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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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부는 맞기도 했다. 천중성 할아버지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무제는 선화와 혼인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결국 12대조 할머니는 누구를 선택할까 하다가 천람성의 성주인 천중성 할아버지를 선택한 거였다. 그러니 뭐 뺏겼니 뭐니 해도 선택은 전적으로 선화 할머니의 몫이었다.
[너는 모른다. 사랑하는 여인을 뺏긴 이 비통함을... 어찌 알겠느냐!]
[그렇게 따지면 전 네 명이나 뺏겼는데요?]
[뭐라고?]
무제 곽인한이 놀라길래 천람은 간략히 얘기해주었다. 옛날 일을...
무제는 통탄했다.
[허어! 어찌 그런 일이! 그 신유하란 여자애는 그렇다 쳐도 정혼자인 여자애 셋이 널 버린 건 너무하구나! 어찌 폐인이 됐다고 널 버리고 너의 숙적에게 가버린단 말이냐! 허허! 강호의 정이 이렇게나 떨어진 것이냐!]
[아니, 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너는 화도 안 나는 것이냐.]
[처음에야 화가 났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이제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지금은 좋은 여인 두 명이 생기기도 했고...]
[뭐라? 새 여자를 만들었어? 네가 사람이냐?!]
[예?]
[사랑하는 여인들을 평생 가슴속에 묻고 살았어야지! 난 그렇게 살았다!]
당당히 외친 무제였다. 근데 좀 억울해 보이시는데...
[전 지나간 일에 연연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자를 만날 생각이 저도 처음에는 없었지만 인연이 생겼으니 거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은 제 소중한 정인들입니다.]
[그런 것이냐... 그럼 나도 새 여자를 만날 걸 그랬나. 다른 여자 만나는 건 어쩐지 아닌 것 같아 평생 안 만났는데... 괜히 아쉽군. 나 좋다는 여인들도 많았는데 쯧.]
[앞으로 좋은 인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죽었는데 무슨 인연이 있다는 것이냐.]
[아...]
맞다. 무제 곽인한은 이미 죽은 사람이지. 지금은 아마도 영체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가 얘기를 끝내면 난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순간 난 한 줌 진기를 실어 내 영체를 보존했거든. 찰나의 순간 내 유지를 잇는 인연자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죄송합니다. 하필 천중성 할아버지의 후손이라...]
[아니다. 그놈도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내가 다른 여자를 안 만난 것인지도 모르지.]
[무슨...?]
[선화가 아들을 낳고 몇 년 못 가서 죽었거든...]
[아...]
[나도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장례에 참석했는데 천중성 그놈 완전히 얼이 나갔더구나. 선화를 잃고 완전히 절망한 얼굴이었어. 그런 모습을 봤으니 나도 다른 여자 만날 생각을 못했던 것이겠지. 소중한 이를 잃는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천중성의 비통한 얼굴을 보고는 절절히 알 수가 있었거든.]
[그랬군요.]
천람성의 성주들은 다들 고통 속에서 살았다. 황룡대제에게 뿌려진 대마종의 저주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룡의 후손들은 모두 지독한 생의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둘이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리 끝나니 나도 마음이 허하더구나. 선화가 낳은 겨우 3살짜리 애만이 뭔지도 모른 채 아장아장 돌아다니고... 정말 이상했어. 선화가 갑자기 요절할 줄은 나도 예상을 못했으니까.]
[그게 대마종의 저주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마종의 저주라니?]
천람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다 듣고 난 뒤 무제 곽인한이 탄식했다.
[질긴 자로군. 어찌 저주를 남겨서... 괜히 대마종이 아니었군. 그럼 황룡대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저주를 받아 고통을 겪으며 살았다는 것이 아니냐. 너까지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인가... 그런 것 같군. 아무튼 난 그 때문에 다른 여인을 만나지 않은 것 같다. 소중한 이를 잃은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보였기 때문에. 천중성처럼 되고 싶지 않아 내면에서 거부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천람도 그랬다. 다시는 소중한 이를 만들지 않으려 했는데, 인연이 생겨버렸다. 그것도 둘씩이나. 화영혜와 임여군을 잃는다면 자신은 살 수 있을까? 천람은 자신 없었다. 그 둘이 죽는다면 자신도 못 견디고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천람은 요근래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변했다.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영혜와 여군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세상을 구했는데 그 둘이 죽을 바에야, 차라리 그 둘이 살고 세상에 망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화영혜와 임여군은 어느새 천람에게 이 세상보다 더 중요해진 것이다.
[저도 무섭습니다. 더는 잃고 싶지 않은데...]
[그렇겠지. 한번 잃어봤는데 또 잃는다니, 지옥이 배로 몰려오겠지. 그래서 우리가 만난 것 아니겠느냐. 난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구나. 난 선화의 장례가 끝난 뒤 강호를 떠나 이곳에 은거해 끝을 맞이했다.]
[허면, 왜 이런 안배를 해놓으신 겁니까.]
[내가 뭔가를 봤거든. 먼 훗날 벌어질 사태를... 그것도 마교와 연관된 거였는데 너도 그러니 확실히 인연은 인연인 것이지. 내 유지를 잇는데 누구보다 가장 적합한 녀석이 찾아왔으니.]
[무엇을 보셨길래...?]
[지금 구마종이 부활하고 대마종이 부활하지 않았느냐?]
[아, 그거를... 보신 겁니까? 3백년 전에?]
보통 영험한 게 아니었다. 괜히 무제가 영신도사라 불린 게 아니었다. 당시 풍수와 지리는 물론 혼과 앞날까지 본다고 했으니까.
[이곳에서 은거하며 난 참선에 빠졌다. 그런데 자꾸 뭔가 보이는거야. 전부터 보던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세상이 도탄에 빠진 것이 생생히 보였다. 우연인가 싶었는데 계속 그러더구나. 그래서 결코 우연이 아니라 여겼고 참선을 거듭해 결국 먼 훗날 구마종과 대마종이 부활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단하시군요! 어떻게 3백년 전에 그런 걸...]
천람은 감탄했다. 이건 도저히 범인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제는 확실히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였다.
[너도 아주 오랫동안 참선하면 그럴 수 있다. 아니, 누구나 할 수 있지. 하지만 다들 안 할 뿐이다. 너무 오래 걸리고 진전이 없거든. 나도 수십 년을 한 끝에서야 겨우 봤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후는 어떻게 됩니까? 저희가 이길 수는 있는 겁니까?]
그게 제일 궁금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하지만 무제의 대답은 아쉬웠다.
[그것까지는 나도 모른다. 결과는 볼 수 없었어. 아마도 정해져 있지 않은 거겠지. 네가 만들어가야 한다.]
[제가 어떻게... 자신이 없습니다. 구마종도 강한데 대마종은 정말 어찌 상대해야 할지...]
[그러니 우리가 만난 것 아니겠느냐. 난 구마종과 대마종을 해치울 수 있는 자가 오기를 원했고, 그렇게 안배했다. 어중이 떠중이나 잡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큰 바위로 입구를 막아놓고, 들어오는 것도 어렵도록 근 천년내공에 이르러야만 철문이 열리도록 문진을 새겨놨지. 그러니 여길 들어온 자는 당대 천하제일인이거나 그의 거의 근접할 것이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여긴 구파의 장문인들이나 세가의 가주들도 들어오지 못 한다. 삼대 무신검이나 무극, 검성 등 몇 사람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악한 놈에게 들어가면 안 되니 정의로운 녀석이 들어올 수 있게 도교의 선문진을 새긴 것이고, 마교 놈들은 여길 발견해도 들어올 수 없었을 거다.]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무제님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몇 사람 있습니다만...]
[아니, 네가 왔으니 네가 받아야지. 그래, 넌 지금 부담을 느끼는구나. 하지만 네가 못하면 다른 이들도 못 한다. 혼자서 다 짊어질 필요는 없다. 최선을 다했는데 안 되면 마는거지 뭐.]
[하지만...]
[그리고, 내가 남긴 것을 받는다면 넌 배로 강해질 것이다. 내가 그 당시 천하제일인이 된 비결이 담겨 있으니까.]
[비결이라면... 파훼?]
[그래. 그것이 너에게 갈 것이다. 좀 더 얘기하고 싶지만 이제 시간이 다 되었구나. 반가웠다. 내가 사랑한 선화의 후손이여... 그녀의 후손이라 그런지 내 후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무제 곽인한은 웃으며 사라졌다. 천람은 눈을 떴다.
“감사합니다... 무제 할아버지...”
그리고 두 눈에 영성이 생겼다. 무제 곽인한에게 받은 영신안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임여군은 잠깐사이 달라진 듯한 천람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천람은 그녀를 보고는 웃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네? 무슨 소리에요? 방금 전 꽃에 손을 댔잖아요.”
“그랬나... 찰나의 순간이었군.”
찰나였는데 아주 오랫동안 얘기한 것 같았다.
“근데 천랑이 손을 대자 꽃송이가 다 부스러져서 흩날렸어요.”
천람이 보니 유체의 눈에 핀 하얀 꽃 한 송이는 가루가 되어 없어져 있었다.
“응. 하지만 꽃에 담긴 무제의 유산은 받았어.”
그 말을 하고나자 유체도 서서히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명을 다 했으니 유체까지도 이승을 떠나는 것이다.
천람은 소멸하는 유체를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무제의 유산을 받았으니 진전을 이었다 할 수 있었다. 스승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천람성의 금지로 들어가 천중성 할아버지와 선화 할머니의 묘소에 가서 꼭 말씀드릴게요. 무제 할아버지가 도와 주셨다고...”
천람이 그런 말을 하며 절을 올리고 있자 임여군이 눈치를 보다 얼른 옆에서 같이 절을 했다. 어쩐지 해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천람의 정인으로서 인정받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절을 마시고 일어나 임여군이 물었다. 천람은 영성의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놀랐다.
“대단하군요! 무제 님을 만나 얘기까지 했다니!”
“생각보다 말씀이 굉장히 많은 분이셨어. 처음에는 지쳐 죽는 줄...”
“그래도 기연을 얻었잖아요. 뭘 얻은 거예요?”
“영신안. 무제 할아버지를 당대 최강으로 만들었던 눈이야.”
지금은 천람의 두 눈에 그 힘이 담겨 있었다.
영신안. 상대의 모든 무공을 파훼하는 절대안이었다.
“무제 할아버지는 이 눈으로 3백년 전 천하제일인이 되셨던 거야. 비무행에서 자기보다 강자를 계속 이겼다고 했는데 그 비밀이 이 눈에 있었네.”
“그런 눈을 얻었으니 이제 당신이 최고네요!”
임여군은 기쁘기만 했다. 아빠의 목숨값으로 생긴 장보도에서 얻은 것이 자신의 정인에게 큰 힘이 되게 생겼으니 당연히 기분 좋고 기쁠 수밖에 없었다. 천람도 웃었다.
“이거 이마종에게 고마워해야 되네.”
“왜요?”
“그놈 아니었으면 이거 무극이 가졌을 거잖아.”
“아, 맞다! 그러네요! 이마종에게 방해받지 않았다면 무극 대협 등과 여기 왔을 테니까. 그는 틀림없이 여길 발견해서 그 눈을 얻었을 거예요.”
“맞아. 내가 하는 걸 그놈이 못할 리 없으니까. 이 눈은 무극의 것이 되었겠지. 허, 나참. 내가 구마종에게 도움을 받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르겠어.”
“그게 다 날 받아줬기 때문이에요. 나 아니었음 여기 오지도 않았잖아요.”
“맞아. 우리 여군이가 복덩이야.”
끌어안고 입맞춰주자 임여군이 얼굴을 붉히며 좋아한다.
“좋아요. 더 해 줘요.”
“그래.”
천람은 계속 입맞춤을 해주었다. 임여군은 행복하기만 했다. 이제 정인에게 좀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이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 조금은 당당해져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천람의 한쪽 눈이 번쩍였다. 영신안-절대안이 발동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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