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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라 돌아라 강강수월래

왕녀의 외출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어스름달
작품등록일 :
2014.12.01 23:43
최근연재일 :
2017.11.24 03:18
연재수 :
417 회
조회수 :
632,343
추천수 :
14,829
글자수 :
1,880,019

작성
15.05.01 07:00
조회
2,680
추천
77
글자
9쪽

고통

DUMMY

점심식사를 마친 후 나는 주변에 오후에는 제왕학을 공부하겠다 말한 뒤 방에 돌아왔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로 강력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는.... 겁에 질리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걱정하시던 이 드센 성격이 이럴 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울했다.

마치 이 도시가 나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 같다. 책을 봐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그냥 책상에 앉아 서글퍼 하며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에 나는 방 안을 훑어보았다. 아무 것도 이상한 게 없었다. 평상시와 똑같은 내 방이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잠깐?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적어도 한 가지는 달라진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뭐였더라?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아침에 얻은 귀중한 보물! 바이우스의 공책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단지 말뿐이 아니라 그게 없으면 정말로 나는 안개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분명 제왕학 서적들 위에 올려 두었는데 지금은 온데간데없다.

....허무해졌다. ‘여기 없으면 어디 있을까?’하는 생각에 흘깃 쳐다보니 바이우스의 공책은 책장에 얌전히 꽂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공책을 가슴에 품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윈더민 시가지로 행차를 나간 사이 방을 청소하던 하녀가 치웠나 보다.


“맞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또 다른 중요한 물건의 부재를 깨달았다. 그것은 왕의 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물건.... 더럽고 낡은 데다 찢어지기까지 한 자루였다! 어젯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메담이 꿰매 달라고 부탁했던 자루를 방 한 쪽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서둘러 사람을 불러 내 방을 청소한 하녀를 보내달라고 했다. 잠시 후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 하녀가 내 방에 들어온다. 왠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이제 보니 내가 메리로 변장하고 나간 첫날 나한테 소리를 질렀던 바로 그 할망구였다.

“제시라고 합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아까 이 방을 청소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들었어요. 맞나요?”

“그렇습니다.”

메리에게 호통을 칠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 때는 거의 남자 못지않게 걸걸한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귀에 착착 감기는 것처럼 나긋나긋하다. 그녀의 태도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처럼 경험 많은 하녀만이 왕의 방을 청소할 수 있다는 우월감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혹시 자루 하나 못 봤나요?”

“어머나. 그 더러운 것이 자루였습니까? 제가 치웠습니다.”

마치 내게 큰 호의를 베풀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마땅히 칭찬이라도 받을 거라는 기대도 섞여있다. 나는 자루를 되찾았다는 안도감에 크게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얘기했다.

“돌려주세요. 그건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제시의 얼굴이 별안간 사색으로 물들며 눈이 커진다. 설마 내가 그런 더러운 물건을 필요로 할 줄은 몰랐나 보다. 동시에 내 마음도 절망으로 물들어 버렸다.


“용서해 주십시오, 여왕님. 그만.... 소각장에....”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그대로 경직되어 있었다. 이제 막 친구가 된 메담의 부탁인데.... 꿰매주기는커녕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어쩌면 좋지?

처음의 위풍당당한 태도는 어디 갔는지 오들오들 떨면서 제시가 겨우 입을 열어 말한다.

“혹시 다른 자루를 가져다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암담했던 내게 구원의 밧줄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서글서글한 메담의 성격이라면 이것으로 내게 크게 화를 내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가져다주세요.”

방을 나간 제시는 곧 메담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과 정반대의 특징을 가진 자루를 가지고 왔다. 비단인지 벨벳인지 반들반들한 고급재질로 된 새하얀 것 말이다. 쓸데없이 큰 메담의 자루에 비해 훨씬 아담하여 들기도 편해 보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여왕님.”

제시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죄했다. 솔직히 바이우스의 공책을 멋대로 치운 것부터 좀 짜증이 났지만 그녀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방 안에 들어온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부터 그녀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리일 때 품은 불만을 휘렌델일 때 푸는 건 왠지 옳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를 질책하지 않고 적당히 주의를 주는 데서 끝내기로 했다.

“이거라도 있으니 괜찮아요. 다음부터는 이 방의 물건을 치우기 전에 내게 먼저 말해주세요.”


제시를 돌려보낸 후 나는 앤디에게 공부에 집중하고 싶으니 한 동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해 두었다. 전날 메담이 자루를 오후까지 가져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 부주의로 자루를 잃게 되었으니 약속 시간이라도 제대로 지키고 싶었다. 화장을 지우고 하녀의 옷을 입은 뒤 나는 오늘도 메리가 되었다.

비밀통로를 통해 창고로 빠져나온 뒤 나는 문득 그 동안 더러워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음식물 쓰레기들을 한 번 살펴보았다. 심하게 썩어 흐물흐물해진 쓰레기도 있었지만, 다른 쪽에는 꽤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음식들도 있었다. 어제 복도에 쏟아진, 메담의 자루 안에서 뭉개진 음식과 비슷한 수준의 것들도 상당히 많았다. 자신이 훔친 음식들은 어차피 버릴 것들이었다는 메담의 말이 변명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도착해보니 메담은 자신의 방에 없었다.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았나 보다. 나는 고이 접은 하얀 자루를 눈에 잘 보이는 책상 위에 올려두고 짤막한 메모를 남겼다.

‘원래 쓰던 건 너무 낡아보여서 새 걸로 준비했어.;

이 정도면 됐겠지. 이제 나가 볼까.

분노하는 자들인지 열 받는 자식들인지 하는 폭도들에게 연이어 위협을 당해서인지 왠지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꺼려진다. 오늘은 나가지 말고 이대로 내 방에 돌아가야겠다.


“어이, 너!”

메담의 방을 나와서 비밀통로로 향하려 하는데 뒤에서 화가 잔뜩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걸쭉한 남자 같은 목소리는 예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제시다!

“거기 너 말야! 대답 안해?!”

그녀가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도 땅의 진동으로 이 사실을 알아냈다. 그만큼 그녀의 걸음걸이는 힘찼다. 방금 전에 내 방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기분이 상한 건가? 어쩐지 걸리면 몹시 불행해질 것 같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하면서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아직 제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달리기라면 자신 있으니 여차하면 뛰어서 도망치면 된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음식물 쓰레기 창고에 들어가는 걸 들키지 않고 따돌릴 수 있다.


“.....!!”

제시와 때 아닌 술래잡기를 하던 도중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 때문에 얼어붙고 말았다. 저 앞에 바이우스가 서있었던 것이다!

‘바이우스님은 성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고 계셔.’

‘너는 통성명도 하지 않고 그냥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성장님은 네 이름을 벌써 알고 계셔.’

바이우스를 거의 신격화하다시피 한 메담의 말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 말을 과장이라 여긴 적이 없다. 왕으로서 그를 매일 접했던 나 역시 ‘바이우스라면 그럴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 좀 더 거리가 가까워지면 바이우스는 내 얼굴을 알아볼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성장이 이 쪽을 쳐다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시가 씩씩대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바이우스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보단 낫다.

“아야?!”

잠깐. 정말로 더 낫나? 혹시 내가 잘못 선택한 건 아닐까? 이 고통은 뭘까? 잠시 후 나는 제시가 그 우악스러운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아픔은 처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머니는 고상하신 분이셨다. 늘 말로 나를 가르치려 하셨지 단 한 번도 내게 육체적인 고통을 준 적이 없었다.

“이런 요망한 년!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나는 너무 놀라 그녀에게 나를 부르는 말인 줄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지금 단지 화풀이할 대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채를 잡힌 채 늙은 하녀장의 손에 끌려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그녀가 나를 끌고가는 방향이 바이우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쪽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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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휘렌델 : 무적의 신화가 이렇게 깨지다니 ㅠㅠ 지금까지 패기만 하고 맞아본 적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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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메담의 직감 +4 15.06.05 2,240 64 11쪽
56 선발전 등록 +4 15.06.03 2,193 58 9쪽
55 변신검 +4 15.06.02 2,306 56 12쪽
54 유사이래 최초 +4 15.06.01 2,413 50 13쪽
53 수호기사 선발 +10 15.05.30 2,352 61 12쪽
52 폭군의 진실 +6 15.05.28 2,338 63 7쪽
51 휘렌델의 결론 +4 15.05.27 2,244 61 13쪽
50 귀족들의 자부심 +14 15.05.26 2,380 69 8쪽
49 성을 떠난 마법사 +6 15.05.25 2,527 67 11쪽
48 따귀 백만 대 +8 15.05.22 2,362 70 10쪽
47 [쉬어가는 이야기] 강철거인의 후예 +6 15.05.21 2,726 39 19쪽
46 꿈을 살고있는 자 +4 15.05.20 2,491 67 12쪽
45 메담의 공범 +8 15.05.19 2,201 60 16쪽
44 그에게 없는 것 +2 15.05.17 2,378 64 10쪽
43 어린 기사 +6 15.05.15 2,500 59 11쪽
42 [쉬어가는 이야기] 리더쉽에 관하여 +4 15.05.07 2,648 41 10쪽
41 따뜻한 소녀 +6 15.05.02 2,662 71 12쪽
» 고통 +6 15.05.01 2,681 77 9쪽
39 공명 +4 15.04.29 2,691 83 11쪽
38 분노하는 자들 +4 15.04.28 2,511 69 12쪽
37 여왕의 외출 +6 15.04.25 2,951 77 10쪽
36 바이우스의 노트 +6 15.04.24 2,893 81 11쪽
35 명군의 길 +10 15.04.23 2,941 93 8쪽
34 친구 +6 15.04.21 2,982 85 9쪽
33 스텝 사이드 킥 +6 15.04.20 2,779 86 11쪽
32 위험한 도시 +14 15.04.18 3,211 92 14쪽
31 최악의 하루 +8 15.04.17 3,084 110 12쪽
30 실연의 분노 +2 15.04.15 2,854 78 9쪽
29 기사도 +2 15.04.14 2,789 80 8쪽
28 우연 +2 15.04.13 3,042 8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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