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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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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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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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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019

작성
15.04.15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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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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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글자
9쪽

실연의 분노

DUMMY

이 한 마디로 메담이 의심받을 수 있는 정황이 전부 설명이 되어버렸다. 음식물이 담겨있던 자루는 기사가 가지고 다니기엔 너무 낡고 허름한 것이지만, 하녀의 물건이라 하면 별로 이상하지 않다. 하녀의 짐을 기사인 메담이 들고 있었던 이유도 기사도에 부합되는, 신사다운 행동이 되었다. 게다가 저 음식물을 쓰레기라고 내가 선언해버리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둘러댔던 메담의 거짓말도 진실이 되어버렸다.

“너는 또 뭐야?”

벨포트가 신경질적인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소원을 내가 짓밟기라도 한 듯 나를 잔뜩 원망하는 눈이었다. 보통 하녀라면 이런 경우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머리가 숙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벨포트를 더 자극한 것 같다. 눈빛이 한층 더 험악해진다.

“이게 쓰레기라고?”

“그렇습니다.”

사실 지금 벨포트의 눈은 마주보기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이라 하나? 오금이 저릴 것 같은 섬뜩함도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언제든 내 신분을 밝힐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별로 겁이 없었다.


“음식들이 너무 깨끗한데? 그런데 어떻게 이게 쓰레기야?”

“모두 어떤 분이 드시다 남기신 것들입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또 다시 상에 올릴 수 없어서 버리려 했습니다.”

벨포트의 추궁은 집착에 가까웠다. 그는 내가 만든 시나리오를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든 메담을 도둑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어떤 분이라.... 그게 누군데?”

이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높은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휘렌델 여왕님이십니다.”

“뭐라고?!”

이 녀석의 집요한 성격을 생각하면 직접 찾아가 사실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녀석이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고, 만에 하나 그런다 해도 맞장구 쳐줄 유일한 사람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벨포트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나를 압박하던 그 매서운 눈빛을 풀고 황망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짓말 마! 여왕님께서 저 많은 음식을 다 드신단 말이냐?!”

“네!”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생각한 나는 공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지금이라도 함께 가서 확인시켜줄 기세로 말이다.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데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벨포트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그 차갑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이봐, 너! 하녀 주제에 지금 나에게 소리를 지른 건가?”

그래. 이거야. 메담 저 자식이 이상했던 거고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야. 이제 할 말이 없어진 벨포트는 내 태도를 트집 잡아 가두거나 때리면서 화를 풀려 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자 순간적으로 오금이 저려왔다.

이 녀석이 어제 내게 소리를 지른 건 나의 잘못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녀의 발차기에 얻어맞은 메담의 과오를 부각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녀석은 이제 내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품게 된 것이다.

“그만둬, 벨포트!”

곤란한 상황이 펼쳐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메담이 나를 도와주었다. 역시 벨포트가 아직까지 더 미워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메담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쪽을 돌아본다.

“나서지 마. 이 미천한 계집이 감히 내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덤벼들었단 말야.”

“글쎄.... 내가 보기에는 네가 묻는 말에 대답했을 뿐이었어.”

벨포트의 태도는 메담이 아까 맹세의 잔을 마시지 않은 이유를 말하려 한 시점에서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 전까지는 불꽃같은 분노를 메담에게 분출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 같았는데 이제는 아예 말을 섞는 것도 싫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와 놓고도 벨포트는 메담의 시선을 먼저 피해버렸다.


“어제도 그러더니.... 자꾸 하녀들을 감싸는군.”

벨포트가 이 말을 할 때 뒤에 있던 남자들이 나직이 주고받는 말이 들려왔다.

“하녀들? 왜 복수형일까?”

“역시 도련님이셔. 지금 저 하녀가 어제의 하녀와 동일인물이라는 걸 못 알아보신 거야.”

그들의 목소리가 아슬아슬하게 들리지 않았는지 벨포트는 마지막으로 메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빈정거리고 있었다.

“무거울까봐 짐까지 들어주고.... 혹시 저 계집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거냐? 하긴. 너 같은 놈에게는 딱 어울리는 상대긴 하지.”

메담은 고개를 흔들며 벨포트에게 대답했다.

“아니야. 얘가 나를 좋아하는 거야.”

뭐라고, 미친놈아? 대체 무슨 근거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지? 이 자식. 이젠 다리를 걷어찬 게 전혀 미안하지도 않게 됐어. 기사지위를 잃을까봐 구해줬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잠깐? 그런데 왜 나는 굳이 벨포트의 눈에 띄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녀석을 구해줬을까? 이 놈이 음식을 훔친 건 거의 틀림없는 사실인데....

“가자, 론도, 리오.”

벨포트는 그런 얘기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지 두 똘마니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둘만 남게 되자 메담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뱉었다.


“고마워, 메리. 덕분에 살았어. 이렇게까지 날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걸.”

뭐지? 위기의 순간에 내가 도와준 걸 보고 더욱 확신하게 된 건가, 이 자식은? 나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놈은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떠들어댔다.

“하지만 나는 아직 대답할 수 없어. 음.... 이건 너무 갑작스럽다고 할까? 넌 계속 나를 지켜봤겠지만 나는 어제 널 처음 보았는걸....”

하하하. 이것 봐라? 퇴짜 맞아 버렸다. 고백한 적도 없는데 말야. 기분 참 더럽고 좋네? 이 슬픔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이 눈치 없는 자식은 내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것도 모르고 멋대로 지껄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에서 널 계속 주시한 건 사실이야. 분명 너는 나도 너한테 관심이 있어서 보고 있었다고 믿고 싶을 거야.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닥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가운 목소리를 뱉어냈다. 벨포트라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 자리에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지 않았을까. 하지만 메담은 달랐다. 그저 놀라서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이건 다 어디서 훔쳤어, 이 도둑놈아?”

“.... 주방에서.”

녀석은 내게 소리 지르며 화내는 것보다 내 물음에 순순히 실토하는 게 먼저였다. 녀석이 범행을 자백하자마자 나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콧김을 한 번 거칠게 내쉬었다. 그리고 이에 당황하고 있는 메담에게 살며시 걸레를 던졌다.

“닦아.”

메담은 군말 없이 걸레를 받아 바닥에 음식물이 쏟아진 흔적을 말끔히 닦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 눈치까지 비굴하게 살피며 말이다. 지금 이순간은 하녀 메리가 아닌, 원래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걸 쓰레기라고 말한 건 별로 틀린 말이 아냐. 어차피 연회 때마다 이 정도 양은 남아서 버리기 마련이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 순간 나는 벨포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미운 놈이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으니 더 얄미워진다.

“훔쳐서 뭐하려고?”

“....돈 받고 팔려고....”

“누구한테 팔 건데?”

“그건 말할 수 없어. 그런데 지금 너 좀 무서워, 메리.”

나는 녀석의 우는 소리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문을 이어나갔다.

“누구한테 팔 건데?”

“.....”


메담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 찌꺼기를 말끔히 치우고, 벨포트가 베어버린 자루를 수습해서 음식을 전부 갈무리하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행여 얼룩이 남았나 꼼꼼이 확인한 후 메담에게 다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따라와.”

터진 부분을 손으로 누르고 자루를 안은 메담은 내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새하얗게 질렸다.

“메리.... 이제 보니 넌 굉장히 과격한 걸 선호하는 구나? 하지만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그에 앞서 네 마음을 받아줄....”

“그런 거 아니야, 임마!”

아직까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메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 나는 녀석의 팔을 붙잡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더 이상 방해받고 싶지 않다. 아까 이 벽돌을 봤을 때부터 비밀 통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단 말야.

“널 기다린 게 아니라고! 나도 여기 들어오려 한 거였다고!”

비밀 벽돌을 누르자 돌과 돌이 서로 긁히고, 톱니바퀴끼리 맞물리는 소리가 참 상쾌하게 들린다. 메담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멍청하게 날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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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벨포트 : 하녀에게 이렇게나 끌려다니다니... 그야말로 기사의 수치구나!

메담 : 어쩔 수 없잖아? 도둑질한 걸 들켜버렸으니....

벨포트 : ....도둑질한 것 부터가 기사의 수치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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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지드
    작성일
    15.08.21 15:29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8.22 20:27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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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의 외출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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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39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2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5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2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1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7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3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79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6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1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5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7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1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0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0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0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0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2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3 110 12쪽
»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8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1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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