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318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5.15 07:00
조회
2,499
추천
59
글자
11쪽

어린 기사

DUMMY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키 자체는 나와 셀린보다 많이 작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 녀석은 아직 어린애다! 유아기 체형의 특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볼에는 아직 보송보송한 젖살이 남아있고 머리가 체구에 비해 크다. 그리고 눈코입이 얼굴 아래쪽에 몰려 있는 것도 어린 아이에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게다가 오른손에 긴 유리병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우유로 추정되는 하얀 액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나도 어렸을 때 종종 먹었던 영양 간식 우유 말이다.

믿기 어렵지만 이 람켄이라는 ‘꼬마’는 확실히 기사인 것 같다. 아까 벨포트가 입고 있었던 왕궁기사단의 갑옷과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동작 하나하나가 절제된 것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헐렁한 메담보다 훨씬 더 기사다워 보인다. 날카로운 잿빛 눈에서는 차가운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마치 육식동물의 눈을 연상케 했다. 왠지 모를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것이, 저 조그만 녀석이 어른 두셋 쯤 가볍게 쓰러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 발리언트 경.”

발리언트가, 저 꼬마의 이름이며 람켄은 성인 것 같다. ‘람켄’ 이라는 가문의 이름을 몇 번 들었던 것이 얼핏 기억이 난다. 원래 나는 다른 사람 이름을 지독히도 못 외웠는데, 요즘에는 이상하게 잘 외워지고 있다. 셀린이 그를 향해 생긋 웃으며 인사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얼른 따라 고개를 숙였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사실 왕인 내가 이렇게 쉽게 머리를 숙일 수 있을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제시에게 뺨을 얻어맞는 봉변까지 당한 이상 내 정체를 쉽게 들키긴 너무 억울할 것 같았고, 오기가 생겨서인지 이런 굴욕도 감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꼬맹이는 나의 공손한 인사에 조금도 응하지 않고 시큰둥한 눈으로 셀린만 흘겨보고 있었다.

“대체 또 무슨 팔푼이 짓을 한 거야?”

목소리도 낭랑한 게 아직 앳된 아이의 것이다. 하지만 듣는 순간 나는 확 불쾌감을 느꼈다. 짜증이 섞인 목소리, 저 착한 셀린을 잔뜩 비꼬는 말투.... 어쩐지 벨포트와 비슷한 오만한 귀족 같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발리언트 경. 지금 뭔가 급한 일이 있으신가요?”

“급하니까 너 같은 걸 찾아다녔지.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아냐?”

와.... 저 꼬마 녀석.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 꼭 저렇게 매몰차게 핀잔을 줘야 하나? 지 큰 누나뻘 되는 사람한테 저 어린놈의 자식이....


한편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직접 경험할 때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제 3자가 되어 람켄과 셀린을 지켜보니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이 된다. 벨포트와 람켄이 유난스러운 게 아니었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하녀들을 대할 때 그들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살짝 긴장된 얼굴로 발리언트의 눈치를 살피는 셀린은 전형적인 하녀들의 반응이었다. 메담처럼 희한한 녀석과 엮인 까닭에 내 기준에 혼란이 왔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은 나의 마음가짐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하녀의 옷을 입는 것을 성 밖으로 나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순간을 기점으로 나는 메리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급적 내가 여왕이라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말이다. 제시에게 뺨을 맞은 게 억울해서인지, 아니면 메담과 셀린이 나라는 인간 자체에게 보이는 호감이 고마워서인지 그 이유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빨리 방에 가서 봐드릴게요. 그 전에 하녀장님의 허락을 받아야 할 텐데....”

제시의 이 말에 대답한 사람은 람켄이 아니었다. 이곳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맥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밖에서부터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제시 눈치는 안 봐도 돼. 도련님께서 방금 혼쭐을 내주셨으니까.”

발리언트의 저 건방진 태도는 제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나 보다. 비록 듣지는 못했지만 저 퉁명스러운 태도와 가시 돋친 말투로 늙은 하녀에게 마구 쏘아붙이는 광경을 상상하니 갑자기 이 꼬맹이가 더 없이 기특하고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벌은 그만 서고 람켄 경의 일을 처리하러 가도 되는 거죠?”

셀린은 일부러 다 들으라는 듯이 밖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주어를 말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여기서 갇혀 벌을 받는 사람은 나인데 맥스와 람켄은 셀린이라고 오해하고 있었고, 자기들 일이 급해서 체벌을 중지하면서까지 셀린을 데려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셀린은 그 상황을 이용해 나를 풀어주려는 것이다.

이를 깨닫자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진다. 이 아이는 정말 착하고 상냥하구나. 나는 지금 왕이 아니라 하녀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내게 잘해주다니....

“내가 다 해결했다고 했잖아. 못 알아들은 거야? 멍청하긴.... 빨리 나와!”

람켄은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하는 셀린의 말이 신중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대해 의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자못 불쾌한 표정으로 쏘아 붙인 후 먼저 나가버렸다. 셀린은 머리를 조아리는 척 하다가 람켄이 나간 후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내게 손을 뻗으며 밝게 웃었다.

“가자, 메리!”

그리고 셀린의 계획이 통하기 위해서는 나도 발리언트의 방까지 따라가야 했다.


나는 셀린과 함께 하녀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큰 방을 거쳐 복도로 나갔다. 제시가 람켄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제시를 보자 약간 기분이 후련해졌다.

나와 셀린은 맥스와 람켄의 뒤를 따라 아까까지 내가 있었던 기사단 숙소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보니 유달리 덩치가 좋은 맥스와 람켄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발리언트 경.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죠? 왜 이렇게 급히 저를 찾으셨어요?”

이렇게 묻는 셀린은 그렇게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몇 차례의 경험으로 이번에도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자신을 불렀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도 셀린이 뭔가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던가 했다면 이 까다롭고 성깔 있는 꼬맹이가 이렇게 얌전히 있을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별 거 아닌 일로 셀린을 귀찮게 하는 것이리라.

람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녀들의 질문에 침묵을 택할 수 있는 것도 귀족들만의 특권일 것이다. 녀석은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병의 마개를 열고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다.

“.....”

한 모금 머금자마자 람켄은 화들짝 놀라며 잔뜩 성난 얼굴로 맥스를 노려본다. 그래 바로 저거야. 이 녀석 성격에, 셀린한테 뭔가 화를 낼 일이 있었다면 저런 표정을 지었을 거야. 람켄은 그런 얼굴을 맥스를 향해 짓고 있었다.

“뭐야? 맥스! 우유가 상했잖아?!”

람켄은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저 자존심 강한 꼬맹이가 저런 표정을 보이는 게 별로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토해내고 싶은데 체신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아닙니다! 상한 거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아니 새벽에 제가 직접 소에게서 짰습니다! 신선한 우유였슴다!”

맥스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면 이거 맛이 왜 이래?”

람켄은 병 입구에 코를 가까이 대보았다. 그리고 마치 냄새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얼굴을 찡그렸다.

“상한 냄새 나잖아!”

“한 번 줘보십시오!”

맥스는 람켄에게서 우유병을 받아서 조심스럽게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뭔가 알아냈는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한 거 아닙니다! 이건 베니큐 냄새입니다!”

“....베니큐?”

“도련님께서 드실 우유라 특별히 신경 썼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직접 우유를 짰습니다! 병도 깨끗하게 씻고 베니큐로 소독했습니다!”

람켄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고 있는데 맥스는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내가 소독약을 먹었다는 말이야?”

“약이 아닙니다! 어떻게 도련님이 입을 대실 병을 약으로 소독하겠습니까? 그래서 베니큐로 소독했습니다! 베니큐는 약이 아니라 술입니다! 먹을 수 있습니다!”

람켄이 황당한 얼굴로 되묻는다.

“술이라고?”

“그렇습니다! 알타메트의 광부들이 힘든 거 다 잊으려고 마시는 독주입니다! 저도 마셔봤는데 뱃속이 홀랑 타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끝내줬습니다! 이런 좋은 술을 도련님을 위해 아낌없이 썼습니다!”

맥스는 이 말을 할 때 칭찬해달라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을까. 람켄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맥스를 노려보며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몇 살인지는 알고 있어?”

“물론입니다! 발리언트 람켄 도련님은 올해로 열세 살이 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한테 술을 먹인 거야? 평범한 술도 아니고 다 잊으려고 마시는 독한 술을?”

맥스는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알콜이 잘 안 받는 체질이셨습니까?!”

람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야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다. 비틀거리다가 필사적으로 벽에 팔을 대고 몸을 지탱한다.

“멍청한 자식....! 바보!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불쌍한 꼬맹이. 좀 더 격렬하게 욕하고 싶은 얼굴인데 어지러워서 더 이상 말을 잇기가 힘든 모양이다. 이를 본 맥스는 당황해서 길길이 뛰어다녔다.

“도련님! 도련님! 정신 차리세요! 의사를 불러 오겠습니다!”

“진정하세요, 맥스. 제가 한 번 살펴볼게요.”

셀린은 한 마디로 맥스를 진정시키면서 새빨개진 람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람켄 경.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숨 쉬기 곤란한가요?”

“아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숨도 제대로 못 쉴 거 같아?”

람켄은 한껏 힘을 끌어 모아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곧 다시 눈이 풀리고 말았다. 셀린은 람켄의 건틀릿을 벗겨 손을 잡아 온도를 확인하고 손목의 맥박을 재었다. 그리고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맥스를 향해 말했다.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단지 술을 마시기에 너무 어렸던 것뿐이니까.”

“정말이야, 셀린?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람켄 남작님한테 죽은 목숨이야!”

“방으로 데려 가서 한숨 주무시게 하세요. 일어나시면 괜찮아지실 거예요.”

셀린의 생긋 웃는 얼굴은 그 말보다 더 큰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이 때 람켄은 이미 곯아떨어진 뒤라 나는 셀린과 함께 맥스가 람켄을 업는 것을 도왔다. 아무리 어린 애라지만 갑옷을 입어 무게가 만만치 않았는데 맥스는 간단히 주인을 들쳐 업었다.




당신의 댓글 하나가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작가의말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세가 많이 호전되어 퇴원하셨습니다.

이제 저도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발리언트 : 나는 개그 캐릭터 아닌데.... 

맥스 :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개그 캐릭터임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왕녀의 외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39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2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5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2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1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7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3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79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6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1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5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7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1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0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0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0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0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2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0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8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3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3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8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1 8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