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하루
미닫이 방식의 문이 열리고 화장실 안의 비밀통로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치는 바로 창이 뚫린 쪽의 두꺼운 벽이었다. 또 누군가 와서 시간이 지체되는 게 걱정된 나는 서두르기로 했다.
“빨리 들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며 멍청히 서 있는 메담을 밀어 비밀통로 안으로 처넣은 후에 나는 재빨리 스위치 벽돌을 찾아 눌렀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다시 비밀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그 때 갑자기 메담이 팔을 내 앞으로 뻗었다. 이건 혹시 기습인가? 설마 나를 제거해서 자신의 범행을 은닉하려는 건가? 예상 밖의 공격에 너무 놀라니까 이 천하의 휘렌델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러나 메담의 팔은 단지 어깨 죽지 근처에서 멈추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팔이 인도하는 대로 벽에 완전히 몸을 밀착시켰다.
녀석과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두꺼운 벽의 가운데 비어있는, 매우 비좁은 공간이었다. 즉 옆으로 서서 안쪽 벽에 납작하게 붙지 않으면 닫히는 문에 끼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메담이 나를 배려해준 것이다. 동시에 이는 그 자신이 이 비밀통로의 구조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해?”
이렇게 비좁은 통로는 내가 처음 보는 형태였다. 비밀통로를 이용할 때 나는 완전히 깜깜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이정표삼아 이동했는데, 여기선 그럴 수 없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이 어둠에 적응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오른쪽 방향은 메담이 서서 완전히 내 시야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쪽이 출구일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쪽 방향이야.”
메담도 숨기려고도,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녀석과 함께 비밀통로에 들어온 건 꽤 무모한 일이었다. 메담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기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유일하게 자신의 범행을 알고 있는 나를 제거할 수 있었다. 아까 나의 착각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이 방금 전의 일로 또 한 번 증명되었다.
이 녀석은 정말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녀석이었다. 세상에.... 하녀한테 반말을 들으면서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나보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있을 수가 있지....?
“여기지? 성 안에 있는 사람 중에는 배급되는 음식을 굳이 살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여기를 통해 성 밖으로 팔러 나가는 거지?”
“말할 수 없어....”
메담은 이렇게 말한 후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처벌을 받아도 혼자 받겠다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꽤나 의리 있는 녀석이다. 한 번 화를 버럭 낸 후로 지금까지 줄곧 녀석을 몰아세웠던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다시 말했다.
“이봐. 나는 단지 이 통로가 밖으로 통하는지만 알고 싶을 뿐이야. 네가 누구한테 뭘 팔든 말든 나는 관심 없어. 나는 네가 음식을 훔친 것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것이고 이 비밀통로도 나만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말해줘. 여기로 가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이것이 내 진심이었다. 녀석의 도둑질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던 건 단지 한 번 획득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하녀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존댓말을 하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니까. 그리고.... 녀석이 바닥을 청소하는 동안 심심하기도 했다.
녀석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내 말을 믿어도 될지 고민하는 것이리라. 이윽고 메담은 가만히 내게 물었다.
“왜 밖에 나가려는 건데?”
녀석의 물음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힌다. 내가 성 밖으로 나가려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바르테인의 전당에 얼굴을 남기지 못한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솔직한 소리를 듣고 내가 왕으로서 잘 해나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는 이렇게 대답하는 게 가장 정답일 거 같다.
“안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그랬다. 나는 오늘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무엇이든 간에 내 기분을 풀어줄 만한 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증거로 이 통로가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메담의 말에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성에 들어온 지도 얼마 안 된 거 같던데....”
나는 여기서 열십자와 클로버 무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윈더민 성의 모든 비밀통로를 찾아낼 수 있는 단서를 섣불리 공유할 만큼 이 녀석을 신뢰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저번에 네가 여기로 들어오는 걸 봤어.”
“그래? 조심했는데 결국 들켰나보네.”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녀석의 머쓱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좁은 통로를 따라 게걸음으로 조금 걷다보니 곧 넓은 곳이 나왔다. 비로소 똑바로 앞으로 걸을 수 있게 자세를 바꾸는 사이에 비밀 통로의 구조를 훤히 알고 있는 메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내 앞으로 이동하여 앞장섰다.
“뭐야, 갑자기?”
“일단은 나도 기사니까 내가 앞장설게.”
왠지 그 표정이나 몸짓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좀도둑이 아닌 진짜 기사만이 보일 수 있는 듬직한 얼굴이다. 이 때 나는 기사직을 박탈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서 녀석을 도와준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녀석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그 어떤 기사와도 달랐다. 자신을 통제하는 게 몸에 밴 노드나 크루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만큼 유난스럽지는 않아도 앤디와 벨포트도 몸가짐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는 전형적인 기사였다. 보호받는 입장에선 그들의 이런 절도 있는 태도가 더 없이 믿음직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원래 자유분방함을 선호한 성격인 나와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파악했다. 틀림없다. 만약에 내가 남자로 태어나 기사가 되었다면 이 녀석처럼 되었을 것 같다. 메담도 나처럼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렇지만 기사로서 나름대로의 철학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도를 지키기 위해 충성서약을 하지 않은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기사는 크게 직위가 있는 기사와 무보직 기사 두 종류로 나뉜다. 기본적으로 모든 기사들은 무보직기사에서 출발하며, 거기서 실력을 인정받고 공을 세우면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직위를 수여받는다. 보통 기사들은 100명의 병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백인대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인대장, 대대장을 거치면서 진급을 거듭하다보면 비로소 다른 기사들에게까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연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상급기사들은 다시 말해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무보직 기사들은 이러한 지휘관들의 명령을 따르는 역할이다. 이들은 ‘정예병’이라 불리면서 막강한 전력으로 분류되지만 실상 그 권한은 일반 병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보통 젊은 기사들이 경험을 쌓기 전에 거쳐 가는 단계인 것이다.
메담은 현대 왕인 나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았고 이를 벨포트가 알게 되었다. 그 애송이 자식이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할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메담은 평생 무보직 기사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한 것이다.
잠깐만. 생각해보니 열 받네? 이 자식.... 차라리 출세길이 막히는 걸 택할 만큼 나한테 충성하기 싫었다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은 거야?”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물었다. 녀석은 내가 폭발하기 직전인 건 꿈에도 모르는 채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기사는 맹세를 하면 목숨을 걸어. 하지만 여왕님은 내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사람 같지 않았어.”
“대체 왜?”
“....그건 말할 수 없어. 벨포트의 말이 맞아. 나 혼자 생각하는 건 몰라도 남에게 이걸 말해주면 이 부정적 인식을 나눠가지게 돼. 충성서약은 하지 않았지만 난 여전히 왕궁기사단의 기사고, 바르테인과 여왕님을 위해 싸우는 입장이란 말야. 섬기는 군주를 험담할 수는 없어.”
지금까지 녀석이 침묵을 지키는 몇 가지 경우처럼 이번의 태도도 단호했다. 도둑질한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그 이유를 알고 싶은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본다.
“.... 나도 여왕님을 싫어해.”
“으음?”
“사실 지금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 것도 다 여왕님 때문이야”
“무슨 일인데?”
“나는 원래 페나라는 곳에 살았어. 철쭉과 패랭이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곳이었지. 나는 그곳의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걸 너무 좋아했어. 그런데 갑자기 윈더민 성에 끌려오게 된 거야. 그래서 언제나 이 갑갑한 성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거짓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정말이야? 강제로 데려왔다고?”
이 순간 나는 매양 실없는 웃음을 띠고 있던 메담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이는 적지 않게 놀라운 일이었지만 이미 시작한 거짓말을 중도에 멈출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저런.... 안됐구나, 메리....”
흥분을 가라앉힌 메담이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하녀로서는 당장 그의 배려를 받고 있지만 왕으로서는 한층 더 미움을 사게 된 내 심경은 참으로 복잡해졌다.
“너도 알려줘. 너는 왜 여왕님을 싫어하는 거야?”
녀석은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채근했다.
“이봐. 나는 이미 여왕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네 얘기를 듣고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이렇게 말한 후에도 메담은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결론을 내렸는지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약식 내내 표정이 어두우셨거든.”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충격으로 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랬다. 나는 오늘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그 최악의 하루가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이 최악의 하루 내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걱정이 된 스펜서가 일부러 찾아올 정도로 말이다.
“동료 기사들이 수근 거렸어. 여왕님께 무슨 일이 있냐고. 그러다 보니 여왕님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하는 자리가 걱정하는 자리가 되어버린 거야. 나는 왕이라면 자기감정을 드러낼 때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로 인해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성안의 나이 많은 사람들 하는 말을 들었는데, 웰링턴 선왕이 계실 때도 그랬대. 왕의 기분이 어떨지 눈치 보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었다는 거야.”
녀석의 말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들쑤신다. 하마터면 그만하라고 소리칠 뻔했다. 최근에 내가 가장 싫어하게 된 사람인 할아버지와 똑같은 짓을 했다니....
“난 단지 여왕님이 내가 목숨을 바쳐 지키기에는 너무 가벼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메리 네 얘기를 들으니.... 인간적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네.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메담이 말을 끝마쳤을 때 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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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1년 전보다 더 그들의 죽음을 추모합니다.
오늘 같은 날조차
내 돈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인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의 목숨보다 다른 걸 먼저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때문에
구할 수 있는 목숨을 구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반성해봅니다.
삼풍 백화점, 성수대교.... 다음에는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 때는 누구의 차례가 될까요....?
유가족들 중에는 부자도 있었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야말로 무작위로 선출된 집단이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압축입니다.
단지 공통점이라면 단 하나 뿐이지요.
그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된 건 그 공통점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비자발적으로 결성된 그 집단의 사람들 전부가 원래부터 자식팔아 돈 벌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다?
그들을 욕한다는 건 그 상황에 처한 자기 자신을 욕한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하나 같이 자식팔아 돈벌려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 분노해줄 수 있어야 그 사회는 정의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1년 전에는 그 어린 애들의 죽음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미안합니다.
무엇보다 생명을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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