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양
"백팔양모진(百八羊毛陣)을 펼쳐라!"
고원을 누비던 지고의 패왕인 양들에게 뿔을 되찾아 준다.
누구의 피도 흘리지 않고. 상냥하게, 부드럽게.
그 이념 아래에 마왕군 사천왕 중 하나인 숫양 장군은 동족인 양 수인들을 중심으로 '양뿔 해방군'을 결성했다.
그리고는 왕국과 제국을 가리지 않고 여러 목장에 은밀히 숨어들어, 지금껏 수많은 양을 해방해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목장주들이 이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그들이 실력 좋은 모험가와 용병들을 고용해 토벌대를 조직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 토벌대가 양뿔 해방군의 거점을 습격한 게 현재 상황이었다.
"하! 진은 무슨. 양 수인 몇 명하고 털 덩어리 양 떼밖에 없······."
덩치 좋던 용병은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한 채 양에게 받혀 멀리 날아갔다.
본디 가축화되지 않은 양은 저돌적이며, 사납고 고집 센 짐승.
양은 강하다.
성문을 때려 부수는 공성추에 숫양을 뜻하는 'ram'이라는 단어가 붙은 게 그 증거였다.
양 수인들에 의해 본성을 되찾은 108마리 양이 대열을 이뤘다.
그건 즉, 십 수명에 불과한 보병대로 구성된 모험가와 용병들이 108기의 잘 훈련된 기병대를 상대하는 것과 같았다.
"수, 수비를 굳혀라! 후속대가 올 때까지 버텨!"
토벌대 중에서 제법 머리가 좋던 용병이 급히 지휘권을 잡았지만, 사태는 이미 그들에게 지나치게 불리했다.
"후후, 좋은 판단이다. 허나 본좌가 고안한 백팔양모진 앞에선 우책에 불과한 것을 알아야지."
"뭐야?"
"이 진은 공방이 아닌, 대치했을 때 진가가 드러난다는 뜻이니라. 동포들이여, 자랑스러운 털의 군세여! 훈련의 성과를 보여다오!"
숫양 장군의 호령에 복슬복슬한 흰 털의 바다가 물결쳤다.
돌진이 아니다. 방어를 굳히고 있는 토벌대를 향해 무턱대고 돌진했다면 제아무리 숙련된 양이라 해도 하나나 둘 쯤은 뿔이 상하고 머리가 깨졌으리라.
양들은 토벌대를 중심으로 원을 그렸고, 가끔 크게 뛰어오르기를 반복했다.
"마치 울타리를 뛰어넘는 듯한 움직임···. 아뿔싸! 전원! 뛰어 오르는 양을 의식하지 마라! 잠들고 말 거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날에 양을 헤아리는 것.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하는 일이지만, 단순 작업의 반복은 수면욕을 촉진한다.
그리고 그게 잠자리에 친숙한 이미지인 양모를 제공하는 양이라면 거부감 없이 상대의 심리를 파고든다.
"크으윽, 이렇게 비겁한 전술을 쓰다니."
"본좌는 상냥한 전술이란 말을 더 좋아하느니라. 걱정 말거라. 목숨을 거두지는 않을 테니."
폴짝.
양이 한 마리.
폴짝.
양이 두 마리.
폴짝.
양이 세 마리.
"꿈 속에서 새겨두어라. 잠을 제압하는 자야말로 전장의 진정한 지배자라는 사실을."
눈꺼풀이 바위처럼 무거워진다. 다리가 떨리고, 무기를 든 손이 점점 내려간다.
그렇다고 돌진해서 진을 깰 수도 없다.
달려들려고 수비를 푸는 순간, 기병과 동급의 돌진력을 가진 양이 달려들 테니까.
결국, 후속대가 오지 않는 이상 백팔양모진에 포위당한 토벌대는 하나둘씩 잠들 운명이었다.
다가온다. 달콤한 잠이. 달콤한 죽음이.
천천히. 느긋하게. 폭신하게.
싱그러운 풀냄새와 부드러운 양털을 타고.
십 수 분 후.
토벌대는 양 떼에 파묻힌 채 침까지 흘려대며 깊은 잠에 빠졌다.
누구의 피도 원하지 않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전투.
양뿔 해방군은 그 이념 하에 오늘도 자신들의 전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함성은 없다. 선두에 선 숫양 장군이 풀피리로 부는 자장가가 바람을 타고 목초지 위에 잔잔하게 번져나갈 뿐이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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