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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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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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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5.04.21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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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친구

DUMMY

겨우 한숨을 돌린 나는 문득 메담의 허리춤에 그 낡은 자루가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차곡차곡 접혀진 것이 그 안에 들어있던 음식들을 모두 정리했나보다.

“자루 안의 음식은 어쨌어? 혹시 버렸어? 날 따라오려고?”

“아니, 팔았어.”

메담이 얼른 대답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 것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팔았는지에 대한 화제로는 넘어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굳이 메담의 용무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사업파트너에 대해 알려 할수록 메담과 멀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돌아볼 거야?”

메담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용감하게 맞서 싸우긴 했지만 이런 어두운 골목에서 그 불한당들을 만났던 건 정말 께름칙한 경험이었다. 더 이상 이 어둠 속에 있는 것조차 몸서리치게 싫었다.

“아니, 됐어. 이제 충분히 봤으니 돌아갈래.”

“그래, 잘 생각했어.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성장님이 눈치 채실 거야.”


메담과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문득 나는 그에게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마웠어. 날 구하러 와줘서....”

“아니야. 나도 너한테 고마워. 비밀을 지켜줘서....”

“내가 누군가에게 고자질할까 불안했으면 아까 거기서 그냥 내버려두는 게 더 나았을 거야. 그런데도 도와줬잖아.”

“뭐? 그 상황에서 널 버리고 가라고?”

메담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펄쩍 뛰었다. 천성 때문인지 아니면 기사도 때문인지 몰라도, 그런 비정한 선택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너는 내가 존칭을 안 써도 아무렇지도 않아....?”

순간적으로 욱해서 시작했지만 이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 하녀고 메담은 기사인데 서로 아무 거리낌 없이 반말을 주고받고 있다. 나야 원래 왕이라 존댓말 하는 게 영 아니꼽고, 여차하면 정체를 드러낼 수 있어서 이렇게 막나가고 있지만 메담 얘는 정말 믿을 수 없는 녀석이다. 당장 내 목을 매달아도 시원찮을 판인데, 나에게 반말을 들으면서도 요만큼도 기분나빠하지 않는 얼굴이다. 사실 왠지 이 녀석은 반말해도 별로 문제 삼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응. 아무렇지도 않아.”

“넌 기사이고 나는 하녀인데도?”

“몇 살이지, 메리?”

“열여덟.”

“난 열아홉이야. 서로 나이도 비슷하니 친구하는 게 어때?”

녀석은 넉살좋게 웃으며 제안했다. 순간 갑자기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휘렌델 바르테인. 18세.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로부터 페나의 차기 영주로 내정되었다. 가장 높은 사람이 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와 같은 눈높이를 지닌 사람이 주위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 녀석처럼 나의 친구가 되겠다고 말한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까닭모를 감동이 느껴졌다.

녀석은 하녀인 메리를 받아주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왕궁기사단의 무보직 기사인데다 실력은 형편없고 손버릇도 안 좋은 메담. 하지만 마음만은 바보같이 착한 이 녀석을 나는 친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악수를 해야 하나?”

나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들고 메담에게 대답을 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

“정말? 그러면 친구가 되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

“증명할 필요 없어. 그냥 너와 내가 친구라는 걸 기억하면 돼.”

메담은 내가 허둥거리는 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하게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낯설지가 않았어. 어제 네가 가고 난 후에 생각해봤거든. 얼굴이 낯이 익은 건 아니야. 확실히 나는 메리 너를 어제 처음 봤어. 그런데 처음 보는데도....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어.”

메담은 이 말을 하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서 느껴지는 그 알 수 없는 그리움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가 반말을 용서해주는 것도, 불량배들의 공격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것도, 친구가 되자고 한 데는 어쩐지 이러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 사실 다섯 살까지 윈더민 성에 살았었거든. 혹시 그 때 본 것 아닐까?”

나는 내 정체를 들킬 것까지 각오하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나는 기억을 잘 못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어렸을 때 만났던 사이일지도 몰랐다. 그 말을 들은 메담은 잠시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어보면서 날짜를 계산해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때는 내가 성에 없을 때야.”

그렇다면 이 녀석과 나는 정말로 접점이 없다는 말인데.... 대체 그는 왜 나를 친숙하다 느낀 것일까.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내가 궁금증을 풀 차례다.

“어제 네 방에서 어떤 목걸이를 봤거든?”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제 만난 것도 바로 내가 그 목걸이에 정신이 팔려 메담의 방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담은 내 말을 듣자마자 즉시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검고 뭉툭한, 손가락만한 덩어리를 꺼냈다.

“이거?”

“그래 맞아! 바로 그 목걸이! 나는 네가 아니라 그 목걸이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어. 너는 그거 어디서 얻었어?”

어제는 왠지 메담과 서먹한 사이라 그 목걸이에 대해 묻기가 껄끄러웠는데 지금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메담도 시원스럽게 대답한다.

“어떤 집시 여인에게 선물 받은 거야.”

“집시?”

“그래. 떠돌이 집시 여인. 내가 7살 때 받았어.”

나는 그 목걸이가 낯이 익은 이유가 최근의 경험 때문이라고 범위를 좁힌 상태였다. 하지만 녀석이 내게서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한 것처럼 나도 녀석의 대답을 통해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 떠돌이 집시 여인이라니.... 최근에 그런 사람을 본 기억도 없거니와, 설사 그랬다 해도 이 목걸이는 오래 전부터 메담이 보관하고 있었으니 시기적으로 어긋나 버린다.

오는 길에 여러 가지를 묻고 답했지만 우린 결국 각자 품은 의문을 시원히 밝히지 못했다. 고민할수록 머리만 아파져서 결국 진상을 파헤치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바위 안에 장치된 비밀 문에 도착했고, 비밀통로를 통해 처음의 화장실로 돌아왔다. 보다 정확히는 그 두꺼운 벽의 안쪽 좁은 틈으로 돌아왔다.


“잠깐 기다려봐. 누가 있는지 확인해볼게.”

이 비밀통로를 여러 차례 이용해본 메담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품에서 거울을 꺼냈다. 그리고 벽에 나 있는 창밖으로 살짝 빼고 각도를 조절하여 화장실 안의 상황을 살폈다.

“지금 나가도 되겠어.”

우리는 조용하면서도 신속하게 비밀 문을 열고 화장실 안으로 돌아왔다. 복도로 나가자 비로소 긴장이 풀린다. 이 때 메담이 슬그머니 나를 불렀다.

“부탁이 있어, 메리.”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끼워둔 자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벨포트가 베어버린, 훔친 음식을 담았던 그 낡은 자루 말이다.

“돌아가기 전에 이것 좀 꿰매주면 안될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다시 돌처럼 경직되어 버렸다. 메담은 이것이 매우 사소한 부탁이라 여기고 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하녀에게 바느질은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나는 바느질 같은 걸 전혀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빌어먹을 벨포트 놈....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야! 남의 자루를 멋대로 잘랐으면 지가 책임을 져야지!

나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는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했다. 곧 좋은 구실이 생각났다.

“그거 가져갔다가 내일 돌려주면 안 될까? 바늘하고 실 모두 방에 있는데, 일이 끝나면 방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시각일 것 같아.”

“그렇구나.... 그러면 부탁해. 오후까지 가져다 줘.”

다행히 메담은 내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고마워, 메리. 조심해서 들어가!”

메담과 작별인사를 나눈 나는 그 낡은 자루를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조심한 덕분에 다행히 오는 길에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녀복을 벗고 왕의 옷으로 갈아입자 그제서야 하루치의 긴장이 모두 풀리고 노곤해졌다. 나는 자루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 까맣게 잊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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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영어에는 반말과 존댓말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에피에서 반말이라는 표현이 언급되었을 때

갑자기 몰입감이 떨어지셨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우리말의 특징을 활용해보고 싶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바르테인은 상상속에 있는 나라고

유럽도 아니고 영어권 국가도 아니니까요.

이 소설은 휘렌델이 왕이 되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반말과 존댓말의 뉘앙스 차이는,

지위의 고하에 관계없이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휘렌델과 메담의 사이를

좀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더 없이 훌륭한 장치입니다.

그래도 등장인물들은 죄다 영어 이름을 쓰면서

사용언어는 한글이라는 걸 받아들이실 수 없다면...

영어에서 Lord 나 Sir 같은 존칭이 생략된 형태라고 생각하고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메담 : 제가 휘렌델을 오해한 이유가 설명이 되네요. 얼굴은 처음 보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틀림없이 스토킹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휘렌델 : 아니라고, 미친 놈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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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5.04.21 10:09
    No. 1

    뭐 유럽에서는 2인칭 지칭을 달리해서 존댓말 취급을 하니까요(ex. 불어: tu → vous). 격식체 더 가깝지만. ㅎㅎ 또 헝가리어, 핀란드어에도 같은 교착어라서 국어와 비슷한 형태의 존댓말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이상 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21 20:24
    No. 2

    독어에서도 you에 해당하는 단어에 du와 sie 가 있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9 SR슬
    작성일
    15.04.21 12:14
    No. 3

    말씀하신 것처럼 영어에서도 상대를 높이는 표현은 있으니 어색하지 않다고 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4.21 20:30
    No. 4

    우리나라말처럼 체계적으로 구분된 건 아니어도 '윗사람에게 쓰는 말'은 어느 언어에나 있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흑염룡
    작성일
    15.08.30 07:53
    No. 5

    그런 (존칭)부분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혹시나 존칭에서 민감함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여러편에 걸쳐 신하들이 여왕님께 감히 격식체와 비격식체를 혼용해 사용하는게 더 두드러져 보일 것 같아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4 어스름달
    작성일
    15.08.30 22:34
    No. 6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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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3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6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3 5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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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8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0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7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2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6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8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0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1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1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1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 친구 +6 15.04.21 2,982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4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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