
“헙, 크음!”
박정기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일단 집사가 악덕 업주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으니, 그것부터 해결해 줘야겠다.
“여기에서 일하기 전에 뭐했습니까?”
“저는 회계사였습니다. 이 회사에 회계사로 들어와 여태 그만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하던 일을 해주세요.”
“아닙니다. 저는 이 서류를 넘기고 고향으로 내려갈 겁니다.”
‘여태껏 지긋지긋했었나 보군.’
“그럼 이렇게 합시다. 사업체를 모두 팔아버릴 테니까. 나를 따라 신대륙으로 갑시다. 편하게 살게 해주겠습니다. 어떠세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입니다. 노예들도 모두 데려가서 해방을 시켜주겠습니다. 그리고 직원 중에서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데려갈 겁니다.”
“그럼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집사는 자신이 내뱉은 이 말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아직은 몰랐다.
암스테르담은 결투 이야기로 들끓었다. 우선 결투 주인공들이 초미의 관심사다.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하늘에서 날아온 외지인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상인이기 때문이다.
한스 빌럼스는 모두가 무서워하면서 경멸하는 상인이다. 물건을 살 때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강탈하다시피 가격을 깎았고, 팔 때는 우격다짐으로 강매를 했다,
특히, 이에 항의를 하면 결투를 신청해서 상대를 죽였다.
암스테르담의 암적인 존재였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의를 제기하거나 욕을 하면,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결투를 신청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투마다 한스 빌럼스이 승리했다.
-그 더러운 놈이 죽었다는 군.
-소식을 듣고 나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네.
-죽어 마땅한 놈이지. 그런데 그놈의 재산이 모두 외지인에게 갖다 던데.
-그놈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자산을 모두 주겠다고 했다 하네.
-재산이 꽤 많을 텐데.
-소문에는 암스테르담에서 10손가락 안에 든다고 하던데.
-그렇게 많아?
-숨겨 놓은 것까지 밝혀지면 더 많을 거야.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결투 이야기였다.
미디어가 없어서 정보의 양이 절대적으로 적고,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별다른 흥밋거리가 없으니, 결투 결과는 그야말로 특종감의 희소식이었다.
결투 현장에 있던 200여명이 10사람에게 말하면 2,000명이 되었고, 2,000명이 2만 명, 2만 명이 20만 명이 되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두세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 오랜 기간 정체되어있는 지역사회에서 소문이란 들불과 같았다.
그리고 소문에는 뼈가 붙고, 살이 붙었다. 이제 박정기는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하늘에서 온 그 사람 말이야, 총알이 귀에 맞았는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고 해요.
-어머 정말이요? 어쩜, 그렇게 대범할 수가 있을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직접 본 사람들이 말하는데 키도 크고 잘생겼다고 하던 데요.
-나도 멀리서 잠깐 봤어요. 멋진 정장에 얼굴도 하얗고, 체격이 좋았어요. 다시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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