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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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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344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5.20 07:00
조회
2,491
추천
67
글자
12쪽

꿈을 살고있는 자

DUMMY

바이우스가 만들어서 알트론 선왕에게 제안했다고 하는 추첨제. 평민을 뽑아서 귀족으로 만들어준다는 말이 내게는 꽤나 생소하게 들렸었다. 그런데 그 제도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추첨제에 뽑혔다고? 정말로?”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아까는 메담의 말이 추첨제에 대한 설명이었는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이번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메담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는 두창이 다시 유행하던 시기였어. 그래서 어느 때보다 추첨제에 참가한 사람이 많았어. 모두들 귀족이 되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평민들은 저런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두창이 귀족이라고 쉽게 낫는 병이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주운 그 메달이 당첨될 확률은 대략 십만 분의 일 정도였지.”

“너 굉장히 운이 좋았구나! 십만 명 중에서 귀족으로 뽑혔던 거야?”

메담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의 행운에 기뻐하는 얼굴이 결코 아니었다. 상하로 움직이던 고개가 어느새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귀족이 아니기도 해.”

“그게 무슨 말이야?”

메담은 나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밤하늘 쪽으로 고개를 올렸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애처롭게 깜빡이는 별빛이 비친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해. 심지어 저 녀석들마저.... 모두들 내가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해. 뒷골목을 전전하며 구걸하고 다니던 거지새끼가 하루아침에 귀족이 되었으니까. 사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나도 그랬어. 추첨제에 뽑힌 사람들이 부러웠어. 나도 귀족이 되고 싶었어. 정말 미치도록 말야.”

메담은 웃고 있었다. 내가 가장 자주 본 표정이 바로 저 웃는 얼굴이다. 그런데 지금 저 말을 들으면서 자세히 보니 그 웃음이, 그 희박한 확률을 돌파하고 꿈을 이뤄낸 기쁨 때문에 웃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기 위해 짓는 웃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새삼 저 얼굴이 피로해 보였다. 그리고 저 메담의 피로가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귀족에 속할 거야. 그런데 막상 나는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해. 나도 성 안의 깨끗한 방을 배정받았어. 편한 침대에서 자고 맛좋은 음식을 먹어. 하지만....”

메담은 잠시 말을 끊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힘주어 강조했다.

“나는 결코 같지 않아. 예전부터 귀족이었던 사람들과 말야.”

그간 억눌러왔던 복잡한 심경이 압축되어 있는 것 같은 한 마디였다. 문득 셀린이 메담을 ‘종자 없는 기사’라고 지칭했던 것이 생각났다. 어쩐지 그 말이 메담이 처한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해주는 것 같다. 기사는 기사이되 몸을 낮춰 그를 섬기는 종자를 얻지 못한 기사. 그 자신은 귀족이지만 그를 후원해줄 가문이 없는 귀족. 그게 바로 메담이었다.

“나보고 꿈속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정말로 그 말대로야. 마치 꿈인 것처럼 분명하지가 않아. 내가 귀족인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평민인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해. 아무도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 모두들 귀족 아니면 평민 각자 속한 영역이 있잖아. 하지만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아.”

“왠지 그 심정 알 것 같아....”

이건 반드시 녀석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만은 아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메담이 느끼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이 왠지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이상하게도 메리 너는 이해할 것 같았어.”

내가 메담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던 것처럼 메담도 내게서 자신이 가진 어떤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친구가 되자고 했던 거야?”

“그 이유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네가 나에게 반말을 해주었기 때문이야.”

“뭐? 반말?”

“다른 하녀들은 내게 존댓말을 써.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얼마 전까지 평민이었다는 사실을 계속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얼굴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어.”

나는 메담이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셀린만 해도 내가 메담의 전담 하녀라고 밝혔을 때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았던가. 이는 성 안의 사람들이 메담을 귀족도 평민도 아닌 존재로 취급한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메리 너는 달랐어. 네가 나에게 반말을 하는 순간 내 자신이 명확해지는 걸 느꼈지. 복잡한 생각 할 필요도 없이 말야. 그래서 아까 전에 네가 나한테 다시 존댓말 한 게 너무 마음에 걸리는 거야.”

“그 때는 옆에 셀린이 보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아 그랬던 거야? 그러고 보니 네 옆에 누가 있었네. 그 때는 내가 잠시 이성을 잃어서 잘 몰랐어.”

사실 메담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셀린이 없었다 해도 나는 화를 내는 그가 너무 낯설어 존댓말을 했을 것 같으니까.


나는 메담과 밤하늘을 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친구가 되었지만 나는 사실 친구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다. 이제 조금씩 알 것 같다.

메담은 착하기만 한 녀석은 아니다. 화를 내기도 하고 난폭해 지기도 한다. 하녀와 친구가 된 이유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감동적이기까지 한 관대함 때문은 아니었다. 뭐.... 여기서 언급하기에 적당한 얘기일지 모르게지만.... 또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실력 없는 기사다. 이러한 실체를 알게 되자 메담이 어제보다는 덜 굉장해 보이고 덜 빛나 보였다. 하지만 어제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어제 그와 친구가 되기로 한 결정이 다소 충동적이었다면, 오늘 그 결정에 확신을 더하는 과정은 잔잔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메담 스피어. 그는 홀어머니를 여읜 후 비슷한 처지의 고아들과 함께 음식을 찾아다니고 구걸하던 소년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는 윈더민 성에서 지내지 않았다고 말한 건 바로 이런 뜻이었다. 그가 나를 익숙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제 설명이 되는 셈이다. 성 안에서는 우리가 만났을 리가 없지만, 내가 성 밖으로 나갔을 때는 충분히 마주쳤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아무튼 메담은 13세에 우연히 추첨제 응모 메달을 줍는다. 그리고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그 해의 당첨자가 되었다. 성에서 지내게 된 메담은 고민 끝에 기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이 때만 해도 메담은 야망도 품고 있었고 꽤나 의욕적이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출세한 사례들을 보고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란 것이다.


“추첨제로 귀족이 된 사람들 중에 너랑 같은 생각으로 기사가 된 사람이 더 없었어?”

“있었대. 하지만 다들 얼마 못가 그만 두고 다른 곳으로 빠졌대. 워낙 훈련이 힘드니까....”

“하긴 다른 기사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훈련을 계속 해왔으니까.... 그래서 후발주자인 네가 따라잡기가 힘들었던 거구나?”

“.....사실 그래.”

“그래도 람켄 경한테도 지는 건 좀 너무 하지 않아? 기사 수업을 받은 시간도 서로 비슷하잖아?”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메담이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내 멋쩍은 얼굴로 변명했다.

“내가 약한 것도 있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에 진 건 아니야. 람켄은 정말로 잘한단 말야. 아마 우리 또래 기사들 중에 람켄을 이길 수 있는 녀석은 별로 없을 거야. 벨포트 정도면 모를까....”

벨포트.... 왠지 이름만 들어도 싫다. 그가 메담을 표적으로 삼아 계속 괴롭히는 것을 생각하니 더 얄미워졌다. 명문가 출신인 그는 평민이었던 메담이 자신과 동등한 입장인 기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메담을 비난한 말을 되돌아보면 기사의 자격 같은 말들을 주로 언급했었다.

아무튼 메담은 같은 기사들에게 동료로서 인정 받지 못하고, 성 안의 평민들에게는 존중받지 못하며 외롭게 살아왔다. 성 밖의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진짜 귀족들'만을 상대해 온 성 안의 평민들의 눈은 진짜 귀족과 메담의 차이점을 예리하게 가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같은 불편한 처지가 된 메담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바로 당첨되기 전에 함께 거리를 떠돌던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비밀통로를 찾아낸 거야?”

“응. 정말로 운이 좋았지.”

행색이 초라한 그들이 성 안에 들어오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들을 만나는 과정은 꽤 번거로웠다. 그러다 비밀통로를 찾아낸 후로는 약속시간을 정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

메담은 성 안에서 버려지는 음식을 볼 때마다 밖에서 굶주리고 있을 형제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음식을 훔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도둑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있어 생선의 가시처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하지만 진상을 알고 나니 더 이상 그의 행동이 범죄로 보이지 않는다.


“기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인데....”

정작 메담 본인은 부끄럽다 생각하는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결코 후회 하고 있지 않다. 그는 형제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면 이 정도의 위험과 타락쯤은 감수할 수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음식을 훔치지 마.”

“뭐? 안 돼! 걔들 중에는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애들도 있어. 내가 아니면 굶어 죽을 거야!”

메담은 흥분한 모습은 아까 나에게 화를 낼 때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네가 음식을 담다 들키기라도 하면 그건 영락없이 도둑질로 보일 거야. 하지만 내가 하면 그건 자연스러운 광경이겠지?”

내 말을 이해했는지 메담의 표정이 서서히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메리 네가 대신 갖다 주겠다는 거야?”

“대략 오후 8시쯤까지 네 방에 전해주면 되는 거지?”

메담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거듭 고맙다 말했다. 어쩐지 나도 흐뭇하고 가슴이 훈훈해진다.

‘좋은 왕이란 대체 어떤 왕일까?’

바이우스의 물음에 허를 찔린 후 나는 줄곧 그 답을 고민해왔다. 왠지 그 답을 이제야 찾은 것 같았다.

“그 대신 부탁이 있어. 네 방을 담당하는 하녀가 누구야?”

“없어. 청소 같은 건 내가 직접 한다고 했어. 불편해서....”

좋아! 생각보다 일이 더 쉬워지는군.

“그러면 내가 네 방을 맡아도 될까?”

“좋지.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

“혹시 내가 제시라는 하녀장한테 혼나고 있으면....”

“바로 달려갈게.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뭐? 이 자식이 구해줄 생각은 안하고.... 메담은 퍽 구겨지는 내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내가 얘기해서 빼내어 줄게.”

좋았어. 이제 제시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긴 이야기를 마친 메담과 나는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오는 길에 우리는 기사단 숙소 쪽에서 흘러나오는 큰 소리를 들었다. 아무 것도 몰랐을 때였다면 단순한 소음으로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이건 맥스의 목소리였다. 고통스럽게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람켄이 일어난 것 같았다. 메담과 나는 그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인사를 한 후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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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벨포트 : 왠지 이름만 들어도 싫다....?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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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48 바다해미
    작성일
    15.05.20 07:57
    No. 1

    ㅋㅋㅋ 아 아침부터웃고갑니다ㅋㅋ 건필하세요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5.21 03:44
    No. 2

    기분좋게 아침을 시작하신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2 라라.
    작성일
    15.10.24 23:42
    No. 3

    솔직히 아직 여왕으로 자각이 없네요. 성의 중요한 비밀 통로를 일개 기사가 사적으로 사용 하는걸 놔두다니.
    저런 사소한게 쌓에 크게 되는건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10.25 00:53
    No. 4

    메담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면
    휘렌델도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겠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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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의 외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40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3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6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3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2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8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0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7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2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6 39 19쪽
»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2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8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1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1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1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1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2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4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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