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곽인한
“아래는 나 혼자 들어가는 게 좋겠어. 자칫 위험할 수 있으니...”
“저도 들어갈게요.”
임여군이 깊이 파인 땅속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말려도 듣지 않겠단 뜻. 천람은 한숨이 나왔다. 영혜도 그렇고 여군도 그렇고 고집이 좀... 하긴, 그렇게 한 고집하니 혼인도 하기 전에 마음 주고 순결까지 준 거겠지만.
“알았어. 대신, 내 옆에 꼭 붙어있어.”
“네.”
말은 잘 들어. 고집도 부릴 때만 부리는 것이다. 아무 때나 고집 부리면 헤어져야지. 결정적일 때는 말을 잘 들으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천람은 여군을 옆에 안은 채 땅속으로 내려갔다. 가볍게 착지하고 옆을 보는데 또다시 벽에 박혀 있는 기이한 철문이 보였다. 천람은 의아했다.
“이건 뭐지?”
뭔가 괴랄한 것들이 문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임여군이 유심히 보고는 말한다.
“무슨 도교의 문진 같은데...”
“진법?”
“네. 문에 거는 진법으로 예전 책에서 본 것 같아요. 일부 도교에서 도문을 지키기 위해 이런 것을 했다고 써 있었어요.”
“무제가 도교의 인물이었나?”
그런 얘긴 없었는데.
어쨌든 천람은 신룡강기를 꺼내 철문에 보내보았다. 신룡강기는 영험한 것이나 사특한 것에 반응하는 것으로 진법이나 귀문진, 기문술식 같은 것에 효과가 좋았다.
영험하게 생긴 신룡이 휘돌며 철문에 닿았다. 천람은 신룡을 통해 철문에 그려진 문진의 역할을 알았다.
“깨끗한 기운만이 문을 열 수 있게 하는군.”
“그래요?”
“응. 마기나 사특한 힘에는 열리지 않도록 해둔 거야. 진짜 철저하게 안배했네.”
“마교 손에 유산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셨나봐요.”
“그럴지도 모르겠어.”
가끔 사악한 자들이 엄청난 기연을 얻곤 했다. 그때마다 무림은 항상 피바람이 부는 혈사가 일어났다.
“무제는 나쁜 자들이 자기 유산을 얻어 혈사를 일으키는 것이 싫었던 것 같아. 그러니 이런 식으로 해둔 거지. 이러면 아무리 강한 자라도 악인은 이 문을 열 수 없거든.”
“그러니까 바위를 들게 해서 강자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이 문을 통해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삼백년 전 천하제일인인 무제의 유산을 얻을 수 있는 거군요.”
“그렇지.”
“그럼 장보도는 보통 사람에겐 전혀 소용이 없었겠네요. 저 혼자 왔음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아니, 여기를 발견하지도 못했겠죠. 근데 왜 장보도를 아빠가 얻게 했는지... 좀 원망스러워요. 그것만 아니었어도 아빠는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세상 일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인생이었다. 길 가다 괜히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아 죽는 사람도 있고, 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져도 사는 사람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운명은 오직 하늘만이 안다고 하는 것이다.
“어쩔래? 문 열어볼까?”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봐야죠. 뭐가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요. 우리 아빠 목숨 값인데. 천랑한테 도움되는 유산이었음 좋겠어요. 그럼 우리 아빠도 좋아하실 테니까.”
“그래. 열어보자.”
천람은 두 손을 철문에 대었다. 그리고 진기와 내공을 쏟아부었다. 문에 있는 기괴한 문진들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천람은 온 공력을 다 쏟아부었다.
“으으으윽!”
천녀옥금지체의 힘으로 기혈이 고속 순환하며 끊임없이 내공을 쏟아냈다. 급기야는 내공을 증폭하며 더 많은 공력을 넣어보냈다. 그제야 문진이 제대로 맞춰지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문이 열렸다.
그그그긍!
“아! 천랑! 문이 열리고 있어요!”
임여군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천람은 문이 다 열리자 그제야 내공을 거두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내공을 쏟아부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모조리 다 넣어버렸으니까. 천람은 순간 녹초가 되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와아, 정말... 무제! 대단하다!”
이렇게까지 들어오기 어렵게 해놓다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으면서도 감탄이 나왔다. 대체 뭘 숨겨놓았길래...? 더더욱 궁금하기만 했다.
“천랑, 괜찮아요?”
“응. 잠시 공력의 공백이 생겼을 뿐이야.”
모든 내공을 다 쏟아부어서 한순간 텅 비었지만 다시 차올랐다. 천람은 뭔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공력이 다 빠져나간 후 다시 채워지는 과정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룡무상공과도 관계가 있어 보였다. 지고무상에 이르는 경지를 살짝 엿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천람은 열린 철문을 보고는 임여군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자. 내 옆에 딱 붙어있어.”
“네. 조심할게요.”
둘은 어두운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기관장치 같은 것이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함정도 없었다. 천람과 임여군은 편안하게 컴컴한 동굴을 지나 어느 동혈에 다다랐다.
“어? 저기 뭔가 있어요.”
임여군이 말했다. 야명주가 천장 곳곳에 박혀서 어느 정도 환했는데 그 아래 무슨 형체가 있었다. 천람은 바로 알아차렸지만 일단 가서 자세히 보기로 하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했으니까.
“유체예요. 무제일까요?”
“아마 그렇겠지.”
유체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목내이처럼 바짝 마른 상태였다. 손만 대도 부서질 것 같아 둘은 근처에서 보기만 했다.
‘황룡대제 할아버지와 비슷하군. 무제는 대체 뭘 남기고 싶어서...’
저런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특이한 것은 유체의 한쪽 눈에 하얀 꽃 한송이가 피어 있다는 거였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되죠?”
“뭔가 있는지 찾아보자.”
천람과 임여군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뭔 글자를 적어놓은 석비도 없었고 유지를 담은 책 같은 것도 없었다. 한참 더 찾다가 둘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어쩌죠?”
“글세...”
막상 와보니 눈에 꽃이 핀 가부좌 튼 유체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천람도 알 수 없었는데 유체의 눈에 핀 하얀 꽃 한 송이가 마음에 걸렸다.
저거 꼭 시균 같잖아. 황룡대제 할아버지의 가슴에서 떼어낸 용형혈지...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저건 버섯이 아니라 꽃이니 시화라고 해야 하나.
“난 모르겠어요. 천랑이 알아서 해요.”
임여군은 유체를 건드릴 수 없었다. 경건하면서도 어딘가 오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람에게 맡겼는데 천람도 고민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눈에 핀 꽃에 비밀이 있긴 한 것 같은데... 내가 건드려도 될까 모르겠어. 자고로 기연에는 임자가 있다고 했으니까.”
“그게 당신이죠. 당신 아니면 누가 여기 들어오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에도 아쉽잖아요. 뭔가 해봐요. 우리 아빠 목숨값인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요. 천랑이 뭐라도 얻었으면 좋겠어요.”
임여군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천람도 하는 수 없었다. 일단 다가가 유체 앞에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절을 할까도 싶었는데 가문이나 사문의 존장이 아니니 함부로 할 순 없었다.
“유해에 손을 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유체의 눈에 핀 하얀 꽃 한 송이에 손을 대보았다. 동시에 파아앗! 하면서 천람은 한순간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만날 수 있었다.
아주 무한하게 드넓은 하얀 공간에서 천람은 하얀 도포를 입은 중년인과 대면했다. 그는 근엄하면서 잘 생긴 인물이었다.
그가 뒷짐을 진 채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천람이라 합니다.]
[나를 만나다니 대단하구나. 누구의 후인인고?]
[황룡대제의 후손입니다.]
그 대답에 중년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람성?]
[네.]
[이런 빌어먹을! 왜 하필 천람성 놈이야!]
[예?]
천람은 순간 당황했다. 근엄한 중년인이 갑자기 표정 돌변해서 괴팍해졌으니까. 뭐야, 이 사람은...?
[다 되도 천람성의 후손 놈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이런 제기랄! 하필 왜 천중성의 후손이냔 말이다!]
[아...]
천중성은 천람의 12대조 할아버지였다. 3백년 전 천람성의 성주였던 것이다.
[육시럴! 하필 천중성의 후손이 내 소명을 얻게 되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중년인이 하도 난리를 쳐서 천람은 그냥 멍하니 있었다. 이만 돌아갈까... 싶기도 했다. 뭔 필유곡절인진 몰라도 좋은 인연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데 중년인이 다시 쳐다보며 말한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아직은 잘...]
[내가 무제 곽인한이다.]
[예. 후배가 인사드립니다.]
역시 무제가 맞았군. 어쨌든 오래 전의 대선배이니 다시 한번 천람은 공손히 인사했다.
무제 곽인한이 혀를 차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천중성의 후손이 나를 찾아오다니, 운명도 가혹하군.]
[무슨 연유가 있으신지...]
[천중성에게 내 여인을 뺏겼다.]
[아...]
이런, 보통 원한이 아니잖아. 왜 난리를 쳤는지 알 것 같았다. 자기 여자 뺏은 놈의 후손이 왔는데 화가 안 날 리가 없지.
[그래서 지금 네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 여인이 낳은 아이가 계속 후손을 이었을 테니.]
[좋은 일은 아니군요.]
[뭐라?]
[전 태어나고 싶지 않았거든요.]
천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태어날 때로 돌아가 선택할 수 있다면 천람은 태어나지 않는 것을 선택할 것이었다. 삶은 정말 지독한 고행이었으니까.
무제 곽인한은 묵묵히 천람을 보다 말했다.
[별로 좋지 않은 인생을 살았구나.]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봐야겠군.]
[...싫은데요.]
[얼굴에 그 밉상 천중성이 있군.]
[제가 들어봐야겠습니다.]
[좋다. 천중성과 얽힌 악연을 들려주마. 그러니까 내가 처음 강호에 출도했을 때...]
무제 곽인한이 얘기를 시작했고 천람은 곧 후회했다. 말이 너무 많잖아...
[천람성에서 우린 처음 만났는데 서로가 첫눈에 반했다. 그랬는데 천중성 놈이 훼방을 놓으며...]
언제 끝나지...?
천람은 지쳐버렸다.
[그래서 난 내 여인을 뺏겼고... 미친 듯이 비무행을 하고 있을 때 아이가 태어났단 소식을 들었다.]
[......]
[난 더욱 광분하여 비무행을 했고, 그 결과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너 자냐?]
[네? 아, 아닙니다...]
얘기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천람은 하품이 나오려 했지만 참아야 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셨군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천람은 그제야 해방감을 느꼈다. 다시는 말 많은 사람과 얘기하지 않으리.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아무튼, 무제 곽인한의 장대한 오십 년 일대기가 끝난 뒤에야 천람도 겨우 말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런데 노선배님의 말씀 중에 어폐가 있었습니다.]
[뭐가 말이냐?]
[사랑하는 여인을 뺏긴 게 아니라, 그 여인이 천중성 할아버지를 택한 것이 아닙니까.]
[그게 그거지! 천중성 그놈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선화는 나와 혼인했어! 근데 그놈이 날 훼방놓기 위해 끼어들어 선화를 나꿔챈 거야!]
선화는 3백년 전 천하제일미였다. 신유하나 화영혜 같은 절세미인이었던 것이다. 천람의 12대조 친할머니이기도 했다.
[선화 할머님께서 택한 것은 천중성 할아버지였습니다. 그게 사실이구요. 선배님께선 괜히 미련을 가지신 겁니다.]
어찌 보면 천람과 신유하, 무극과의 관계와도 비슷했다. 무제는 선화를 좋아했지만 그 선화가 택한 것은 천중성이었다. 근데 뺏겼다고 이 난장을 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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