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338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28 07:00
조회
2,510
추천
69
글자
12쪽

분노하는 자들

DUMMY

순간적으로 어젯밤의 기억이 징그러운 벌레처럼 온 몸을 훑으며 지나갔다. 나는 무력했고 겁에 질려 있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행이 다가오는데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의 인생에서 가장 암담한 심정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불꽃같은 분노에 휩싸였다.

“야!”

내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지자 내게 손을 흔들며 환호하던 윈더민 시민들이 일제히 꿈에서 깨어난 표정으로 놀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썩을 놈! 나를 강제로 붙잡으려 한 놈! 저 거무튀튀한 이빨자식이 내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차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뒤에 남은 녀석의 얼굴이 점점 작아지고, 인파 속에 파묻혀 간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여왕님!”

앤디의 황급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걸 들은 후에야 나는 내가 마차의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려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컥 하고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갑옷을 입은 앤디는 나처럼 좁은 창문을 통과할 수 없었나보다.

“우와아!!!”

“여왕님!!”

놈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가는데 시민들의 함성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어머니와 외할아버지한테 들켰다면 족히 일주일은 잔소리를 들었을, 나의 이 조신하지 못한 행동에 ‘놀라서’ 지르는 함성 같지가 않았다. 그보다는 마차의 창문으로 뛰어내린 나의 묘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소리였다.

사실 내게 이런 사실들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의 모든 감각은 저 썩은 이빨을 놓치지 않는데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말을 타고 마차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도, 그 중에 벨포트가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나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냈지만 개중에는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노리는 그 자식도 잠자코 나를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옆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놈은 이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처럼 마차에서 뛰어내려 질주하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연히 녀석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놀랐다. 하지만 애써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고 태연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내게 원한을 산 일이 없었던 만큼, 자기가 뭔가 착각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시시각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내가 놈을 태워죽일 것 같은 눈빛을 쏘아내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비로소 녀석의 동공이 흔들리며 몸이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갑작스럽게 닥치니 도망칠 생각도 안 나는 모양이다.

바로 어제 내가 저랬었다. 그렇지만 하루 만에 입장이 바뀌어 내 옆에는 든든한 기사들이....

“진정하십시오, 여왕님!”

말을 몰아 내 앞길을 가로막았다. 기사들은 원래 내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충직하고 든든한 사람들이지만 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단호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들의 단호함이 내게 걸림돌이 되었다. 내가 기사들 때문에 한 박자 늦춰진 틈을 타 그 썩은 이빨 자식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나는 다급히 손가락을 뻗어 녀석을 가리켰다.

“저 자를 잡아요! 빨리!”

내가 기사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을 때 놈은 이미 인파를 헤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나 또한 기사들이 그 쪽을 보는 틈을 타 다시 질주를 시작했다. 녀석이 있는 방향을 향하다 보니 자연히 대로 양옆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의 벽을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기사들은 녀석보다 나를 보호하는 걸 우선하려 했지만 말에 타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길을 비켜줄 때까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녀석의 뒤를 쫓아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문득 오른손에 감촉이 느껴진다. 바로 앤디의 정령검이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욱하는 마음에 이 녀석을 잡아 쥐었던 것이 비로소 기억난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 이 때에 갑자기 이 녀석의 존재를 눈치 챈 이유는, 손잡이를 통해 녀석이 무언가 애타게 말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른손에 잠깐 감각을 돌려, 검신 깊숙한 곳에 머물러 있는 정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녀석은 외침은 날카로웠다.

“조심해!!”

단지 말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정령검이 느끼는 감각과 공명을 이루었다. 그것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신비한 기분이었다. 시각과 청각의 중간 쯤 되는 낯선 감각을 느꼈다. 그 감각은 원래는 나에게는 없는 기관으로 정령검이 느끼고 있는 것이며, 나는 단지 이를 구경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감각이 지금 8시 방향에서 누군가 나를 단검으로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불의의 암살자가 내가 달리는 속도까지 계산하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급히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피슛!”

단검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음 순간 방금 내가 죽을 뻔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면서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다. 썩은 이빨의 발자국 소리는 멀어져 가고 있는데 더 이상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단검을 던진 녀석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썩은 이빨과 방금 전까지 말을 나누던 남자였다. 그는 첫 번째 공격이 빗나가자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품에서 또 다른 단검을 꺼냈다. 괴한과 나의 눈빛이 마주친다. 그는 불꽃같은 분노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자식 정말로 왕을 죽일 생각이다!


놈의 눈은 이제 더 이상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내게 저 시퍼런 단검을 꽂을 수 있는 각도를 계산하느라 서서히 기계적인 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더욱 섬뜩한 사실은, 정령검과 감각을 공유하면서 녀석이 오차를 줄여가고 있다는 걸 내가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 몸은 그 남자와 이십여 미터 떨어진 이 곳에 있지만 또 하나의 감각 기관은 바로 그 남자의 옆에서, 아니 공기처럼 그 남자를 둘러싼 채 그의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세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이 위기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이 정령검과의 교감뿐이었다. 저 괴한이 언제, 어떻게 단검을 던질지, 그 결과 단검이 어떠한 궤도를 따라 날아올지 나는 즉시 알 수 있다. 남자의 팔이 움직인다. 나는 정령검과 보다 더 깊이 교감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단검이 그의 손가락을 떠나는 순간이 승부처였다. 날아오는 궤도를 예측하고 최대한 미리 피해야 한다. 나는 언제 어느 방향으로든 뛸 수 있도록 온 몸의 근육을 잔뜩 수축시켰다. 그리고 괴한의 팔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켰다.


마침내 녀석이 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단검은 발사되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제 3자가 등장했다는 걸 깨닫는다. 바로 벨포트였다. 단검을 던지기 전에 그의 검이 괴한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벨포트는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을 능숙하게 선회시키면서 황급히 물었다. 나는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다친 곳이 없었지만 심적으로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 단검의 남자. 나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나를 죽이려는 살의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 수도 윈더민에 나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믿기 싫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벨포트는 말에서 내려 내 옆에 서서 혹시 있을지 모를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정령검을 들고 있는 나는 다른 암살자가 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벨포트는 내가 메리일 때 만났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이 사실에 안도하며 그에게 말했다.

“스미스 경.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여왕님.”

“이 자가 저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윈더민 주민들에게 알리지 말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수도 한복판에서 왕인 내가 누군가의 손에 죽을 뻔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대중에게 알릴 수 없었다. 지도자는 아랫사람이 두려움, 혼란스러움, 분노, 걱정, 슬픔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어제 메담에게 배우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처럼 침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앤디가 새파란 얼굴로 뛰어왔을 때 오히려 내가 그를 진정시켰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윈더민 나들이는 이것으로 끝내게 되었다. 앤디는 몇몇 근위병들에게 그 시체를 가져오도록 지시한 후에 마차를 돌렸다.

“아까 지나가면서 그 썩은 이의 남자와 그가 하는 말을 얼핏 엿들었어요. 뭔가 안 좋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경솔하게 마차 밖으로 뛰어나간 것을 누차 사과하며 적당한 이유를 앤디에게 둘러댔다. 앤디는 한숨을 쉬며 내게 대답했다.

“..... 이 자는 ‘분노하는 자들’의 일원 같습니다.”

“‘분노하는 자들’요? 이 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왜 내 목숨을 노리는 거죠?”

무턱대고 마차 밖으로 뛰어나간 내 행동이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왕을 죽이려는 자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한 적이 없기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사실 나는 하녀 메리가 아닌 휘렌델일 때 이렇게 목숨이 노려져서 제법 큰 충격을 받았다.

“저도 놀랐습니다. 이 자들이 윈더민 성에서 거주하는 사람을 노리는 과격 집단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설마 여왕님을 직접 해치려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성에 거주하는 사람을 노려요?”

내가 이렇게 되물은 까닭은 어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 썩은 이빨의 남자는 분명 내가 윈더민 성 안의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제 하녀 메리를 노렸던 것 같았다.

“라울 경도 전에 한 번 이 자들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라울 경도 습격당했었다고요?”

“때 마침 견습 기사 하나가 동행하고 있어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그 뒤로 기사단에서 특별히 호위를 해드리는 중입니다.”

“그런데 왜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노리는 거죠?”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하나 예외없이 도개교 선언이라는 것을 합니다.”

어제 메담과 했던 말이 나오자 나는 더욱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도개교 선언에 대해 배우게 될 줄이야.

“윈더민 성 안에 사는 사람 외 어느 누구에게도 성의 구조를 알려주지 않겠다는 맹세가 바로 도개교 선언입니다. 사실 왕성의회와 기사들은 명예를 중시하는데다 윈더민 성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입장이니만큼 절대로 발설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녀와 하인들은 그 입장이 조금 다르죠. 아무리 성장이 그들의 입을 단속한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에 하나 발설하더라도 전체 구조가 유출되는 경우를 막기 위해 하녀와 하인들은 윈더민 성의 지정된 장소에서만 활동하게 하고 있습니다.”

“.... 그러면 ‘분노하는 자들’의 최종목표는 윈더민 성 내부로 잠입하는 거란 말이네요?”

“바로 보셨습니다, 여왕님.”

앤디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댓글 하나가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작가의말

썩은 이빨 : 원래 ‘이빨’은 짐승에게 쓰는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라고 해야죠.

휘렌델 : 나도 맞춤법 알고 있는데? 앤디한테 말할 때는 썩은 이라고 했는데?

썩은 이빨 : 그럼 본문에서는 왜 계속 썩은 이빨이라고....?

휘렌델 : 욕한 거야 ^^

썩은 이빨 : 아 그렇군요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왕녀의 외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39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3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6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2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2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8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0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6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2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6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8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0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1 83 11쪽
»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1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1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4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