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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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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5.17 07:00
조회
2,378
추천
64
글자
10쪽

그에게 없는 것

DUMMY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걷는 도중 맥스는 끊임없이 발리언트의 상태에 대해 물어왔다. 자신의 멍청함 때문에 애를 보내버렸으니 걱정이 되나 보다. 곧 나는 제발 그가 입을 다물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안 그래도 목소리가 큰 아저씨가 흥분해서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니 이건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람켄 경은 단순히 숙취로 잠든 것뿐이라고 했잖아요. 맥스가 계속 이렇게 입을 열면 람켄 경이 일어나실 지도 몰라요. 잠을 방해받은 람켄 경께서 과연 어떻게 나올까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것 같은 셀린의 목소리였다. 맥스는 그 말을 듣고 람켄에게 덜미 잡힐 짓을 하나라도 줄이고 싶어졌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지금 하녀 메리로서의 정체성에 꽤 이입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셀린의 뛰어난 대처능력에 굉장히 감탄했다. 독방에서 나를 꺼내준 임기응변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쓰러진 람켄의 건강상태를 의서처럼 바로 진단해내고, 저보다 나이 많은 맥스를 도리어 진정시킬 정도로 어른스럽게까지 하다.

나는 셀린에게 동경에 가까운 호감을 품게 되었다. 같은 하녀로서 본받을 점이 참 많은 소녀였다. 뿐만 아니라 셀린에게는 어머니나 혹은 큰 언니 같이 상냥하고 의지가 되는 면모가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는 두 번이나 경험했다. 제시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내 뺨에 약을 발라주었을 때나 방금 전에 맥스를 타이를 때 말이다.


잠시 후 우리는 람켄의 방에 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방 안의 정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내가 본 방 중에서 가장 호화로운 방은 단연 내 방이다. 발리언트의 방도 제법 화려했지만 왕의 방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방에는 화려함 외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방에 있는 가구들이 하나 같이 한 달도 사용하지 않은 새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새 것 특유의 무결함과 정갈함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내 방보다 나아 보였다.

발리언트가 성에서 생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셀린의 말이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다. 아마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람켄 가의 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큰 맘 먹고 장만해준 모양이다.

내가 방에 대해 감탄하고 있는 동안 셀린과 맥스는 완전히 떡이 되어버린 람켄을 침대에 눕히고 있었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혀 새근새근 잠이 든 발리언트는 영락없이 어린애로만 보일 뿐이었다. 셀린이 조심스럽게 람켄의 투구를 벗길 때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참아야 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자른 바가지 머리가 이 꼬맹이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는 람켄의 모습은 솔직히 귀여웠다. 눈도 크고 쌍꺼풀이 진한 것이 강아지와 비슷한 인상이다. 하지만 저 큰 눈을 뜨지 않고 계속 잤으면 좋겠다. 일어나면 또 시건방진 귀족 도련님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람켄 경은 이대로 주무시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그나저나 맥스는 혹시 모르세요? 람켄 경이 왜 저를 찾으셨는지....? 이번에는 뭐가 마음에 안 드셨던 건지....?”

발리언트의 갑옷을 모두 벗긴 후에 셀린이 맥스에게 물었다. 그러나 미련한 맥스는 아무 것도 예상되는 바가 없는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셀린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에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지금부터 나는 이 방을 간단하게 정돈할 거야. 하지만 메리, 나를 도와줄 필요는 없어. 발리언트 경의 요구사항을 너는 잘 모를 테니 말야. 이건 나 혼자 해야 하는 일이야.”

고맙게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셀린이 람켄의 방을 청소하는 걸 구경할 수 있었다. 단지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서 좋았던 것만이 아니다. 서투르게 하녀 흉내를 내다 정체를 들킬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던 나는 이 기회에 셀린이 일하는 것을 면밀히 관찰하기로 했다.

곧 나는 셀린의 기술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시킨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를 반짝 거리며 시종일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경건함마저 느꼈다. 그녀는 하녀다. 윈더민 성에서 가장 낮은 계층에 위치한 하녀다. 그런데도 저렇게 밝은 심성을 유지하고 있고, 힘들고 궂은 작업을 즐겁게 하고 있다. 그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너무 눈이 부셔 보였다.


“람켄 경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제 임의로 방을 정돈했어요. 나중에 일어나시면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한 번 확인해 주세요.”

맥스는 셀린의 말을 들은 후부터 자신의 목소리로 발리언트를 깨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이 되었는지 눈빛으로만 수고했다, 고맙다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곳에서 할 일이 없어진 셀린과 나는 람켄의 방을 나서 복도로 나왔다.

“앞으로 한 동안은 조심해야해, 메리. 오늘은 람켄 경 덕분에 물러났지만 하녀장님은 이번 일로 너에게 앙심을 품으셨을 거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혹시 또 따귀를 얻어맞을 일이 생길 거라는 뜻인가?

“자, 이제 람켄 경의 일도 끝났으니 원래 있던 곳으로 가도 돼. 메리.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중이었어?”

셀린의 질문은 제시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허점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나는 아찔할 정도로 당황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이렇게 답하고 말았다.

“나도 어떤 기사의 방을 전담해서 맡고 있어.”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때 저렇게 대답한 건 그것이 내 희망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람켄은 몹시 까다로운 성격이라 수시로 셀린을 부르며 귀찮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곤경에서 구해준 것도 몇 차례 되는 모양이다. 방금 전 들은 말 때문에 제시의 보복을 두려워하고 있던 나는 같은 행운이 내게도 찾아오기를 순간적으로 바랐던 것이다.

“정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한 번도 널 못 봤지? 나도 주로 기사단 숙소에서 일하는데....”

셀린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이 때쯤에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왜냐면 하녀 메리는 기분 나쁜 말을 툭툭 던지는 발리언트보다 훨씬 더 대하기 편한 기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녀석과 나는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하녀장한테 나 건드리지 말라고 한 번 으름장 놓아달라는 부탁을 부담 없이 없었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도 내 담당이야.”

이 거짓말을 덧붙인 까닭은 내가 하녀 메리가 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장소가 음식물 쓰레기 창고였기 때문이다. 자주 출몰하는 만큼 미리 변명거리를 만들어 두고자 한 것이다. 반쯤은 도박이었다. 만약에 셀린이 음식물 쓰레기 창고를 담당하는 하녀였다면, 혹은 그 일을 하는 하녀들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면 내 거짓말은 들통 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 일이랑 병행하려면 네가 전담한 기사들이 많지는 않겠네....”

“그래 맞아. 한 명 뿐이야.”

일이 잘 풀리려는지 내가 담당하고 있는 기사들의 이름을 거짓으로 지어낼 필요도 없게 되었다.

“누군데?”

“메담 경.”

녀석의 이름을 들은 셀린은 뭔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메담..... 경? 그 종자도 두지 않은 기사분 말야?”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그 점을 생각 못했다. 무거운 철로 만들어진, 불편한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은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일을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드와 크루거 앤디 같은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벨포트와 람켄같은 무보직 기사도 종자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메담의 종자는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메담과 처음 만났던 그 날도 녀석은 혼자 자기 방에 돌아왔었다.

“단 한 명 맡은 기사가 메담 경이라니.... 기분이 어때?”

셀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그 묘한 소외감을 느낀다. 윈더민 성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끼리는 서로 공유하는 정보를 나만 획득하지 못했기에 느끼는 거리감 말이다. 셀린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데 메담은 다른 기사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어떠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셀린은 그 메담의 특별함이 내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나도 메담이 다른 기사들과 다르다는 건 예감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천한 하녀인 메리에게 친구가 되자고 먼저 제안할 정도로 착하다. 칼 같이 도열해 있는 동료들 틈에서 혼자 졸고 있을 정도로 산만하며, 음식을 훔치는 좀도둑인 주제에 자기 신념을 고수하려는 우직함도 가지고 있다. 이 중 셀린이 질문의 기본전제로 깔아둔 특징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 기분은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야?“

라는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메리!”

아무래도 한참동안 나를 찾았던 모양이다. 메담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리고 내가 경험한 바로 그가 절대 짓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분노한 표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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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발리언트 : 그런데 왜 내 성과 이름을 번갈아 가며 부르는 거야? 통일시키지 않고....

맥스 : 그건 작가놈이 발리언트와 람켄이라는 이름 둘 다 마음에 들어하기 때문입니다! 한 캐릭터한테 다 주기에는 좀 아까웠던 모양입니다!

발리언트 : 정말이야?

맥스 : 물론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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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48 바다해미
    작성일
    15.05.17 09:25
    No. 1

    화난 이유는 그 자루를 다른것으로 주었기 때문이겠죠? 저와 사고방식이아주 다른 독특한친구들이 이소설엔 많이 나오는거같네요ㅋㅋ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5.19 23:20
    No. 2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이를 테면 메담이 서약을 받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벨포트가 차갑게 돌변한 건 휘렌델(여왕일 때만)에게 연정을 품었기 때문이죠.
    가끔은 그런 행동 동기들이 숨어 있기도 해요.
    휘렌델만 해도 좋은 왕이 되려는 의욕에 사로잡혀 있지만
    동시에 왕이 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일례로 메담에게 메리의 내력을 설명하면서...
    부모님이 진 빚 때문에 윈더민에 왔다고 말한 건
    부모님께 헌정하기 위해 왕이 된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표출한 거였죠.
    여왕 역할에서 벗어나는 '왕녀의 외출'에 휘렌델이 집착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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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40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3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6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3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2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8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0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7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2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6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2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2 60 16쪽
»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9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8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1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1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1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1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2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2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4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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