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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백만잔의 서재

슈퍼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 2 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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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백만잔
작품등록일 :
2022.12.11 22:06
최근연재일 :
2023.10.17 11:33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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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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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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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3)

DUMMY

Sp 1-4. '일그러졌더라도' 우리들의 영웅



프로스트는 기동기사단이 이룬 게 자신과 그 동료들의 노력한 결과라 여겼지만, 그건 반만 맞은 이야기였다.

그들의 여정도, 고난도, 그 끝에 찾아온 행복과 명예도.

모든 일의 배후에는 현자들의 설계가 있었고, 그들의 여흥 거리였다.

현자들에게 002 기동기사단은 공연 거리에 불과했고, 선량한 사람들을 반군으로 몰아 기동기사단이 치게 했다.

프로스트는 진실을 알고 격노했지만 그건 무의미한 분노였다. 현자들에게 칼끝을 들이대기는커녕 대결조차 성립시키지 못했으니까.

무엇보다, 프로스트는 10년 넘게 기사단장으로 있으면서 지켜야 할 게 너무 늘어났다.

아내와 딸. 옛 전우, 현재의 부하들.

검을 겨누면 현자들은 종이 위의 글씨를 지우듯 쉽게 그들을 없애버릴 것이다. 프로스트는 그 뒤에 마주할 현실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현자들이 제시한 거래를 받아들였다.

프로스트는 역사에 학살을 지시한 범죄자가 아닌, 반란을 막은 영웅으로 기록되었다.

현자들이 '장난'을 쳐둔 마을은 필시 이그니스가 살던 마을만이 아니리라.

기동기사단이 반란 진압을 지시받아 출정길에 오른 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프로스트는 그것까지 조사하진 않았다.

조사할 용기가 없었다. 의심을 진실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더 많은 죄악감에 짓눌리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그게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았겠지."

"뭐, 그렇지."


프로스트는 늦은 밤에 찾아온 불청객에게 힘없이 웃어 보였다.

불청객은 둘.

하나는 아는 얼굴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름만 들어본 '머리'였다.

아는 쪽은 프로스트에게 죄책감을 포함한 온갖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크. 이그니스의 삼촌.

본래라면 반군으로 몰린 마을에서 다른 모두와 함께 죽었어야 했던 사내.

그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에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프로스트는 나크가 살던 마을을 초토화하는 지령서에 도장을 찍었다.

알았든 몰랐든, 현자의 입김이 닿았든 아니든.

마을을 멸망시킨 책임자는 도장을 찍은 사람이다.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나크가 복수를 원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줄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크에게 현자들의 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전했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단 1초도 쓰지 않았다.

나크의 판단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모두 전한 뒤, 마음의 짐을 던 프로스트는 가벼워진 어조로 나크의 동행인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못 본 사이에 엄청난 거물하고 알게 됐나 보네. 이거 영웅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겠는걸."

"너무 띄워주지 말라고. 나도 이 '대가리'는 오늘 처음 봤거든. 게다가 만나서 반가운 머리도 아니고."

"그야 그렇겠지. 자주 봐서 좋을 머리는 아니야."


구박에 가까운 평가를 받은 두 번째 불청객은 목 대신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머리로 불만을 표했다.


"몇 번이고 볼 얼굴이 아니라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건 실례이지 않은가."


그는 죽음의 기사, 듀라한.

죽음이 예정된 사람 앞에 나타나 최후를 고하는 자.


"듀라한과 함께 찾아왔다는 거니까, 네가 날 죽인다는 거겠지?"

"그럴 예정은 아니었는데, 그럴 예정으로 만들었지."

"뭔 소리야 그건 또."

"무슨 소리고 뭐고. 원래는 네가 아니라 내가 죽는 걸 알리러 왔거든."


뒷말은 듀라한이 속에서 우러나 푸른 빛마저 보이는 차디찬 한숨을 토해내며 이었다.

물론, 머리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푸른 빛의 한숨은 앞이 아니라 위로 쏘아졌다.


"말도 마라. 지긋지긋할 정도로 이 일을 해왔다만, 복수하겠단 일념 하나로 살생부의 순서를 뒤바꾼 건 이 녀석이 처음이다."

"그게 가능해?"

"뭐라고 답해주길 바라는 거냐. 처음 봤다니까. 묻지 마."


언데드라 쌀쌀맞나. 프로스트가 무심결에 시답잖은 딴죽을 떠올린 사이, 뭔가 계산을 끝낸 나크는 뒤로 돌아 계단 쪽으로 향했다.

꽃병으로 프로스트의 머리를 깨버려서 복수를 달성하기 위함일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나크는 꽃병을 지나, 그 옆에서 대기 중이던 듀라한의 유령마 위에 올라탔다.


"엇차."

"어?"

"어? 는 또 뭐요. 죽기 나으리."

"또 뭐는 또 무슨 소리고. 애초에 죽음의 기사를 죽기로 줄여 말하지 마라. 품위 없어 보이잖아."

"그걸 언제 일일이 다 부르고 앉았어. 그보다 슬슬 갑시다."

"가긴 어딜 가. 복수 안 하나? 도장 찍은 장본인이 여기 있잖나."


그건 맞는 말이지. 프로스트도 그렇게 한마디 거들었다. 자기 목숨이 걸린 일치고는 맹안 얼굴로 보인 반응이었으나, 그만큼 나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머리에 부하가 걸렸다는 증거였다.


"도장 찍었는데 뭐 어쩌라고."


그리고 나크는 둘에게 바보냐는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프로스트가 마을을 없앨 생각으로 도장을 찍었나? 그건 아닐 텐데."


나크는 실행범의 목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복수의 칼끝이 향하는 곳은 어디까지나 악의를 가지고 마을이 멸망하기를 바란 이들을 향해 겨눠져 있었다.


"마누라가 죽기 전에 그랬어. 미워할 사람을 착각하지 말라고. 이야, 역시 말부터 들어보길 잘한 거 같아. 엉뚱한 녀석한테 복수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아니지. 그건 아니지."


듀라한은 갑옷 안에서 죽을 예정인 사람이 기록되어 있는 살생부를 꺼내 보였다.


"나는 이 책에 적힌 순서에 따라 죽음을 고한다. 그런데 네가 죽기 전에 복수하겠다고 말했더니 책에 적힌 이름순서가 바뀌었고. 나는 이 기사에게 죽음을 고하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

"어. 그렇지. 덕분에 빨리 왔어. 큭큭큭. 고마울 따름이야."

"나는 인과가 뒤집혔다고 말하는 거다. 원래라면 사람의 다리로 오지도 못할 거리를 달려왔다. 네가 오늘 복수를 하는 건 불가능했어."

"살생부의 순서가 뒤집히지 않았다면, 말이지?"

"애초에 나는 죽음을 고하는 자다. 복수자 전용 마부가 아니야! 근데 뭐? 말을 들어보길 잘해? 이제 와서 복수 대상을 바꿔?"

"그렇게 꼬우면 말이야."


나크는 귀찮다는 티를 역력히 내며 손가락 끝으로 살생부를 가리켰다.


"지금 펴서 확인하면 되잖아?"

"윽?"

"어, 라아아아아? 뭐야, 천하의 죽기님이 쫄으셨나? 살생부 이름이 또 갈아치워져 있을까 봐?"

"건방지기는. 잠깐 있어 봐!"


듀라한은 씩씩대며 살생부를 펼쳤다.

것 봐라. 내가 맞지 않느냐. 살생부의 순서는 바뀌지 않았다.

당연히 이어져야 했던 그 말이, 어째선지 나오지 않았다.

목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가 뱉은 대사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확인 채 묻는 건데. 혹시 그대 이름이 고드인가?"

"아니. 프로스트인데."

"그러면 안드로메아?"

"그것도 고드도 백색마탑에 죽치고 있는 필두 삼현자 이름인데."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사간 아바르가! 맞지? 맞다고 해주면 안 될까? 응? 이게 맞다고 타협하는 건 어때?"

"대체 뭘 가지고 흥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필두 삼현자 중에 뱀처럼 길쭉한 놈 이름 같은데. 동방 제국 출신이거든."

"거짓말이라고 해줘어어어······."


듀라한은 우울감에 빠져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사람의 죽는 순서를 기록한 살생부에서 나크와 프로스트의 이름은 뒤로 밀려나 있었다.

대신 페이지에 기록된 건 인간의 형태마저 버리며 힘을 갈구한 백색마탑의 정점, 필두 삼현자들의 이름이었다.


"대충 이해한 거 같으니 이제 씨발 좀 갑시다, 기사 나으리. 불바다로 만들 마탑이 있다고."

"아아, 죽겠네······."

"불사자가 죽겠다 말해도 말이지."

"우울해···. 묘비 위의 민들레가 되고 싶어······. 훌쩍."


안쓰러울 정도로 처량하게 앓는 소리를 낸 후, 듀라한은 먼저 유령말에 올라탄 나크를 뒤로 밀었다. 그러고는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가 안장 앞쪽에 내려앉았다.


"자, 잠깐! 정말로 가려는 거야? 복수는 어쩌고! 내가 도장을 찍었어. 마을을 없앤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추락할 거라면 바닥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추락해. 일그러졌더라도, 그게 우리 애가 좋아한 영웅 나으리니까."

"뭐?"

"우리 집 애는 말이야, 기사 이야기를 좋아했어. 그 아이는 한때 농부였던 산도적 따위에게 죽는 게 이야기의 끝이길 바라지는 않았을 거야."


그 목소리에는 한계까지 눌러서 막은 울분이, 한이, 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프로스트는 그 목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나크가 복수 대상을 현자들로 돌린 건 그의 아이 때문이었다. 아이가 좋아했던 '기사 이야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감정을 쏟아내지 않았을 뿐이다.

프로스트는 나크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가족이 살아있거나 최근까지 함께했다면, 나크에게 듀라한이 찾아오거나 복수를 갈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반군 토벌 지령에 도장을 찍은 자가 그의 가족에게 명복을 빌어줄 수는 없다.


"나크."


그러니 적어도 그에게 운이 깃들기를 바랐다.


"살생부에서 밀려났다니 오늘 죽지는 않겠고, 다치지 말고 돌아와라. 밥이라도 살 테니까."

"···흥. 오겠냐. 현자들 죽이는 즉시 대역죄인으로 찍힐 텐데."


나크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복수 대신, 자기 아이의 꿈을 프로스트에게 떠맡긴 채.

일개 농부였던 그가 기사단장이었던 프로스트조차 이기지 못한 필두 삼현자를 어떻게 쓰러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이날 필두 삼현자가 누군가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이 인류왕국 전체를 흔들었다는 사실이다.


***


Sp 1-5. 그리고 시대가 변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자의 시대의 종말은 현자들을 받들어 모시는 굴욕적인 관계였던 미하엘 왕이 왕권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주도권을 쥐고 있던 건 현자였더라도 현자들은 왕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게 돕고 있었다.

필두 삼현자의 죽음은 현자들의 단결을 현저히 저하시켰고, 귀족 파벌에 점차 주도권을 빼앗기는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게 미하엘 왕의 아들, 후일 기둥왕이라 불리는 희대의 폭군인 왕세자 그림의 즉위였다.


"현자를 모두 죽여라. 재산을 빼앗고, 백색마탑을 무너트려라. 이 나라에 왕궁보다 높은 건물은 필요 없다."


그림 왕의 정치는 그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애초에, 20년이 조금 넘는 재위 동안 그림 왕이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린 건 이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다. 공식적으로만 보면 말이다.


***


"필두 삼현자를 누가 쳐 죽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걸로 칠 거야."


이미 은퇴한 프로스트와 당시 군 총사령관, 재무대신, 궁정 마법사를 비밀리에 부른 그림 왕은 그렇게 말했다.


"현자는 물론이고 귀족 파벌의 불만도 상당한 수준까지 올랐어. 칠 생각도 없는데 지레 겁먹은 거지. 이런 상황에서 민간인이 현자를 죽였다는 게 알려지면 화살이 이상한 데로 향할 거야."

"민간인? 설마 범인을 특정하신 겁니까?"

"앉아. 총사령. 특정이고 뭐고 그날 백색마탑에 숨어 들어가는 산도적 놈을 하나 봤을 뿐이야."


그 말에 총사령관과 프로스트는 입술을 비틀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봤다면 그냥 구경만 했을 리가 없다.

민간인이, 칼이나 도끼를 조금 다룰 줄 아는 나크가 필두 삼현자를 죽였다면 비상식적인 힘이 필요했다.

여기서 배후에 그림 왕이 있다면 사건의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그림 왕은 왕족인 동시에, 현자들이 '판타지에서 가장 센 생물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극한의 저편까지 강화한 인간이었으니까.

현자들 입장에서는 기르던 개에게 물려 죽은 멍청한 꼴이었으나, 대책도 생각지 않고 즉흥적으로 쾌락과 탐구를 추구하던 현자들다운 결과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우려하시는 거라면 제가 총사령으로 있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응? 아니. 전혀 걱정 안 하는데. 그냥 귀찮아서 그래."

" "


왕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눈을 보고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림 왕에게 귀족의 불만이나 쿠데타는 국가 중대사가 아니었다. 귓전에 날아다니는 모기 수준의 문제였다.

설령 인류왕국의 모든 귀족이 들고일어나도 혼자서 다 죽일 수 있다.

졸음기가 섞인 그림 왕의 목소리엔 그런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니들 다 죽으면 국정을 나 혼자 해야 하잖아. 그건 귀찮지. 시간 낭비고."

"그, 그야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재무대신은 소나기라도 맞은 것마냥 식은땀으로 푹 젖은 얼굴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애초에 국정이란 게 혼자 되는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건 국정이 아니라 집안일이라고 해야죠."

"입이 뚫려있어서 말은 잘하네. 저기, 목이 비틀어져도 제대로 말할 수 있나 시험해볼까?"

"히익!"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다음 재무대신 후보가 있으면 모를까. 왜 죽이겠어."


농담이라고 했지만, 재무대신은 그렇게 들을 수 없었다.

왕은 현자 학살을 지시한 뒤에 단독으로 움직여 현자를 도륙했다.

그런 왕의 입에서 '목을 비틀겠다'라는 말이 나오면 재무대신으로서는 겁부터 먹는 게 당연했다.


"아무튼 오늘 너희를 부른 건 너희가 작정하면 그날 있던 일을 알아낼 수 있는 녀석들이라서야. 지금은 아주 즐거운 사냥 시즌이니까, 괜한 일로 화를 자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


서로 잘 처신하자. 그림 왕은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모였던 인원들을 해산시켰다.


"아, 영웅. 넌 해산하지 말고 잠깐 남아."


단 한 명, 프로스트를 제외하고.


***


Sp 1-6. 왕이 묻다



왕은 마침 나온 차를 마시며 한동안 말없이 창밖의 경치를 감상했다.


"흐음. 긴장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왕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은 프로스트의 바로 옆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왕은 프로스트의 시야가 닿는 창가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으니까.

바람은 일지 않았다. 마력이 요동친 조짐도 없었다.

숙련된 대장장이가 불의 온도를 착각하지 않듯, 기사단장이었고 마법 도구를 여럿 개발한 프로스트가 이 두 조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설령 놓쳤더라도 전이술이라면 발동 후의 흔적을 쫓을 수 있어야 했다.

이 시점에서 뼛속까지 무인인 총사령관은 경악하고 재무대신은 기절했겠지만, 프로스트는 조금 놀란 것 외에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뛰어난 실력이시군요. 폐하. 감탄했습니다."

"아무렴. 필두 삼현자에게 자살 공격을 감행하려 했던 녀석보다야 뛰어나지."


그 발언에 프로스트는 무심코 나크를 떠올렸고, 왕은 느닷없이 그의 머리를 붙들었다.

동시에 신경을 스치는 이질적인 감각.

왕은 손을 통해서 프로스트의 기억을 빨아들인 뒤, 만족했다는 듯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나크라는 이름이었나."

"으윽. 대체 뭘 하신 겁니까 폐하."

"읽고 싶은 기억이 있어서 말이지. 현기증은 곧 사라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폐하······. 그의 이름을 알아서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별로 죽이려는 거 아니야. 나로서는 훈장을 내리고 싶을 지경이라고. 그치만 뭐, 아센에서 산도적을 하는 녀석에게 훈장을 주는 건 아무래도 그림이 안 나오지."

"아센! 북동부의 아센 지방 말입니까?"


프로스트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필두 삼현자 살해 이후 나크는 종적을 감춰 프로스트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정보의 출처는 알 수 없어도 왕이 아센을 지목했다면 거기에 나크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멋대로 판단해라. 내가 감으로 찍은 말을 네가 멋대로 주워들었을 뿐이니."

"···그렇군요. 그러면 저는 이것과 별개로 폐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것을 축하할 겸 선물을 바치고 싶습니다만, 혹 폐하께선 원하는 진상품이 있으신지요."

"흐응, 그렇게 나오는 거냐. 그래. 아주 없지는 않지."


그림 왕은 '나크가 현재 있는 곳'을 알려준 것과 완전히 별개라고 다시금 선을 긋고서 입을 열었다.


"전부터 궁금했지. 필두 삼현자가 죽은 뒤, 너는 언제든지 놈들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폭로할 수 있었어."

"그랬다면 명분을 얻은 귀족들에 의해 현자 학살이 가속됐을 테고, 현자와 무관한 사람들까지 희생당해 내전으로 번졌을 지도 모르죠."

"맞아. 그리고 내전이 일어났으면 나는 난리통에 사냥감을 놓쳐 무척 실망했겠지."

"폐하, 뭘 숨기고 말씀하시는 걸 은근히 좋아하셨군요. 곤란했던 건 따로 있으셨지 않습니까?"

"···너같이 감이 좋은 녀석이 은퇴했다는 게 유감인걸."


귀족의 명분을 얻었다면 그건 현자를 질타하기 위해서만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자 때문에 기를 못 펴고 있었을 뿐이지, 귀족들도 이권이 걸려 있다면 얼마든지 악랄해질 수 있었다.

프로스트가 폭로하면 그간의 반란군 토벌이 아무 의미도 없는 민간인 학살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도장을 찍은 프로스트가 죄책감을 느꼈듯, 그가 진실을 폭로했다면 반군 토벌의 최종 책임자 또한 책임 추궁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군 토벌의 최상이자 최종 책임자는 누구인가.

반군 토벌 최종 보고서에 옥새를 찍은 전 왕, 미하엘이었다.

만일 귀족들이 이를 알고 물고 늘어졌다면 현자들은 물론 왕권까지 실추시켰을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왕가는 네게 빚을 진 셈이지. 반군 토벌 공적이 사라지겠지만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한 자로서 재평가됐을 텐데."

"그래서 사람 사는 게 편해진다면 얼마든지 폭로했겠지만, 거기서 이득을 보는 건 귀족뿐이잖습니까."

"그래서 폭로하지 않았다? 그럴 리 없지."


왕의 눈에 상대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광채가 감돌았다.


"너와 관련된 옛 보고서는 다 확인했다."

"놀랐습니다. 제게 높으신 팬이 계셨을 줄이야."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이 득을 봤다고 하지만 네가 한 일은 너와 네 주변 사람을 위해서였을 뿐이지."

"그랬죠. 나라에서 받은 예산이 워낙 적었던지라.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했죠."

"불순물 없이 순수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처럼?"

"···짧은 시간 사이에 깊게도 들여다보셨군요. 왕이 아니셨으면 스토커에 자질이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그림은 프로스트의 비아냥을 무시한 채 말했다.


"결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움직이지는 않았잖아? 이제 와서 내전에 희생당할 사람들을 걱정했다? 그건 네 캐릭터가 아니지."

"반대로 묻겠습니다만, 제가 폭로해서 명예 외에 뭘 얻었겠습니까?"

"왕관을 얻었겠지."


그 말이 나온 순간 프로스트는 입을 닫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함부로 반응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반역이나 불경죄를 물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새가 지저귀고 잎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속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한계까지 당겨졌다.


"자, 프로스트 백작. 말해 보도록. 한 번만 더 국민을 위해서라느니, 귀족만 이익을 본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하면 여기서 즉시 처형하겠다."


서늘한 초승달처럼 가는 미소를 띤 채, 왕이 물었다


"영웅이여, 왜 왕관을 쥘 기회를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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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멍청한 판타지 모음집 2 터보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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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100. 가장 높은 땅의 문 앞에서 +1 23.05.12 42 2 9쪽
124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25) +1 23.05.12 26 2 18쪽
123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24) 23.05.10 31 2 24쪽
122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23) 23.05.08 26 1 15쪽
121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22) +1 23.05.06 37 2 12쪽
120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21) +1 23.05.06 38 1 12쪽
119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20) 23.05.04 29 1 12쪽
118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9) +1 23.04.24 31 2 19쪽
117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8) 23.04.23 30 1 12쪽
116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7) 23.04.23 31 1 12쪽
115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6) 23.04.14 40 2 19쪽
114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5) 23.04.12 33 1 12쪽
113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4) 23.04.09 39 2 9쪽
112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3) 23.04.09 31 1 13쪽
111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2) +1 23.04.09 40 2 14쪽
110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1) 23.03.19 38 2 17쪽
109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0) 23.03.19 30 2 17쪽
108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9) 23.03.11 31 1 13쪽
107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8) 23.03.04 37 1 16쪽
106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7) 23.02.26 86 2 22쪽
105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6) 23.02.22 31 2 14쪽
104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5) +1 23.02.19 39 2 16쪽
103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4) 23.02.16 35 1 11쪽
»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3) +1 23.02.12 28 1 19쪽
101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2) 23.02.08 37 2 18쪽
100 Sp 001. 깊은 하늘의 창염화 (1) 23.02.07 42 1 14쪽
99 99. 브로큰 플래그 23.02.05 40 1 9쪽
98 98. 갑옷 23.02.04 33 1 7쪽
97 97. 전생자 3 / 곰 4 23.02.03 44 2 2쪽
96 96. 건강 23.02.03 37 3 2쪽
95 95. 진수식 23.02.02 41 2 10쪽
94 94. 모험가 2 +1 23.02.01 39 2 3쪽
93 93. 닭 +1 23.01.31 36 2 5쪽
92 92. 경험의 물약 +1 23.01.30 38 2 3쪽
91 91. 모험가 23.01.29 38 3 2쪽
90 90. 뛰는 놈, 나는 놈, 버그난 놈 23.01.28 32 1 6쪽
89 89. 시골 영지 아센 +1 23.01.27 34 2 8쪽
88 88. 거북이와 거북이 23.01.26 37 3 3쪽
87 87. 인 忍 어 23.01.26 36 2 4쪽
86 86. 좀비 2 +1 23.01.25 37 2 3쪽
85 85. 좀비 23.01.25 40 1 3쪽
84 84. 전생자 2 / 곰 3 23.01.25 38 2 3쪽
83 83. 전생자 23.01.24 40 2 4쪽
82 82. 흑염룡 23.01.23 39 2 2쪽
81 81. 퇴마 소녀 +1 23.01.22 41 2 4쪽
80 80. BGM 23.01.22 38 1 3쪽
79 79. 화가 23.01.22 41 1 3쪽
78 78. 양 +1 23.01.22 40 2 4쪽
77 77. 구조요원 23.01.21 37 1 4쪽
76 76. 불을 말하는 새 +1 23.01.21 40 2 4쪽
75 75. 다큐멘터리 23.01.21 41 2 3쪽
74 74. 강도 23.01.21 40 1 2쪽
73 73. 불금 23.01.21 44 1 3쪽
72 72. 기가 막힌 꿈 +1 23.01.21 37 2 3쪽
71 71. 마녀를 불에 던져라 23.01.21 39 2 3쪽
70 70. you need more practice 23.01.21 45 3 5쪽
69 69. 쥐덫 23.01.21 37 2 2쪽
68 68. Cooool 23.01.21 40 2 5쪽
67 67. 마법사의 제자 2 23.01.21 47 2 3쪽
66 66. 괴수와 짐승 23.01.21 40 2 4쪽
65 65. 최면술 +1 23.01.21 49 2 2쪽
64 64. 여고생 23.01.21 43 1 2쪽
63 63. Coool 23.01.21 41 2 5쪽
62 62. 요리 2 23.01.20 47 1 7쪽
61 61. 양아치 엘프와 트롤 23.01.20 41 3 7쪽
60 60. 히든 스킬 23.01.19 40 3 3쪽
59 59. 이불데드 23.01.18 37 1 6쪽
58 58. 죽여주는 맛 23.01.17 40 2 5쪽
57 57. 곰 2 23.01.16 41 1 3쪽
56 56. 악역 영애 23.01.15 39 2 6쪽
55 55. 추방 23.01.13 43 2 4쪽
54 54. 바다로 간 골렘 23.01.12 44 1 2쪽
53 52. 콩쥐 THE 어벤저 23.01.11 44 1 2쪽
52 51. 도시지기 23.01.10 48 2 4쪽
51 50. 과제 +1 23.01.09 48 1 4쪽
50 49. 계약 23.01.08 46 3 2쪽
49 48. 북부대공 23.01.08 46 2 3쪽
48 47. 계산 23.01.07 52 2 4쪽
47 46. 피자 23.01.06 50 2 4쪽
46 45. 카나리아 +1 23.01.05 56 2 2쪽
45 44. 트럭 처형인 +2 23.01.04 55 3 5쪽
44 43. 가고일 23.01.03 50 3 5쪽
43 42. 42 23.01.02 49 3 4쪽
42 41. 개그물 보정 23.01.01 58 2 2쪽
41 40. 스타일 +1 23.01.01 74 3 3쪽
40 39. 비밀클럽 +1 22.12.31 64 2 3쪽
39 38. 고대신과 새벽 아지랑이 +1 22.12.30 65 3 9쪽
38 37. 요리 +1 22.12.29 63 2 2쪽
37 36. 상인 +1 22.12.28 64 2 2쪽
36 35. 마법 22.12.27 60 1 2쪽
35 34. 트렌드 22.12.26 63 2 2쪽
34 33. 상태창 +1 22.12.25 65 2 2쪽
33 32. 산적 22.12.25 63 1 4쪽
32 31. 포스트 아포칼립스(였던) 22.12.25 68 3 3쪽
31 30. 서브 퀘스트 22.12.25 61 2 2쪽
30 29. 산 위의 고래 +1 22.12.25 61 2 2쪽
29 28. 마녀를 물에 던져라 +1 22.12.25 59 3 3쪽
28 27. 노래하는 검 22.12.25 67 1 3쪽
27 26. 마법사의 제자 22.12.25 62 3 3쪽
26 25. 헌팅 +1 22.12.24 65 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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