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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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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324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4.14 01:31
조회
2,788
추천
80
글자
8쪽

기사도

DUMMY

“내가 저 안에서 너를 보고 있었던 이유는....”

녀석은 적당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아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모든 걸 눈치 챘으면서도 이를 지켜보던 나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쩔쩔 맬 필요가 있을까? 녀석이 상대하고 있는 건 바르테인의 왕 휘렌델이 아니라 하녀 메리다. 굳이 내 물음에 대답할 필요는 없다. 성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하녀 때문에 말문이 막혔으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저번에 만났던 그 건방진 늙은 하녀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녀석.... 나를 납득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복도 모퉁이 저편에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한 세 네 명쯤 될까?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똑바로 이쪽으로 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비밀 통로에 들어갈 기회를 또 한 번 놓친 소년기사와 나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진다. 발자국의 주인공은 모습을 보이기 전에 꺾어진 복도 저쪽에서 성난 고함부터 한 방 크게 질렀다.


“메담! 메담 스피어 여기 있나?!”

맞다. 이 녀석 이름은 메담이었구나. 이제는 잊지 말아야겠다. 그런데 방금 들린 이 목소리도 어쩐지 익숙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이들은 스미스와 그의 똘마니 둘이었다. 혹시나 이번에는 내 얼굴을 알아볼까 경계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메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감히 서약식 중에 졸다니! 무슨 짓이냐?!”

“아... 미안.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정신을 차려보니 졸고 있더라고. 이런 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이번에도 메담은 멋쩍게 웃는 얼굴로 응수했다. 그 태평스러운 태도에 더 화가 났는지 스미스의 눈빛이 한층 더 거세게 타오른다.

“닥쳐! 바로 그게 네 문제야! 메담! 기사라면 정신력으로 이겨내야지! 네 놈에겐 기사의 긍지라는 것도 없나?!”


스미스는 또 한 번 고함을 빽 질렀다. 그와 함께 온 두 남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뒤 쪽에 서서 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군사학 수업 때마다 엎드려 주무시는 벨포트 도련님이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건 왠지 자충수 같은데?”

“틀림없이 도련님께선 이렇게 생각하시겠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왕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조는 건 그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말로 옮기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화가 나면 논리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분이 바로 우리 도련님이시니까.”

둘의 대화를 듣고 나는 애송이의 이름이 벨포트 스미스였다는 걸 기억해낸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벨포트의 아군이 맞나? 벨포트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전속하인 아니면 종자 같은데....


“이것도 설명해 보시지! 너는 왜 맹세의 잔을 받지 않았나?”

벨포트의 이 말은 내 흥미를 확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기사들이 포도주잔을 분배받을 때 대열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메담을 시야에서만 놓쳤다고 생각했었다.

“충성 서약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메담의 대답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메담은 일부러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완성되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났고, 이에 화가 난 벨포트는 그 때부터 메담을 찾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다.

“뭐라고? 메담! 우리는 왕궁기사단이다! 그런데 충성 서약을 거부한 것이냐?!”

“나는 여왕님에게 충성하고 싶지 않거든. 그런데 맹세의 잔을 받는다면 그건 거짓말이 되고 말아. 기사도에 어긋나는 거라고. 어차피 난 백인대장이든 뭐든 될 생각이 없으니까 서약을 안 해도 상관없잖아.”

지금까지 나는 그를 발로 찬 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왜죠? 왜 여왕님께 충성하지 않겠다는 거죠?”

말이 입 밖으로 나온 후에야 나는 비로소 목소리에 꽤 감정이 실려 있음을 깨닫는다. 벨포트가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하녀 따위가 감히 기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에는 화가 났지만, 그래도 자신의 편이 되어 메담에게 따지고 있으니 이번만은 용서해주겠다는 표정이었다.

메담은 눈앞에 벨포트가 있는데도, 하녀로 분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었다. 아니, 대답해 주려 했다.

“왜냐하면....”

“그만.”

벨포트가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메담의 말을 자른다. 지금까지 흥분해 소리친 게 불꽃과 같았다면 이번에는 조용하고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그래서 더 섬뜩했다. 메담을 쏘아보는 벨포트의 눈빛은 이제 증오가 아닌 경멸로 차오르고 있었다.

“네 놈은 정말로 구제불능이구나. 왕궁기사단에 몸담은 자가 감히 여왕님을 험담하려 하다니....”

“아.... 미안해. 이건 내가 실수했네.”

메담도 자신의 실수가 가볍지 않다고 여겼는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 그러나 그를 벌레 보듯 하는 벨포트가 그 사과를 받아줄 리가 없었다.

“너 같은 놈이 기사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네 놈을 이 성에서 쫓아버리고 싶다. 기억해라, 메담. 이 몸이 속한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면 내 손으로 네 놈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이 말을 하고 차갑게 돌아서려던 벨포트는 메담이 지닌 자루에 갑자기 눈길을 돌렸다.

“기사가 그런 낡아빠진 물건을 들고 다니다니..... 뭐냐,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오래 본 건 아니지만 나는 메담이 꽤 태평한 성격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서약식 도중에 서서 조는 것을 보기도 했고, 그는 거의 항상 느긋하고 웃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는 엄청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벨포트도 그 자루에 더욱 주목하게 된 것 같았다.

“반응이 수상한데? 대체 뭐지? 말해봐.”

“이건 그냥 쓰레기야.”

메담은 황급히 변명했지만 여기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그 자신도 아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 번 보여 봐.”

“그럴 수 없어. 너무 더럽거든.”

“....”

메담이 완강하게 거부하자 벨포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는 속임수였다. 메담이 안도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그 낡은 자루를 베어버린 것이다.

“이건....?”

자루에서 쏟아져 나온 내용물은 연회에 나왔던 음식들이었다. 빵과 치즈, 샐러드, 그리고 식은 고기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벨포트가 황망한 표정으로 묻는다.

“뭐냐, 이건?”

“.....”

메담은 당황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벨포트가 엄숙한 목소리로 한 번 더 추궁했다.

“설마.... 훔친 거냐?”

정황상 그렇게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훔친 게 아니었다면 메담이 그렇게 숨길 필요도,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벨포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연회에 나온 음식을 가져온 것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메담이 기사라는 점이다.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 해도 기사가 도둑질을 했다면 이는 그를 파면시키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이건 쓰레기가 맞아요. 버릴 음식들이니까요.”

벨포트와 메담의 시선이 나에게 와 꽂힌다. 나는 완벽히 하녀가 되어 자루에서 나온 음식들을 주워 터진 구멍으로 밀어 넣고,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제가 들기에 너무 무거워 보인다고.... 메담 기사님이 대신 들어주고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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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론도 : 사실 저희가 여기 갑자기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리오 : 지난 회를 보시면 메리와 메담 경은 비밀 통로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서 대머리 남자가 나오는 걸 기다렸었죠. 그 아저씨는 나오는 길에 메담 경과 마주쳤고, 연회장에 돌아와 그를 찾고 있던 도련님께 얘기를 해준 겁니다.

벨포트 :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지....? 처음 보는 이름인데?

론도 :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련님이 저희를 못 알아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리오 : 아무래도 도련님은 화가 나지 않을 때에도 논리력이 딸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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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39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2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5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2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2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7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3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79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6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1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5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7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40 고통 +6 15.05.01 2,680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0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0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0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2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1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3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1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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