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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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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13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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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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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글자
11쪽

우연

DUMMY

모든 행사가 끝나자 충성 서약식이 진행되었던 그 자리에서 연회가 시작되었다. 충성 서약을 마치고 사기 진작을 위해 왕궁기사단의 모든 기사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다. 비록 잔을 채우면서 대열이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기사들은 건배가 끝날 때까지는 진지하고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음식이 담긴 쟁반이 줄지어 들어오자 비로소 경직된 표정을 푼다.

나는 두 왕궁기사단장 후보들과 함께 상석에 앉았다. 크루거는 아무 말도 없이 얌전히 식사만 하는데, 앤디는 끊임없이 뭔가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그 얘기들이 하나같이 지루했다는 것이다. 회의에서 들은 바로 앤디의 강점은 사교성이라 한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그의 매력은 기사들한테나 통하는 것 같다. 왕궁기사단이 무슨 일을 했고 누구와 싸웠다는 얘기들뿐이라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얼른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기분 좋은 일이 벌어져야 했다. 그리고 내가 윈더민 성에 온 후 유일하게 기뻤던 때는 왕의 방에 있는 비밀통로를 발견했을 때였다. 오늘은 기필코 성 밖으로 나가는 통로까지 찾아내야겠다. 그래야 실수로 가득한 오늘 하루를 그나마 만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아직 나이도 어리신데.... 괜찮으십니까?”

“네? 뭐가요?”

나는 앤디에게 되물었다. 괜찮은지 물으면서 앞에 나이가 어리다는 말을 붙이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까 드신 포도주 말입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예상 외로 주량이 상당하신 모양입니다. 하워드 선왕도 술을 상당히 잘 드셨는데 어쩌면 이것이 바르테인 혈통의 특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 나는 이거다 싶었다. 앤디 덕분에 연회 중간에 돌아갈 적당한 구실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짐짓 굳은 표정을 짓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은 아까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정말입니까?”

묵묵히 식사만 하고 있던 크루거가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앤디도 순간적으로 당황한 얼굴로 나를 응시한다. 술을 즐겨 마시는 건 아니지만 포도주 한 잔에 취한 것은 또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이 내 주량을 모른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후후후....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에요. 아무래도 술에는 익숙하지 않다보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너무 유난을 떨어서 두 사람을 걱정시켜도 안 된다. 괜히 의사를 부른다거나 하면 소동이 더 커질 것이다. 나는 일단 두 사람을 안심시키는 척하며 식사를 재개했다. 그리고 졸음이 쏟아지는 것처럼 슬쩍 슬쩍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앤디가 마침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아무래도 취기가 도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기다렸던 말을 들은 나는 뛸 듯이 기뻤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안타깝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연회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연회보다 전하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크루거는 이렇게 말한 뒤 앤디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회의 마무리는 셔벗경이 맡아주시오. 이런 자리에는 나보다 경이 더 어울릴 것 같으니....”

“알겠소, 스웨이츠 경. 그러면 먼저 여왕님을 부탁드리오.”

앤디는 엄숙한 얼굴로 낮에 스펜서에게 받은 푸른 정령검을 크루거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은 하루씩 번갈아가며 나를 경호하기로 했는데,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망토와 정령검 모두를 착용하기로 한 모양이다. 가지고 있던 망토까지 걸친 크루거는 노드와 똑같은 차림이 되어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방문 앞에 서서 크루거에게 당부했다.

“혹시 성장이 방문하면 내일 이야기 하자고 전해 주세요.

나는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통하는 길을 찾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중간에 다시 방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를 사전에 제거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편안히 쉬십시오.”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 크루거를 뒤로 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나는 미리 챙겨두었던 물수건으로 얼굴을 문댔다.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자 기분이 갑자기 고조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몸에는 힘이 넘쳤다.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은 나는 하녀 메리가 되었다.


비밀통로를 걸으며 나는 콧노래를 부른다. 왕녀의 외출이라 이름 붙인 작전을 수행하며 왕녀의 외출을 부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속으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단지 옷을 갈아입었을 뿐인데 그 전의 우울했던 기분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마치 옷을 갈아입기 전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까지 느껴진다.

쓰레기 창고를 나온 나는 이번에는 주변을 유심히 살핀다. 또 다시 그 마귀할멈 같은 하녀장에게 들키면 곤란하다. 어디로 끌려갈지 모른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야외에서 연회가 열린 만큼 하녀와 하인들이 부쩍 바빠진 모양이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거의 무인지경이 되어버린 남쪽 성채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뭔가를 수색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렇게 좋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나는 의욕적으로 비밀 통로를 찾아 나섰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드디어 열십자와 클로버가 새겨진 벽돌을 찾아내고 말았다!!!


그곳은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 안이었다. 그토록 헤매던 비밀통로를 찾았건만 바로 벽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안에 누가 있는지 어떤 칸에서 뿌연 담배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이 비밀통로의 존재를 눈치 챌 수도 있기에 나는 벽돌을 눈앞에 두고도 누를 수가 없었다. 기쁨의 함성도 지르지 못했다. 나는 이 모든 기쁨을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하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 숨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심부름을 시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에 머리가 훤히 벗겨진 중년의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나는 이를 확인하자마자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 나와 반대 방향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경로로 보건데 그 사람도 화장실에 가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이 누구인지 눈으로 확인한다.


“어? 너는....?”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그 자리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적갈색 머리의 소년기사였다. 아까 시야에서 놓쳤던, 어제 내가 발로 찼던 바로 그 기사 말이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넉살 좋게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 메리? 또 보는구나.”

“....안녕하세요, 기사님.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아하하. 감사는 무슨....”

우리는 화장실 바로 앞에서 쭈뼛거리며 마주 서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분위기가 깔릴 때쯤 그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혹시 화장실 가려는 거야? 그러면 먼저 써. 나는 참을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황급히 외쳤다. 더럽고 민망한 오해를 받는 것에 확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는 여기를 청소하러 왔어요.”

나는 이렇게 얼버무리며 물수건을 꺼냈다. 그것은 화장을 지우느라 얼룩덜룩한 때가 묻어 적당히 더러웠다. 다행히 의심받을 걱정을 한결 덜었다. 나는 그 걸레로 복도 근처의 선반을 열심히 닦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그 기사의 손에 들린 커다란 낡은 자루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에도 저 자루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아아. 그러면 수고해.”

기사는 그 자루를 메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그가 나올 때까지 청소하는 척하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일분 정도가 흘렀다. 어서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한시라도 빨리 그 벽돌을 눌러보고 싶다. 이분 정도가 흘렀다. 아직도 안 나오는 걸 보니 큰 걸 보고 있나보다. 애석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기다리는 수밖에.... 오 분이 지났다. 십 분이 지났다. 이 자식 변비인가? 대충 시도하다 안 되면 그냥 나오지.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끈질긴 녀석.... 다음에도 기회가 있잖아.

십 오분이 지났다. 내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섰다. 이쯤 되면 녀석이 화장실 안에서 실신했다고 가정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들어가려 하는데 마침 그 녀석이 나왔다.

“뭐야, 메리?”

날카로운 물음에 놀란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거렸다.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혹시 너 여기서 날 계속 기다리는 거니?”

이 말뜻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워낙 어이없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녀석의 표정과 말을 종합해보면, 녀석은 장장 15분이 넘는 시간동안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웃긴 놈을 봤나? 구린내를 풀풀 풍기는 주제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아니요.”

나는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녀석은 내 말을 통 믿지 않았다.

“진심을 숨기지 마. 안에서 다 봤어. 닦는 시늉만 할 뿐 전혀 청소하고 있지 않았잖아? 설마.... 여기서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나를 따라온 거였어....?”

기가 막혀서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안에서... 저를 보고 있었다고요?”

“응.”

“기사님은 볼일 보시던 거 아니었어요?”

“.....? 아앗?!!”

정곡을 찔린 녀석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녀석이 볼일은 안 보고 나를 훔쳐보고 있던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녀석의 말대로 우리가 여기서 마주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녀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녀석도 안에서 내가 청소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즉 이 녀석도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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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그러고 보니 1인칭이다 보니 휘렌델의 외모는 한 번도 언급이 안 되었네요.

정해두기는 했지만....

굳이 밝히지 않고 읽으시는 분들의 상상에 맡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앤디 : 여기서 저와 스웨이츠 경의 관계를 이야기 해야겠군요.

크루거 : 왕궁기사단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이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하는 동료 사이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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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2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7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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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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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0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0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3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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