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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320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23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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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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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글자
8쪽

명군의 길

DUMMY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문을 열고 밤을 새며 내 방을 지켜준 크루거와 짧은 인사를 나눴다. 노드가 그랬던 것처럼 크루거도 간밤에 내가 어딘가 다녀왔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여왕님께서 일어나셨다.”

크루거의 이 말은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푸른 정령검이 신비한 마법으로 여기서 그가 한 말을 다른 곳에 있는 하녀와 그의 종자에게 전해줄 것이다. 크루거가 처음으로 왕궁기사단장의 검을 사용해보는 순간이었다.

크루거와 교대해줄 앤디, 이 두 기사의 시중을 드는 종자들, 매일 아침 나를 치장해주는 하녀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도착했다. 바로 이들이 화장을 지우고 메리가 되었을 때 내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들의 얼굴을 새삼스레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았다.

간밤에 메리가 되었던 후유증은 또 있었다. 원래 나는 화장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휘렌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상시와 기분이 다르다. 안나가 분을 칠해주는 부분부터 차례로 휘렌델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바이우스는 화장이 끝나고 의복을 입고 치장하는 것까지 모두 끝난 후에야 들어왔다. 처음에 윈더민 성에 왔을 때였다면 우연찮게 시기가 맞아 떨어졌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번의 경험으로 이제는 알고 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정교하게 시간을 계산한 결과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정중하게 인사했다. 매일 만나는 성장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사뭇 긴장이 된다.

‘어차피 제 말은 귀담아 들으시지 않으니까요’

어제 이 말을 할 때 그는 내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에 나 역시 조금 마음이 언짢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나도 화가 난다. 나는 이 복잡한 감정을 실어 조심스러우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의 일정은 무엇이죠?”

바이우스는 즉시 대답했다.

“없습니다.”

“뭐라고요?”

나는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오늘은 아무 것도 안한다는 뜻인가요?”

바이우스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장이 방문한 이유는 오늘 일정을 보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요?”

“제가 방문한 이유는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지 여쭙기 위해서입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가 말장난을 하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날의 일정을 나에게 알려주는 게 당신이 할 일 아니었어?

“오늘의 일정은 무엇입니까?”

저거 방금 내가 했던 말이랑 똑같잖아! 혹시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내 말을 따라한 건가? 표정이나 목소리로 보아서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열은 받는데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다.



순간 치밀어 오른 화를 이렇게 억누르고 나자 이제 그의 물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오늘 뭐할 거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머릿속이 그야말로 새하얬다! 영주 노릇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가 왕으로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정하겠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초조해하고 있던 나는 문득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통해 혼란스럽고 짜증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메담에게 들은 얘기가 있어서일까. 이런 감정은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바이우스처럼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해보았다.


“아직도 내게 화가 나 있는 거예요?”

지금 내가 느끼는 심정은 어제 회의 때 크루거와 앤디 중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와 비슷했다. 나를 그런 난처한 상황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바이우스인 만큼 지금 이것 역시 그의 화풀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바이우스는 뻣뻣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왜 화를 내겠습니까?”

“성장의 충고를 무시했으니까요.”

“제 충고라니요?”

“어제 많은 걸 깨달았어요. 노드를 기사단장으로 지지하려면 그를 먼저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어요. 성장이 말한 대로요. 회의의 흐름을 바꾸려면 회의장 밖에서 하는 준비가 더 중요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 순서를 지키지 않았죠.”

바이우스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성장이 무슨 말을 할 지 고민하는 일말이다.

“.....순서를 지키지 않은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이틀 연속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게 문제입니다.”

“놀라게 한 게 문제가.... 되나요?”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내가 이틀 연속으로 회의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귀족들을 놀라게 한 게 더 문제가 된다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이우스는 자기 말을 무시한 것보다 그게 더 화가 났던 걸까?

“대개의 사람들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 놓이는 걸 싫어하죠. 귀족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이 뜨끔했다. 지금 내가 화제를 바꿔 어제 얘기를 꺼낸 데에 갑자기 일정을 스스로 정해야 하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목적도 컸으니까. 나는 이런 속셈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성장에게 따졌다.

“그러면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요? 귀족들을 놀라게 하지 말고?”

“바로 그렇습니다.”

바이우스는 에메랄드빛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아주 미세한 변화이지만 바이우스에겐 그것이 굉장한 강조의 방법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격앙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왕이에요! 그런데 회의를 구경하고만 있으라는 말인가요?”

“차라리 구경만 하시는 게 더 낫습니다! 먹히지도 않을 의견을 내놓을 바에는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뭐지? 지금 바이우스가 소리를 지른 것 같은데? 방금 전 이건 바이우스 치고 목소리를 크게 낸 수준이 아니었다. 일반 사람들이 화를 낼 때와 똑같은 고함이었다. 바이우스는 별 변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도 꽤 놀란 것 같았다. 거의 1분 가까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굉장히 의욕적인 분이시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시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관심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페나를 망쳐버렸단 말이에요....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단 말이에요....”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바이우스는 이런 날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게 좋은 왕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그랬죠.”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좋은 왕이란 어떤 왕을 말하는 겁니까?”

이건 비겁하다.... 나는 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동시에 나는 그간 내가 해온 과오를 여실히 깨닫는다. 나는 좋은 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그렇게 싫어하던 공부도 했고, 회의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했고, 하녀복을 입으면서까지 성 밖으로 나가 민심을 살피려 했다. 그런데 정작 과연 좋은 왕이란 어떤 왕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즉 목적지가 정확히 어딘지 모르면서도 전력 질주하면서, 나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안일한 위안에 빠지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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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대화가 더블액자 구성이네요.

‘오늘 뭐할까’를 정하기 위한 대화가 점점 삼천포로 빠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이 대화의 끝까지 한 에피에 담고 싶었는데....

‘좋은 왕이란 어떤 왕인가’ 라는 바이우스의 질문에 더 여운을 주고 싶어

자르게 되었네요.


바이우스 : 사실 귀족들이 제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을 싫어하는 특성 때문입니다.

휘렌델 : 성장의 제안이라... 나를 설득하는 쪽이 회의에서 이기는 걸로 하자는 제안 말인가요?

바이우스 : 씨도 먹히지 않을 말을 자꾸 하는데, 왕이라 아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서 제 설득이 먹혔던 거죠. 그러면 적어도 귀족들의 예상범위 안에 있는 선택지 중에서 고르시게 될테니까요.

휘렌델 : 으윽.... 동시에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데도 성공했네요. 절묘하게.... 그런데 왠지 우리 이런 대화를 본문에서도 했었던 것 같은데....

바이우스 : 너무 지나치게 꼬아두었다는 생각에 작가가 결국 빼버린 모양이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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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5.04.23 00:26
    No. 1

    일찍(?) 올라와서 반갑습니다 :D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23 22:47
    No. 2

    하하 그러게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카리황제
    작성일
    15.04.23 02:13
    No. 3

    의욕은 넘치는데 그 방향이 바르지 않다.
    초보자가 흔히 저지르게 되는 실수네요.
    막상 주도권을 넘게 받으면 더 큰 혼란에 빠지는 것도 초보이기 때문이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23 22:48
    No. 4

    맞습니다.
    초보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들이죠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8 바다해미
    작성일
    15.04.23 23:14
    No. 5

    아직 어린데 왕이란 이유만으로 너무 굴려지는거같아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24 00:11
    No. 6

    그런데 따지고 보면 휘렌델의 고난은
    스스로 자처해서 겪는 면이 적지 않습니다 ^^;
    바이우스나 스펜서가 무리하지 말라는 암시를
    계속 넌지시 주었는데 말이죠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눈솔
    작성일
    15.07.11 16:09
    No. 7

    와.. 자각했네요. 방향성의 부재를!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7.11 20:50
    No. 8

    지나친 것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한다는 말이 있죠.
    휘렌델은 아직 어리고 서투릅니다.
    의욕이 지나쳐서 실수도 저지르면서
    점점 스스로를 가다듬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판데모니움
    작성일
    16.10.21 13:22
    No. 9

    바른말이라서 더 아프네요... ㅜㅜ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6.10.22 22:33
    No. 10

    제가 생각하는 이상의 정치는
    발은 현실을 딛고 있으되 눈은 이상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 휘렌델은 달리고자 하는 의욕만 가득할 뿐,
    현실 위에 제대로 균형잡고 서 있지도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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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2 8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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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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