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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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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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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0
추천
83
글자
11쪽

공명

DUMMY

“안타깝게도 놈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제 여왕님을 직접 노리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일망타진해야 할 텐데....”

“알려진 바가 없다고요?”

내가 되묻자 앤디는 죄지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면목 없습니다. 하워드 선왕께서 돌아가신 후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워 한동안 치안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를 감안해도 워낙에 신출귀몰한 녀석들이라.... 예전에 한 번 운 좋게 생존자 한 명을 확보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사흘이나 문초를 받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4일째 되는 날 겨우 배후 인물로 세일란 경을 지목했습니다.”

말을 계속 하는 앤디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저희는 바로 세일란 경을 체포하고 이번에는 그를 문초하였습니다. 세일란 경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계속 외쳤지만 저희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분노하는 자들과 연관되었다는 증거가 줄지어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저희는 폭도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 위해 그를 더 가혹하게 문초하였고 결국 그는 이를 버티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야.... 저희가 찾은 증거들이 최근에 그의 거처에 심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자식들이 세일란 경을 모함했던 거네요?”

“맞습니다. 저희가 속았던 거죠.... 뒤늦게 찾아가 보니 세일란 경을 밀고한 범인은 이미 혀를 깨물고 자결한 뒤였습니다.”

“지독한 놈이었군요.”

“싸울 때도 그 독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우려 드니 생포하기가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습니다.” 아까 전에 나에게 단검을 던진 놈을 생포하지 못한 게 새삼 아까워진다. 그래도 왕에게 단검을 던지려는 찰나였으니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애송이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하겠습니다.”

앤디가 굳게 맹세한다. 수치심으로 가득한 표정이 그가 얼마나 이 때 내 귀에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띨띨한 놈. 어차피 허탕만 칠 텐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앤디의 정령검이었다. 녀석은 원래의 주인인 앤디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불퉁거리고 있었다. 정령이 앤디를 험담하고 있어서일까. 왠지 나도 앤디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정령에게 물었다.

‘허탕이라니? 너 혹시 그 놈들에 대해 알고 있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이 정령검은 앤디가 차고 다니는 물건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그와 함께였다. 그런데도 정령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아까 느낀 그 신비한 감각 때문이었다.

나는 정령검을 통해 이십여 미터나 떨어진 괴한의 모든 것을 느꼈다. 각도 상 절대로 보이지 않을, 그의 등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단검에서 풍기는 희미한 피 냄새는 바로 코를 대고 맡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로 미루어 생각하건데 어쩌면 정령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도 보고 들었을지 모른다.

-뭐야? 너 지금 내가 한 말을 들은 거야?-

녀석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마치 내가 그 중얼거림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투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이 녀석이 중얼거리고 있는 건가? 평상시 하는 말과는, 목소리와는 다르다. 마치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직접 내 머릿속에 주입하는 것 같았다. 담겨 있는 정보의 양도 단순히 단어를 나열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응, 들려. 말해줘. 그 분노하는 자들이 어떤 자식들인지 넌 알고 있는 거지?’

-....알고 있다.-

‘말해봐. 놈들은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야?’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어. 인간은 원래 정향들과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정향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내가 그 괴한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초월적 감각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짐작컨대 정향이라는 건 공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멀리 있으면서도 그 괴한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지각할 때, 마치 그를 둘러싼 공간 자체가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지금 정령검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봐. 그런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마. 우리 정령검들은 정향과 소통하는 능력을 인간을 위해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해봐. 나를 더 다그쳐봐. 이건 너희 인간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다. 이를 이용하면 얼마나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나는 정령의 말을 듣고 손잡이를 꽉 잡으려던 손에 힘을 풀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아니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울림이 정령이 품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내게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진심이었다. 주인의 명령에 불복하다 망가지고 목숨을 잃는 한이 있다 해도 같은 처지의 정령검들과 한 맹세를 지킬 생각이었다. (이는 그들이 자주 접하는 대상인 기사들이 함직한 행동이었다. 지금 대화를 하면서 내게 사무치도록 느껴지는 정령의 마음가짐도 기사들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미안해.’

정령의 생각을 그대로 읽어 들이니 그가 처한 상황을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었고 그러자 내 입에서 절로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다. 정령검들은 인간들을 이렇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었다. 정령이란 원래 구름처럼 자유로운 존재였다. 그래! 구름이란 비유가 딱 어울린다.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는 존재들.... 그런 정령들을 인간들은 차가운 검속에 가두고 영원히 남의 명령에 따르는 신세로 만든 것이다.

-그런다고 내가 알려줄 거라 생각하진 마.-

‘아니, 그런 생각 안 해.’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녀석은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초감각을 이용했다면 말이다. 아무튼 나는 ‘분노하는 자들’에 대해 더 묻는 것을 중단했다. 내 관심도 당장은 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보다 정령검과 나누는 대화에 집중되었다.


‘고마웠어. 아까 나를 구해줘서.’

나는 뒤늦은 감사를 녀석에게 전한다. 녀석이 경고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첫 번째 단검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동시에 이는 굉장히 의아한 일이기도 했다. 녀석이 얼마나 사람들을 싫어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당한 봉변을 생각하면 이 녀석은 오히려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살려준 거야?’

-그 일이 있은 후.... 난 네가 어떤 놈인가 궁금해서 네 과거를 들여다봤어.-

과거를 들여다보다니? 정향과 소통하면 그런 것도 가능하다는 말인가? 정말 놀라운 얘기였지만 믿을 수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정령검들이 주인에게 초감각을 통해 얻은 정보를 주지 않으려는 이유도 새삼 이해가 된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되니까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거구나?’

-...너는 참 특이한 녀석이야. 굉장히 난폭하면서도 여린 면이 있어. 남의 감정에도 곧잘 공감하고. 설마 나를 죽이려 했던 미친년과 공명할 줄이야.-

그 자신도 지금 나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어이없었던 모양이다. 사람으로 치면 쓴웃음을 짓는 것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졌다.

정령의 말을 내가 ‘느끼고’있는 이 현상을 공명이라 부르는 것 같다. 나는 이 것이 어쩐지 음악에서 합주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음색이 다르고 가락이 달라도 같은 박자를 유지하면 서로 다른 두 개의 소리들이 어울려 섞이는 것처럼, 나는 녀석과 공유하는 아주 작은 공통점 때문에 녀석의 초감각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혹시 앤디와는 공명을 해본 적이 없는 거야?’

나는 살짝 앤디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다행히 앤디는 아까의 일 때문인지 창문 밖을 사주경계하는데 여념이 없어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정령검은 화난 목소리로, 아니 화난 감정을 잔뜩 담아 대답했다.

-저 녀석.... 저 검을 얻은 순간부터 나는 거들떠도 안 보잖아. 저런 놈하고 마음이 맞을 리 있겠어?-

정령검이 하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크루거도 어제 푸른 정령검을 찼지만 지금의 앤디처럼 그 감회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사실 기사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검을 내게 선뜻 내준 것도 평소 앤디가 자신의 정령검에 얼마나 불만이 많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건 너한테도 책임이 있어. 솔직히 네가 인간에게 화를 내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너를 여기에 가둔 사람이 앤디는 아니잖아. 앤디 입장에선 네 행동에 불쾌함을 느낄 수밖에 없지. 게다가 저 파란 정령검은 뭐랄까.... 점잖다고 해야 하나?’

-점잖다고?-

‘그런 느낌이야. 너나 천하장사는 화가 난 걸 어떻게든 표출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데. 저 정령검은 잠자코 있잖아.’

-천하장사? 크루거의 검을 말하는 건가?-

내가 크루거의 검에게 천하장사라는 이름을 멋대로 붙인 게 굉장히 재미있었나 보다. 정령은 공명을 통한 울림이 아니라 실제로 웃음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그에게 말해줄 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군.-

사실 나는 이 녀석을 ‘쫑알이’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알게 된 점이 하나 있다. 정령검은 사람의 과거를 들여다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읽어보는 건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네가 메리라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

윽. 진짜였어. 이 녀석 정말로 과거를 읽을 수 있었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윈더민 성에 도착했다. 앤디는 내 상태를 보다 면밀히 진단하기 위해 의사를 부른 후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이 과정에서 쫑알이를 원래 주인인 앤디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초감각이 갑작스럽게 중단되자 어쩐지 허전해졌다. 쫑알이 역시 내 손에서 떨어지는 걸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내가 착각한 건가? 아무튼 첫 번째 ‘여왕의 외출’은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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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루시엘에서의 ‘하급 정령’이

‘정향’이라는 단어로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이 말은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는 마나 중에서

단편적이지만 의지나 의식을 가지게 된 마나를 의미합니다.

영어이름을 붙일까도 생각해봤지만

원체 한글을 좋아하는 제 취향 때문에 ^^;

게다가 ‘일정한 방향성’이라는 뜻이 매우 핵심적인 특징을 설명해주고 있고 

‘정령’과도 어감이 비슷해서 일단 만족스럽습니다.


시저 : 정향에게서 얻은 정보를 주인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고? 난 루시엘에서 리처드에게 모조리 알려줬는데? 월터한테는 강제로 자백하기도 했고....

예니토 : 너는 다른 정령검과 탄생 시기와 과정이 다르잖아. 게다가 악역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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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2 5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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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7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0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6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2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5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8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0 77 9쪽
» 공명 +4 15.04.29 2,691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0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0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3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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