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검귀
무성은 계속 얘기했다.
“흉수는 즉시 장문인을 제압했고 흡정을 시작했을 것이오. 장문인은 갑자기 치명적인 상황에 빠져 저항조차 못했겠지. 아는 사람이라 암습에 대한 대응이 조금 늦었을 것이오. 그것이 장문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오.”
“그럴 수가...”
무학대사는 침통했다. 대체 누구였길래 장문인이 방심했단 말인가.
“흉수는 흡정을 계속했고 장문인은 결국 이렇게 되신 거요. 그것은 즉, 수뇌부 회의에 참석했던 우리들 중 대마종이 있을 수 있단 뜻이오.”
“ ! ”
다들 놀라고 경악해서 침을 삼켰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소림 방장을 순식간에 제압해 흡정해서 죽일 수 있는 것은 수뇌부 인물들 뿐이었다. 여기 있는 자들이 정천맹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이었다. 보통 무인들은 소림 장문인을 제압하지도 죽이지도 못 한다.
“우리들 중에 대마종이...”
“천녀화도 정천맹에 있는데 대마종까지...”
무당파 장문인과 화산파 장문인이 탄식하고 다들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들 어제 새벽 어디에 있었는지 얘기하시오!”
공동파 장문인이 외치자 청성파 장문인도 동조했다.
“맞소! 다들 어디 있었는지 필히 얘기해야 할 것이오!”
점장파 장문인이 먼저 대답했다.
“난 숙소로 돌아가 자고 있었소.”
“누군가 증명해줄 수 있소?”
“내가 잠잔 것을 누가 증명한단 말이오? 혼자 잤는데. 공동파 장문인은 증명할 수 있소?”
“나, 나도 혼자 자긴 했지만... 옆방에 사제가 있었소.”
공동의 석중 장로가 확인해주었다.
“제가 옆방에서 잤습니다.”
“공동파의 장문인이 새벽 내내 방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소?”
“그,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사형이 자는 것을 제가 계속 지켜본 것도 아닌데... 근데 점창의 장문인께서는 왜 계속 우리 사형을 의심하십니까?”
“먼저 공동파 장문인이 날 의심하지 않았나!”
서로 싸우려고 해서 정천맹주 화섭천이 급히 나섰다.
“그만 하십시오! 지금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같이 있지 않는 한 혼자 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무성도 동조했다.
“맞소. 난 사실 확인을 한 것일 뿐 서로 의심하라고 한 얘기가 아니오. 우리들 중에 대마종이 있다 해도 누군지는 지금 알아낼 수가 없소.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오.”
그 말에 걸개가 놀라며 외쳤다.
“그, 그렇군! 여기 있는 그 누구한테서도 마기가 느껴지지 않아! 대마종은 마기도 완전히 숨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대마종이 누군지 알아낼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무당의 청허자가 당황했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대마종이 지금 여기 있어도 누군지는 절대 알 수가 없었다. 마기가 있어야 알 수 있는데 그 누구도 전혀 마기가 없었으니까.
그때 검성 백운학이 나섰다.
“당분간은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대마종이 누구인지 밝혀질 때까지.”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화섭천이 찬성하여 모두가 동의했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은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여럿이 모여 같이 있는 것이 좋았다.
아무튼 이 일로 모두에게는 의심이 싹 텄고, 불신이 정천맹의 수뇌부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 *
호남 마교의 지부.
지하에 있는 비밀 은신처에는 이마종 광마 탁인부와 사마종 영독마 단형천, 그리고 오마종인 거금마 냉소충이 탁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대 무신검이라는 놈이 무척이나 강하더구나. 왜 구마신 놈들이 못 이겼는지 알 수 있었어.”
“그래서 그냥 오셨수? 놈을 안 죽이고?”
어린애 영독마가 경단을 먹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광마 탁인부가 웃었다.
“나도 죽을 수 있는데 내가 왜 놈을 죽이겠느냐.”
“자기 안전이 최선인 건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둘째 형님도 참 변함 없소.”
“사람은 변하면 죽어. 안 변해야 오래 살지.”
“아무튼 쉽지는 않을 것 같소. 정파 놈들이 예상 외로 강했거든. 특히 황룡의 후인 놈은 내가 목숨을 걸었을 정도로 대단했지.”
그러자 거금마 냉소충도 덧붙였다.
“삼대 무신검도 그랬습니다. 절멸강기까지 썼는데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더 재미있었지요. 다시 만나 싸우고 싶군요.”
탁인부가 혀를 찼다.
“뭐 강자 놈들과 싸우려고 천년만에 부활한 줄 아느냐. 이번에야말로 마교 천하를 이루어 천마신교에서 못 다한 꿈을 이루어야 한다.”
“그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싸우고 싶습니다.”
“뇌까지 근육 놈 같으니. 뭐 하지만 나중에 실컷 싸울 수 있을 거다. 대마종 님도 부활하신다면... 근데 언제쯤 하시는 건지. 지금 우리 셋만으로 무림 정복은 어렵다. 막내도 못 찾았다며?”
“막내 년은 혼자 뭔 짓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소. 우리가 가도 나와보지도 않았으니. 걔는 됐고 다른 구마종을 찾아야지.”
“어쩌면 다 부활하진 못했을 수도 있다. 기억 각성 전에 죽었다면 부활 못했을 테니까.”
탁인부가 우려하자 냉소충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형님들이나 아우들 몇 명은 못볼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최대한 많이 부활해야 무림 정복이 수월할 텐데...”
탁인부가 말하는 사이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가 입구쪽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으윽...”
다쳐서 끙끙 거리고 나뒹굴고 있는 것은 칠마신이었다. 영독마 단형천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쟤는 왜 맨날 맞고 다니냐. 구마신이 뭐 저래?”
그 말에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대답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마교의 간부라는 놈이 이렇게 허약해 빠져서야... 왜 계속 정파 놈들에게 깨졌는지 알겠군.”
엄청 나이 많은 늙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갈무리된 마기가 굉장했다. 그것도 예기가 아주 뚜렷한 것이 천년전부터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어? 설마...?!”
탁인부와 단형천, 냉소충이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늙은이가 셋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아직 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좋겠군. 다들 젊어서.”
“혹시... 일마종 막천세 큰형님?”
광마 탁인부가 조심스레 물어보자 늙은이가 크게 웃었다.
“그래! 내가 막천세다! 반갑다, 아우들아!”
구마종 중 첫째인 일마종, 마교제일검 지존검귀 막천세가 나타났다. 이마종과 사마종, 오마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일마종을 얼싸안았다.
“큰형님! 보고 싶었소!”
“부활 못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참으로 다행이오!”
“역시 큰형님이십니다! 다 늙었는데 기억 각성을 하셨군요!”
동생들이 반기자 일마종 막천세는 더 크게 웃었다.
“겨우 각성했다! 죽기 직전에! 그것도 여기서 삼천 리나 떨어진 대막에서! 진짜 내가 살아온 얘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을 거다!
대마종을 제외하고 마교 최강이라 불리던 지존검귀의 등장이었다. 과거 십전룡들 여럿이 협공해도 절대 못 죽였던 절대검귀였다. 아우들은 일마종인 큰형님의 등장에 무척이나 든든함을 느꼈다.
네 사람은 칠마신에게 술을 가져오게 한 뒤 회포를 풀었다. 칠마신은 아랫것들처럼 술과 안주를 나르며 공포에 질렸다.
‘구마종 중 일마종이었구나. 어쩐지 내가 맥을 못 춘다 했다.’
웬 늙은이가 갑자기 나타나 들어오려고 하길래 막아섰는데 한 대 맞고는 나가 떨어졌다. 그 순간 칠마신은 알아차렸다. 저 늙은이는 구마종일 거라고. 하지만 그 대단한 마교제일검 지존검귀 막천세일 줄은 몰랐다. 구마종 최강이 아니던가. 검에 베여 안 죽은 게 다행이었다.
“하도 소식이 없길래 큰형님이 기억 각성 못하고 죽은 줄 알았습니다.”
이마종이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막천세는 술을 벌컥 마시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늙어서 죽기 직전에 겨우 기억 각성을 했다. 일각만 늦게 했더라도 난 지금 요단강을 건너고 있었을 거야.”
“어떻게 된 건데요?”
이마종이 다시 술을 따라주었다. 막천세는 거침없이 마시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난 대막에 있는 유목 부족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노예나 다름없는 비천한 신세였지. 멸망한 타부족 태생이었거든. 그래서 평생 말똥이나 치우며 살아야 했다. 부족에서 칠십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며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지냈다.”
“진짜 고생 많이 하셨네. 천하의 지존검귀가 평생 말똥이나 치우고 살다니.”
사마종이 혀를 찼다. 막천세는 아예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고는 쾅 내려놓으며 말했다.
“진짜 비천한 삶이었다. 정말로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었지. 그러다 다 늙고 병들어서 허름한 게르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숨이 끊어지려고 헐떡대는 순간 기억 각성을 했다. 내가 누군지 그때 알 수 있었지.”
“엄청났겠군요. 그 후에는...”
오마종이 예상이 된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래. 모조리 죽여버렸지. 부족민 전체를. 전부 피를 빨고 흡정해서 싸그리 다 죽였다. 날 멸시하던 것들 수백을 다 죽이고 난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지. 천하의 일마종인 내가, 마교제일검 지존검귀 막천세가 칠십 평생 야만족에게 멸시 받으며 말똥이나 치우고 있었다니... 처음으로 대마종 님이 원망스러웠을 정도였다.”
“내가 그 심정 아오. 열 살 애로 각성했을 때 나도 참 원통해서...”
“넌 그래도 어린애잖냐. 난 늙은이였어! 평생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난 차라리 영독마 네놈이 부럽다. 어린애니 얼마나 좋아?”
“말도 마쇼. 어려서 힘도 잘 못 쓰오. 흑수독장과 만독무 쓰는데 몸이 힘들어 죽는 줄 알았거든.”
“그래도 이 늙은 몸뚱이만 하겠느냐. 온몸이 삐그덕거린다. 너 나랑 몸을 바꾸자면 바꿀 거냐?”
“...그건 싫소. 차라리 애로 살지.”
“거봐라. 아무도 늙은이로는 부활하고 싶지 않지. 그래서 니들은 축복받은 거다. 특히 탁인부 네놈은 정말... 젊어서 좋겠구나.”
“하하, 저도 젊어서 각성해 기뻐했지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냉소충 너도 마찬가지다. 천년 전보다 더 거구의 몸이 아니냐.”
“하지만 아직 힘은 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몸이 어디냐. 왜 나만 늙은이야... 제길!”
막천세는 화가 나서 술병 하나를 더 비웠다. 이마종과 사마종, 오마종은 큭큭 웃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어떻게 다 늙어서야 각성한단 말인가.
“그래도 안 죽은 게 다행이오. 아마 몇몇 녀석들은 기억 각성 못하고 죽었을 테니.”
탁인부의 우려에 막천세도 동의했다.
“그건 맞다. 나도 아슬아슬 했으니. 몇 놈은 기억 각성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거다. 어려서 죽거나 젊어서 횡사하거나 늙고 병 들어 죽었거나 뭐 다양하게 죽었겠지. 그래도 니들이 있어 다행이다. 처음엔 아무도 없음 어쩌나 걱정했거든. 근데 이게 다냐? 더는 없어?”
“막내가 있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천녀화라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기억 각성을 했다면 걱정할 것 없다. 걔가 어디 보통 애냐. 우리 다 쌈싸먹을 애다. 혼자서도 잘할 거다. 문제는 대마종 님인데...”
“무슨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거금마의 질문에 막천세가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대천마성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을 봤다. 대마종 님도 부활하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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