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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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동안 할크루를 부정적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일까. 그가 귀족보다 평민을 우선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마음이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바이우스의 설명을 들으면서 인식이 많이 바뀌었으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그는 굉장한 폭군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하지만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저 까탈스러운 마법사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던 사람이 소문에 들리는 것처럼 백성들을 핍박했을 리가 없다는 걸 말이다.
“적어도 평민들에게 만큼은 폭군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신이 평민 출신이었으니 말입니다.”
바이우스의 말대로 할크루는 원래 평민의 아이였는데, 슈멘페인 가에 입양되었다. 하지만 훗날 슈멘페인 가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왕과의 연을 끊고 싶어 했다. 할크루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슈멘페인이지만, 그 시기를 할크루 시대라고 부르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그가 폭군이 아니라는 사실은 평민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추첨제도 제가 혼자 고안해낸 제도가 아닙니다. 평민에게 귀족이 될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을 가장 먼저 펼친 사람은 할크루 왕이었고, 그 정책을 제가 참고했던 겁니다.”
“네? 할크루에게도 비슷한 정책이 있었다고요?”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바이우스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장 빠른 시간 동안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왕입니다. 이 때문에 항상 인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할크루는 평민들만 볼 수 있는 ‘무지개 다리’라는 시험을 만들어 해마다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사람을 중용하였지요. 즉,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우연과 확률에 의존하는 추첨제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성장의 어조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가 자조 섞인 한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성장은 그 훌륭한 제도를 변형시켰던 걸까? 지금까지도 그것을 후회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 시험이 추첨제보다 나은 거라면 지금이라도 바꾸면 되지 않나요?”
바이우스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뛰어난 점도 많았던 할크루 왕이 지금 필요 이상으로 비난받고 있는 이유를 혹시 짐작하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나는 할크루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뒤 그의 이름에 오명만 거듭해서 쌓이는 이유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에게 투슬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인가요?”
“그것은 슈멘페인 가문이 그의 유언을 임의로 해석해서 악의적으로 퍼뜨린, 근거 없는 소문입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으려 하는 바람에 이제는 진실처럼 굳어져 버렸죠.”
“그가 최후에 자결했기 때문인가요?”
“그것도 매우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정치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요?”
“바로 그가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곱 왕국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고 강철거인의 정원 북부를 손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를 도운 사람들은 평민출신 인재들이었습니다. 평민이 귀족보다 뛰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거죠. 할크루가 죽은 뒤 다시 정권을 잡은 로클리의 귀족들은 이를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겁한 자식들!”
나도 모르게 노성이 터져 나왔다. 다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장점은 묻어버리고 단점만 부각시키면서 왜곡과 모함으로 그를 필사적으로 깎아내린 것이다. 그 결과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할크루는 최악의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다.
“한 번 할크루에게 크게 데인 귀족들은 능력 있는 평민이 등장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크루의 시험제도를 원형 그대로 적용하지 못했던 겁니다.”
나는 비로소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대화를 하고나니 명확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
“성장도 평민을 위하는 정책을 지지하는군요?”
바이우스는 시험제도 대신에 추첨제가 실행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고, 평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할크루 왕을 이상적인 군주로 선정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도 할크루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에 부응하지 못할까 실망했던 나는 이 사실이 너무도 반가웠다. 바이우스가 나와 같은 노선인 것이 더 없이 든든하고 행복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 한다면 제가 지지하는 것은 도덕심입니다.”
그런데 이 때 바이우스가 고개를 저으며 내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왔다.
“정치에서 도덕심이란 매우 보잘 것 없는 요소입니다. 무력만큼 효과가 빠르지도 않고 금처럼 확실한 약속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혹자는 도덕심을 추구하는 것을 어리숙하다 비웃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도덕심이 낮은 국가치고 자멸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반대로 가장 번창했던 나라들은 도덕적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였습니다.”
나의 가치관과 약간은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요컨대 성장은 평민들이 주역이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 뜻을 펼쳐 나가면 성장의 이상도 실현될 것 같다. 평민을 배려하는 사회가 도덕적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일단 내가 바이우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냈다.
“내일 오후에 예정대로 회의를 진행해야겠어요.”
“무엇에 대한 회의입니까?”
“아예 이번 기회를 통해 추첨제를 시험으로 바꿀까 해요.”
우와! 놀랐다! 처음 본다! 바이우스도 저렇게 놀란 얼굴을 하는 구나! 평상시 표정에서 눈만 조금 더 크게 떴을 뿐이지만 어쨌든 틀림없이 놀란 얼굴 이었다!
“안됩니다!”
목소리도 평상시답지 않게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그의 반응을 신기하게 살피는 와중에 물었다.
“왜 안 되죠?”
“이미 할크루와 비슷한 노선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창안한 정책을 그대로 가져다 써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할크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200년이나 뿌리 깊게 박혀 자리 잡은 것이라 쉽사리 바뀌지 않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당사자인 평민들조차 이제는 그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옳다. 할크루에 대한 인식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이상 그와 연관 지어져서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바이우스가 저렇게 거부하는 걸 보니 굳이 억지로 밀어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좋을 꿈 꾸시기 바랍니다.”
바이우스는 평소와 조금 다른 인사를 남긴 후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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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나는 내가 맞서왔던 적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는 할크루가 자결하기 전에 남긴 유언이다.
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갑자기 투슬로 원정을 떠난 그의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필자 또한 그 내막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음의 내용은 순전히 주관적인 추측임을 미리 밝힌다.
팡스 폭동 (당시에는 팡스 혁명이라 불렸다.)이후 할크루는 부합리한 사회구조를 타파하는 것을 일생일대의 목표로 삼았다. 일곱 왕국을 정복한 업적은 그에게 있어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군림하는 자들을 끌어내렸고 억압받는 자들의 위상은 드높였다.
진보는 분열을, 보수는 부패를 경계해야 한다. 할크루는 혁명가로서 억압받던 자들의 뜻을 하나로 묶는데는 성공했지만, 그와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군림하는 자’들이 된 후 점점 변해가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가 목숨걸고 싸워 쟁취한 결과는 단지 귀족과 평민의 위치만, 이름만 다를 뿐 그 전과 똑같은 세상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 그는 심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필자는 이 때 그가 투슬이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평민과 귀족을 하나로 묶으려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원정 전쟁은 마법사들의 집단 폭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할크루는 평민이면서 동시에 귀족이었다. 하지만 굳이 분류한다면, 늘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먼저 공감해온 그를 혁명가로 정의내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군림하는 자’들의 우두머리를 처단했고, 이는 또 하나의 혁명에 성공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토마스 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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