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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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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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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1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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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회의를 주도하는 자

DUMMY

결사의 각오로 밀어붙이던 목표가 사라진 나는 실이 끊어진 연 같았다. 긴장감이 풀려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다. 회의장 안으로 돌아오면서 어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노드와 산책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 왕성의회 사람들은 전부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바이우스는 나와 노드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살피더니 이윽고 내가 상석에 앉자 회의의 재개를 선언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차기 왕궁기사단장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를 계속 하겠습니다. 먼저 노드 체스터 경의 해임 건에 대해....”

“체스터 경은 예정대로 퇴임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바이우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이미 결단을 내린 이상 일초의 시간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이어 목소리를 가다듬고 엄숙히 선언했다.

“이는 체스터 경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 결정입니다. 결코 관습을 따라간 결과가 아닙니다. 여기서 분명히 밝힙니다. 전통을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거나 현 실정에 맞지 않다면 저는 그것을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유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귀족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동의 뜻을 밝힌다.


이제 회의가 재개되고, 각자 자신이 지지하는 기사를 내세우며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울 것이다. 지금은, 왕인 내가 회의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지들끼리 싸우는 동안 나는 멍하니 딴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추슬러야겠다. 노드의 거취를 정하면서 정작 그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았던 건 뼈아픈 실수였고 이에 대해 충분히 반성하고 싶었다.

노드가 페나에 앤디와 크루거를 데리고 온 것은, 나로 하여금 차기 왕궁기사단장이 될 유력한 후보들을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둘 중에 누가 왕궁기사단장에 더 어울리는지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노드를 남기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을 상정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문제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차피 두 사람 모두 능력 있고 훌륭한 기사들이라 누가 되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래서 저는 셔벗 경을 추천합니다.”

발언하고 있던 남자가 말을 맺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나는 갑자기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을 인지했지만 다른 생각을 하느라 이 현상이 뭔가 어색하다는 낌새는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왕님?”

이 말을 들은 후에야 나는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대한 평가를 내게 요청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정적이 흘렀던 것이다. 물론 집중하지 않고 있던 내가 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에게 다시 말해달라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앤디 경에게 사교성이 있다면 크루거 경에게는 공명정대한 신념이 있습니다. 기사도 결국은 군인이고, 군인은 모름지기 사적인 감정보다 공적인 임무를 우선해야 합니다.”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까지 내가 본 회의장의 분위기대로라면 방금 크루거를 두둔한 남자는, 먼저 내게 의견을 물었던 남자를 쏘아붙여야 했다. 그런데 그 역시도 시선을 나에게 향하며 넌지시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왕님?”


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 앤디를 지지했던 남자가 다시 또 반론을 제시한다. 그런데 말을 하는 대상은 이번에도 나였다. 얘들 갑자기 왜 이래? 이제부터 니들끼리 싸우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누구 말이 더 맞는지 물어보는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나는 회의에서 소외당하는 것에 적잖은 불만을 품었다. 분명 이 상황은.... 사람들이 내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 내가 결정을 내리는 이 상황은, 책과 씨름하면서 밤을 샐 때 내가 이상적으로 상상했던 바로 그런 회의였다. 그런데 막상 결정권이 내 손에 쥐어지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감한 상황에서 나를 구해준 사람은 스펜서였다.

“여왕님께서는 방금 전까지 노드 경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만큼 앤디 경과 크루거 경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으셨을 겁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을까.

“두 후보 모두 왕궁기사단장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영웅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왕님도 두 기사의 강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셨습니다. 사교성이 좋은 앤디 경과 기강이 확실한 크루거 경. 두 분 중에 누가 더 나은지 굳이 이 자리에서 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직 저희들의 의견도 분분하니 좀 더 시간을 갖고 신중히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안 정해도 되나요?’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왠지 왕으로서 위엄이 없어 보일 것 같아 겨우 참았다. 아무래도 왕궁기사단장을 공석으로 두어도 괜찮은가 보다. 지금까지 다른 귀족들을 향해 연설을 해왔던 스펜서가 이번에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왕님께서는 아직 수호기사도 임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체스터 경이 대신 수호기사 임무를 맡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두 기사에게 번갈아가며 경호를 맡겨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두 기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신다면 나중에 왕궁기사단장을 임명하실 때 참고가 될 것입니다.”

스펜서의 말은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는 명안이었다. 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상황이 정리되었다. 바이우스가 회의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왕성의회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나는 뒷정리를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이우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와 노드 경이 나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난 확신하고 있었다. 휴식시간 이전과 이후의 회의 양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왔을 때 전원이 자기 자리에 돌아와 있는 것이 꽤 이색적이라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 아무도 자리를 뜬 적이 없었던 것이다. 분명 내가 없는 자리에서 무언가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늘 회의는 차기 왕궁기사단장을 뽑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하죠.”

“하지만 두 기사 중에 누구를 지지할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티즈 경과 웨버 경의 토론을 지켜본 후에 선택을 내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그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이름이 웨버라는 건 이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이우스가 무슨 말을 할지도 대충 예상이 되었다.

“원래는 두 개의 선택지 중의 하나를 고르는 거였는데.... 또 내가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노드 경과 나가신 후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의논했습니다. 그 때 누군가 말했습니다. 노드 경을 포기하도록.... 먼저 설득하는 쪽이 왕궁기사단장을 결정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난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설득하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허무하게도 내가 먼저 고집을 꺾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규칙의 얼개는 남아 있어 아직 유효하였기에 양쪽 모두 자신의 논리에 나를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대체 그건 누구의 생각이었죠?”

나와 관련한 요상한 규칙을 만들면서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몹시 화가 났다. 그래서 내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반면 바이우스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평온했다.

“바로 저의 제안이었습니다.”

“네?”

난 어이없는 얼굴로 바이우스에게 되물었다. 눈치 빠른 그라면 내가 지금 화가 났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대충 얼버무리지 않고 그 사실을 시인하는 걸까?

“혹시 회의에서 소외된다는 생각에 불쾌하시지 않았습니까?”

스펜서도 스펜서지만 이 사람도 참 귀신같다. 내 생각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토론을 하면서 말이 이치에 맞는지를 살피기보다 편을 가르고 기 싸움만 벌이는 게 못마땅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보니 수긍이 가는 얘기였다. 나라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자들이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하기보다 고작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줄곧 냉소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맞아요!”

“그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실 수 있게 해드린 겁니다. 그리고 회의 참가자들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논리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그랬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회의 그대로가 아닌가. 하지만 내게는 아직까지 채 가라앉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있었다.

“그런데 왜 제게 말하지 않았어요? 미리 말해줬다면 대비하고 있었을 것 아니에요?”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제 말은 귀담아 들으시지 않으니까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우스는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을 지적했고, 정치라는 건 회의장 안이 아닌, 밖에서 결정되는 것이라 어젯밤 말했다. 그런데 나는 회의를 통해 내 뜻을 이루려 했다. 그의 말과 정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그러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바이우스는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에 회의장을 나갔다. 나는 청소하기 위한 하녀들이 들어올 때까지 텅 빈 회의장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금까지 그 깍듯한 태도 때문에 잘 몰랐는데 바이우스는 독설가였다. 그리고 그가 던지는 독설은 꽤 묵직하고 아팠다. 하지만 나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왜냐면 지금까지 그가 한 말들은 전부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이우스가 어제 해준 말을 새겨들었다면, 회의에서 내가 느낀 것 이상의 당혹스러움을 노드가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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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도가 느립니다.

휘렌델의 작은 감정 변화까지 묘사하다 보니...

메담과의 첫만남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분량이 적었는데 말이죠.

어쩌면 왕녀의 외출도 1년 넘게 연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휘렌델 : 설마.... 어제 한 말을 제가 무시했다고 삐진 건가요?

바이우스 : ....말 안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89 티말
    작성일
    15.04.11 09:14
    No. 1

    바이우스 : 대본에 써있더군요.
    휘렌델 : 정말요?
    바이우스 : 정말입니다.
    휘렌델 : 흐음..(아닌것 같아도 표정을 보니 알 수가 있어야지 원..)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1 11:49
    No. 2

    왕녀의 외출은 쪽대본이라
    캐릭터들의 애드립을 적극 권장하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5.04.11 09:26
    No. 3

    바이우스 : 저는 여왕님 편입니다.
    휘렌델 : 정말요?
    바이우스 : 정말입니다.
    휘렌델 : 흐음...(맞는것 같아도 표정을 보니 알 수가 있어야지 원..)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1 11:48
    No. 4

    바이우스는 휘렌델의 아군일까요? 아닐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8 sa****
    작성일
    15.04.11 23:24
    No. 5

    이런 글이라면 긴 호흡을 기대합니다 감사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12 03:43
    No. 6

    전개가 느려서 답답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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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41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4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7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4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3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9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5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1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8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3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8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3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3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80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1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9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3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2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2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3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2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4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2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3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81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3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5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5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90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3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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