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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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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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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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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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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여왕의 외출

DUMMY

이때까지 전대 왕 중에서 내가 가장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은 할아버지인 웰링턴 바르테인이었다. 그런데 이 한 번으로 삼촌이 따라잡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철이 들 때 바르테인의 왕이었던 알트론 바르테인은 내게 있어 ‘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돌아가셔도 하필 영 좋지 않은 병에 걸려서 돌아가셨다니.... 가족으로서 정말 부끄러운 동시에, 여자로서 혐오스럽다.

“성 안의 사람들도 알고 있나요? 왕성의회는요? 작위의회는요?”

“하워드 선왕은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겼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시점에서는 저희 둘 뿐입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문득 바이우스에게 매우 부끄러워졌다. 할아버지는 피를 좋아하는 폭군이었고 삼촌은 호색한, 그리고 하워드 그 어린놈의 자식은 술고래였다 한다. 바르테인 가의 이런 뒤틀린 욕망을 제 3자인 바이우스는 바로 옆에서 지켜봐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주셔도 되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준비해 드릴까요?”

“아무 것도 준비 안 해도 되요. 굳이 말하자면 제 취미는 산책이에요.”

나는 내 취미가 매우 건전한 것이며, 돈도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 아무 것도 준비 안 해도 된다는 부분을 특별히 강조했다.


“....여전히 성 밖을 나가시는 걸 좋아하시나 봅니다.”

바이우스가 이런 말로 응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업무에 관련된 얘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나도 보다 사적인 얘기를 그에게 꺼냈다.

“제가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게 성장에게는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가 봐요?”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에도 종종 성 밖으로 나가시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죠.”

크윽...! 결과적으로 바르테인 중에서 자기 취미 때문에 바이우스를 가장 괴롭힌 사람은 바로 나였구나. 더구나 그 당시는 그 무서운 폭군인 할아버지가 왕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성 밖을 나가는 걸 좋아하냐고 물은 건 그 때 맺힌 응어리 때문이었나.


“그러면 혹시 오전에 외출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바이우스의 물음에 나는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간 바이우스가 방 밖에서 잠깐 멈춰 앤디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이를 보면서 그에게 선물 받은 공책을 제왕학 서적의 맨 위에 올려 두었다.

그 공책은 마치 어둠 속에서 나아갈 길을 비추어 주는 횃불 같았다.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함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이 공책 하나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저 유능한 바이우스의 비결을 전수받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 없이 든든했다. 쓸데없이 비장해질 필요도 없고 아무 걱정도 없이 마음 편히 산책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방문 밖에서 앤디가 나들이를 준비하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온다. 그는 크루거가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왕궁기사단장의 검을 사용해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차기 왕궁기사단장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명망 높은 두 기사들인데 어지간히 그 검을 써보고 싶었나보다. 삼촌뻘 되는 그들이 왠지 귀엽게 보여 헛웃음이 쿡쿡하고 나왔다.

내 마음은 내리쬐는 햇빛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뜰에 나가서 나를 호위하기 위해 도열해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보다 정확히는, 여덟 명의 기사들 틈에 끼어 있는 벨포트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즉시 얼굴을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혹시라도 저 애송이 자식이 나를 알아보면 어쩌지?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살짝 눈길만 돌려서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의미심장한 눈을 보니 녀석은 내가 하녀행세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잠깐만? 벨포트의 저 눈빛.... 계속 보다 보니 좀 이상했다. 뭔가 눈치 챘기 때문에 저렇게 빛나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보다 저 눈빛은 뭐랄까? 강한 동경이 담긴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니 깜빡이지도 않으면서 나를 주시하는 그의 시선이 갑자기 엄청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저 사람은 왜 나를 노려보는 거죠?”

나는 바로 옆에 나란히 걷고 있던 앤디에게 몰래 일러바쳤다. 뒤늦게 발견한 앤디가 당황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저 애송이의 눈빛에 내가 과민반응을 보인 건 아닌 것 같다. 곧 벨포트는 앤디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겨우 시선을 나에게서 돌렸다. 요 며칠 녀석에게 악감정이 쌓여서일까. 나는 매우 통쾌한 기분으로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했다.

이 중에 혹시 내 친구도 있으려나? 나는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안타깝게도 동행하는 기사 중에 메담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어서 마차에 올랐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원래는 마차를 보는 즉시 필요 없으니 치워달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벨포트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하여간 정말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어디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마차에 따라 오른 앤디가 묻는다.

“....윈더민 번화가 쪽으로 가 주세요.”

사실 내가 정말로 가고 싶었던 곳은 경치 잫가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산이나 계곡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시가지 쪽으로 방향을 정한 건 어제 일 때문이었다. 위험한 자들을 만나는 바람에 윈더민 구경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찝찝한 느낌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마음껏 걸을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이번 외출은 차선일 수밖에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밀린 숙제를 끝내는데 이번 기회를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목적지가 정해지자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이십여 명의 병사들이 행군을 시작하고 여덟 명의 기사들은 반씩 나누어 내가 탄 마차를 앞뒤로 둘러쌌다. 나는 슬쩍 창문으로 벨포트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마차의 뒤쪽이었다.

그 때 갑자기 앤디가 말을 걸어왔다.

“여왕님께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가요?”

“제 검 말입니다.”

앤디는 환하게 웃으며 셔벗 가의 문양인 하얀 말의 모양이 양각으로 튀어나온 정령검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차렸다. 일전에 내가 혼쭐을 내준 후로 그의 정령검은 더 이상 사람들을 도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앤디는 그에 대해 감사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제 느낌인데.... 이 망나니 같은 녀석이 여왕님을 굉장히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요?”

“여왕님 앞에 있을 때는 뭔가 느낌이 다릅니다.”

직접 정령검을 잡아 본 나는 앤디가 단지 추측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뿌듯한 보람을 느낀 나는 앤디의 말이 사실인지 직접 녀석의 반응을 느껴보고 싶었다.

“한 번 줘보시겠어요?”

이미 마음이 왕궁기사단장의 푸른 정령검에 가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왕의 명령이기 때문일까. 앤디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그 귀하다는 자신의 정령검을 내게 내밀었다. 손잡이를 쥐자마자 녀석이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 그 동안 잘 있었어?”

“....그래.”

정령검의 목소리에는 독기가 쫙 빠져 있었다. 반면 나는 전에 이 정령자식이 그랬던 것처럼 빈정거리는 말투로 녀석에게 말했다.

“앤디에게 들었어. 나한테 꽤 쫄았다면서?”

“.....쳇!”

만일 녀석이 거짓말을 한다면 손잡이를 쥐고 있는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녀석은 차마 부정은 하지 못하고 투덜거리기만 하는 것이다.

“정령이 두려움을 느낄 줄은 몰랐는걸?”

“정령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죽음을 피하고 싶은 건 어느 생명체나 마찬가지잖아.”

이렇게 녀석을 놀리면서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을 때 마차는 시가지에 접어들었다.


낮에 본 윈더민은 더욱 더 화려하고 웅장했다. 어제 내가 본 불한당들.... 이 도시의 어두운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말이다. 정령검을 내려놓은 나는 마차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서 내가 다스리는 도시를,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는 마차를 멀리서 봤는지 거리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길 양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누군가가 행차했다고 외치는 소리가 곳곳의 골목에서 메아리쳐 나온다. 나는 이를 보며 ‘왕녀의 외출’을 통해서는 들을 수 있는 얘기를 이 ‘여왕의 외출’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누가 왕의 허물을 입에 담겠는가.

“휘렌델 여왕님 만세!”

“바르테인의 구세주시여!”

반면 이런 소리들은 여왕일 때만 들을 수 있겠지. 나는 몹시 기분이 좋아져서 아예 창밖으로 한쪽 팔과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에 기쁜 표정과 손짓으로 호응해주었다. 마차가 다니는 도로의 양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중에서 나는 눈에 익은 남자 하나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어디서 본 사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다 마차가 그를 지나친 후에야 나는 그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녀석이 옆에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슬쩍 입을 벌렸기 때문이다. 그의 앞니 중의 하나는 새카맣게 썩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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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예약 연재는 처음으로 시도해봅니다.

자고 일어나야 확인할 수 있을텐데 잘 될지 모르겠군요.

성공했다면 여러분은 이 메시지를 읽고 계시겠죠?

앞으로 제가 그날 분량을 다 작성했을 경우 (이 조건이 중요합니다^^;)

새 글이 올라오는 시각은 아침 7시가 될 겁니다.

프롤로그를 기억하신 다면 그 이유를 아실 것 같습니다 ^^;

 

벨포트 : 가만 보면 내가 메담보다 비중이 높은 것 같아. 메담이 나올 때마다 같이 나왔고, 녀석이 나오지 않을 때도 나왔으니까.

메담 : 아 그렇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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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48 바다해미
    작성일
    15.04.26 22:30
    No. 1

    어. 체포하라고 해야될거같은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28 02:06
    No. 2

    휘렌델이 그렇게 할까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윤재현
    작성일
    15.04.27 00:12
    No. 3

    항상 재밌게 읽고 갑니다 작가님! 루시엘은 저의 철학관이 맞지 않아서 읽으면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아주 재밌게 읽었어요. 이번 작품은 루시엘에서 계속 언급되던 휘렌델 이야기고, 아직 여왕 자리가 어설프가만 한 휘렌델이 어떻게 훌륭한 여왕이 되는 지 기대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28 02:09
    No. 4

    루시엘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학관과 맞지 않으시다니 더 기쁩니다.
    루시엘은 '열린 결말'이 아닌 '열린 결론'을 목적으로 쓴 소설이었으니까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4 동방현자
    작성일
    16.12.08 04:50
    No. 5

    루시엘이라.. 시간날때 봐야겠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6.12.08 15:14
    No. 6

    개인적으로는 루시엘을 먼저 읽으시길 권합니다 ^^;
    왕녀의 외출 결말을 아시게 된다면 루시엘의 주인공들이 한심하게 보일 수 있거든요....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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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의 외출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39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3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6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2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2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8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0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6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2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6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8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0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1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0 69 12쪽
»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1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4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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