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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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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24 03:01
조회
2,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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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글자
11쪽

바이우스의 노트

DUMMY

“....아직 모르겠어요.”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은 왕이 어떤 왕인지도 모르시면서 어떻게 좋은 왕이 되실 생각이십니까?”

이미 내가 깨닫고 반성하는 부분을 바이우스는 날카롭게 찔러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듯 변명했다.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는 왕이 좋은 왕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열심히 노력한다는 말이 주는 긍정적 이미지 때문에 나는 은연중 그렇게 믿어왔다. 게다가 나의 나태함이 페나를 망쳤다는 죄책감은 그 믿음을 더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안일한 믿음에서 빠져 나왔다. 노력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약속하지는 않는다. 나는 바이올린을 부순 경험을 통해 잘못된 방향에서의 노력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눈치 챈 걸까. 바이우스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펼치셨던 주장이 좋은 의견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바이우스는 잔인했다. 내가 완전히 저항할 의지를 잃은 걸 확인한 후에야 최후의 일격을 가하듯 묵직하게 선언했다.

“실패로 통하는 길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 나태함은 이미 경험하셨죠? 섣부른 의욕 또한 그 길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장은 내가 얌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적어도 ‘좋은 선택지’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실 때까지는 말입니다.”

바이우스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충고를 던졌다. 저 변하지 않는 표정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더 혹독하다. 하지만 더욱 설득력 있다. 동시에 필요이상으로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있다.

감히 왕 앞에서도 이렇게 자기주장을 당당히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짐작컨대 바이우스 밖에 없을 것이다. 초상화를 그릴 때 스펜서도 귀족들은 내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도 바이우스처럼 내가 지나친 의욕에 사로잡혀 있는 걸 간파했지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했던 것이다.

“알았어요. 그 안목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제부터 회의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게요. 됐죠?”

“감사합니다.”

바이우스와의 토론은 일단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하지만 내게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좋은 왕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좋은 선택지를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더 이상 조급해지지 않기로 다짐했다. 천천히 심사숙고 하면서 생각을 다듬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여쭈겠습니다. 오늘은 무얼 하실 예정이십니까?”

으잉? 이건 또 무슨 짓이야? 저 말이 왜 또 나와?

“바이우스.... 아직 화가 다 안 풀렸어요?”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까도 대답을 드린 것 같지만 저는 화가 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또 그걸 물어봐요?”

“무엇을 하실지 말씀해주셔야 제가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문답을 몇 번 주고받은 후에야 나는 알아차렸다. 바이우스가 나를 갑자기 선택의 기로에 밀어 넣은 건 내게 혹독한 깨달음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게 아니었다. 바이우스도 내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제 깨달은 모양이다.

“어제의 서약식 까지는 하워드 선왕의 승하 후 열렸던 회의에서 결정된 일정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직접 일정을 정하셔야 합니다.”

나는 한 번 넘어갔던 문제에 다시 봉착했다. 아.... 정말 왕으로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차라리 바이우스의 심술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영주 수업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바이우스도 이제 내가 처한 상황을 대충 이해한 모양이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긴 한숨을 쉰 후에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한 뼘 정도 크기의 한 권의 낡은 노트였다. 이 자리에서 바로 꺼낸 것으로 보아 성장이 항상 지니고 다녔을 텐데,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었는지 깃이 아직 빳빳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책장을 주루룩 넘기며 훑어보았다.

공책에는 성에서 열렸던 행사와 그에 따른 준비과정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지금은 6월이고 6월에는 왕궁기사단이 주최하는 사냥대회가 열립니다. 한 번 6월을 찾아보시겠습니까?”

공책 중간중간에는 판지들이 끼워져 있었다. 그 중의 하나를 보니 큼지막한 글씨로 ‘8월’이라고 써있다. 나는 앞쪽으로 페이지를 넘겨 6월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 ‘사냥대회’라고 쓰인 항목을 발견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건 과거를 알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미래를 알기 위해서죠.”

나는 성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공책에는 과거가 아닌 미래가 담겨 있었다. 필요한 물품이 뭐고 몇 개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같은, 성장을 위한 메모도 있었지만 내가 참고할만한 정보도 많았다. 나는 사냥 대회가 보통 6월 17~20일 사이에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 4번의 회의가 열린다는 것도 각 회의에서 결정해야할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필요하시다면 가져가십시오.”

바이우스의 말을 들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너무나도 탐이 나지만 성장이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공책은 지금도 성장이 쓰고 있는 거 아닌가요?”

“괜찮습니다.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있으니까요.”

“그러면.... 정말로 날 줄 거예요?”

“그렇습니다.”

바이우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했다. 백지 상태인 내게 있어 이 공책은 정말로 간절히 필요한 것이었다. 방금 전에 사냥 대회에 대해 알아보면서 여실히 느꼈다. 이런 절실한 물건을 기꺼이 넘겨준 바이우스에게 어떻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번 그 공책을 참고해서 오늘 할 일을 정해 보십시오.”

나는 오늘 날짜 6월 3일을 찾아 지난 몇 년간 이 날 무슨 일을 했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는 답을 찾아냈다.

“....오늘은 노는 날인가요?”

“제가 성장으로 일하는 동안 매년 6월 3일에 선왕들은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그 전례를 따르고 싶지 않으시다면 바르테인력 105년 6월 3일에 새로운 메모를 추가하셔야겠죠.”

갑자기 맥이 빠진다. 헛웃음이 나왔다. 당장 뭔가 해야 하는 줄 알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했는데, ‘아무 것도 안하고 쉰다.’는 선택지도 있었다니.... 마치 농락당한 기분이다.


“좋아요. 그러면 나도 오늘 하루는 쉴게요.”

한 순간에 긴장이 풀리자 왠지 노곤하다. 오늘은 좀 편히 쉬면서 한 번 찬찬히 어떤 왕이 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성장이 넌지시 물었다.

“오늘 쉬시면서 뭐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영감탱이가 또 왜 이래. 이제 그런 종류의 질문은 무섭단 말야.

“오해하지 마십시오. 단지 어떤 취미를 가지셨는지를 물어본 겁니다.”

“왜 갑자기 취미를 물어 보세요?”

나는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그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 성장으로서 제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취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준비 과정이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웰링턴 왕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그 분은 피를 좋아하셨습니다. 6월의 사냥대회도 그 분을 위해 만들어진 행사입니다.”

갑자기 나는 바이우스가 내 취미를 굳이 묻는 이유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왕의 취미 하나 때문에 이런 대규모 행사가 새로 생겨났다니.... 내 취미를 미리 알아두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혹시 잘생긴 남자들에게 관심이 있으시다면 말씀하십시오. 소문나지 않게 모집해드리겠습니다.”

“뭐에요?!”

나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날카로운 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이렇게 점잖은 바이우스가 방금 저런 말을 한 건가? 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잘생긴 남자라니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나 보군요.”

“당연하죠!”

눈살을 찌푸리고 바이우스에게 따지다보니 문득 이건 그를 탓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런 질문을 스스럼없이 하는 건 과거에 겪은 일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시 바이우스가 모셨던 왕 중에....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 있었나요?”

“미인을 좋아했던 왕들은 역사를 돌이켜 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모셨던 왕들 중 대다수도 그랬습니다.”

“....할아버지요?”

“그렇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정말 웰링턴 바르테인은 안 좋은 일에 빠지는 법이 없구나. 다음으로 나는 문득 명목상이지만 약혼자였던 하워드도 궁금해졌다.

“하워드는 어땠어요?”

“하워드 선왕은 이성에게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말요?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어쩌면 다른 취미에 몰두하셨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취미라니요?”

“술을 좋아하셨습니다. 작년 6월 3일에는 대낮부터 하루 종일 술을 마셨었죠.”

윽! 하워드 녀석 나보다 한 살이나 어린 주제에 술을 좋아했다고? 의외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내가 술잔을 비웠을 때 앤디가 하워드의 주량이 대단하단 말을 했었지? 확실히 술을 자주 마시긴 자주 마셨나보다.


“삼촌도 여자를 좋아했겠네요?”

바이우스가 섬긴 왕은 총 3명이다. 그 중 대다수가 미인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하워드가 예외라면 남은 사람은 삼촌뿐이지.

“아주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아주 많이? 바이우스가 이런 말을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좋아했다는 거야?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세간에는 알트론 선왕의 사인이 두창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목숨을 빼앗은 질병은 두창이 아니었습니다. 매....”

“그만 하세요!”

나는 황급히 바이우스의 말을 막아버렸다. 나도 그냥 세간의 사람들처럼 차라리 삼촌이 두창에 걸려 돌아가셨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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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내일은 장거리 운전을 할 일이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연재를 하려 하지만....

장담은 할 수가 없네요 ㅠㅠ

늘 올리는 날이나 요일이 불규칙해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축분 없이 그날그날 쓰다보니

글 쓰는 날을 지정하면 약속을 어길 일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예약 연재 기능을 이용하여

지정된 시각에 글이 올라오게 하는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적어도 올리는 시각만큼은 확실하게 정하는 게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도 더 편리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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