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뛰는 놈, 나는 놈, 버그난 놈
"아, 아, Aㅏ dk, 아- 아아."
게임판타지 사회 초년생인 그녀는 절망했다. 렉이 걸릴 것까지 고려해서 버스에 탑승했건만, 평소보다 지독한 트래픽 탓에 버스가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기, 기기, Ki, 기사님! 저, 저, 저저, 저-"
내릴게요.
짧은 문장 하나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렉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버스 기사는 프로였다. 의도를 이해한 기사는 일말의 주저 없이 버스 뒷문을 열어줬다.
감사 인사를 하려 해도 렉이 걸릴 터. 그녀는 속으로만 감사를 표한 뒤, 버스에서 뛰어내려 힘껏 달렸다.
"아직이야! 지금이라면 늦지 않아!"
달려서 출근하겠다고 마음먹은 유저는 그녀만이 아니었다.
갑옷을 입은 기사는 일부러 가시에 머리를 박고는 팬티 바람이 되어 질주했고, FPS 지구 출신은 자기 발밑에 로켓런처를 쐈으며, 고슴도치 아바타는 짧은 발을 놀리는 대신 온몸을 말고 굴러갔다.
그리고 몇몇은 지면이 아니라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무협 지구에서 온 상승 경공의 고수일까?
아니다.
그녀를 포함한 몇몇 플레이어는 하늘을 달리는 유저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분노했다.
그리고 특히 끓는점이 낮았던 빨간 머리띠에 하얀 도복을 입은 격투 게임 유저가 고함쳤다.
"내려와! 이 비겁한 핵쟁이 새끼들아!"
게임이 있다면 반칙도 있다.
본래라면 없어야 정상이지만, 시스템의 보안상 허점을 이용한 반칙을 100% 차단할 수 있는 전자오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뿐이랴. 아예 주객이 전도되어 '핵쟁이가 없으면 인기 없는 게임이다'라는 의견이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본인이 핵에 당하면 좋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녀가 사는 게임 판타지 세계에서 핵 프로그램은 부당한 이득과 별개로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젠장. 어쩐지 오늘 유독 렉이 심하더니."
시스템 과부하에 의한 부하 가중.
다시 말해, 핵 유저의 침투는 그 지구에 심각한 렉을 일으킨다.
렉이 심한 이상 경찰이 찾아오는데도 시간이 걸리리라.
하지만 마냥 절망할 필요는 없었고, 그녀의 오늘 운세는 제법 나쁘지 않았다.
인기 있는 게임에 핵쟁이가 있다면, 그런 핵쟁이를 잡는 '괴물'도 있는 법이니까.
"뭇! 뭇! 뭇뭇뭇뭇뭇! 호와이!"
기합보다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거리에 나타난 새로운 무리는 핵 유저보다 훨씬 기괴했다.
뒷걸음질 치는 게 전력 질주보다 빨랐다.
투구를 장비해야 하는 위치에 검이 달려 있었다.
얼굴에 피부 대신 그린스크린이 덮여 있었다.
어느 하나 정상이 없지만, 핵 유저는 아니다.
그들은 게임 판타지 세계를 너무 좋아하고, 너무 오래 산 나머지 인간의 길을 걸을 필요가 없게 된 폐인들.
썩은 물이나 고인 물이라는 표현조차 닿지 않는 괴짜 중의 괴짜.
랭커는 아니지만, 그들은 랭킹과 전혀 다른 이유로 컬트적인 관심을 받는다.
버그 유저.
게임 판타지 세계의 잘못된 섭리마저 자신들의 힘으로 삼아버린 그들은 세간에서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크하하하하하! 건방진 핵쟁이 새끼! 겁대가리를 아예 상실했구나!"
"리스너들~ 방송 잘 보여? 소변은 다 보셨나? 구독과 알림 설정은 다 마치셨고? 방구석에서 시청할 준비는 OK?"
"오늘은 부러진 직검으로 썰어볼까······."
핵 유저들은 팔다리를 비정상적으로 늘리고 순간이동까지 사용하면서 버그 유저들을 떨어트리려 했다.
쏘아내는 탄환은 헤드샷 유도가 적용되어 있었고, 무기의 데미지는 스치기만 해도 즉사였다.
반면, 버그 유저는 섭리에 강제로 개입한 건 아니다. 그저 노하우로 우회할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그러니 상태창의 스테이터스로만 보면 버그 유저가 압도적으로 불리했을 터였다.
"흡흡허! 흡흡허! 흡! 흡! 허!"
"이럴 리가 없는데! 우린 핵을 쓴다고! 우리는 신인데!"
"넌 신이냐?"
순간이동 패턴을 읽어내고 먼저 가서 대기하고 있던 버그 유저는 그를 도로 한복판에 떨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난 미친놈인데."
"말도 안 돼···. 무적 모드까지 켰는데 왜 데미지가······."
"너무 강한 모드는 쓰지 말라고···. 약해 보이거든."
팬티 한 장만 입은 채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그 유저는 핵 유저를 뒤에서 잡은 채 그의 목덜미를 핥았다.
"가챠♡"
"으, 으아아아아! 히이이익! 저리 가! 이 변태 새끼야! 저리 가라고!"
즉사성 공격을 몇 번이고 휘둘렀지만, 의미가 없었다. 관절의 가동범위를 무시하고 날아드는 버그성 패턴까지 모조리 파훼한 버그 유저에게 사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 해봐! 해보라고! 즉사기를 시도해! 무적 모드를 켜! 텔레포트를 해! 진짜 재미는 지금부터잖아! Hurry! Hurry, Hurry! Hurry! WRYYY!"
버그 유저들은 핵으로 활성화된 무적 상태를 해제시킬 수 없었지만, 애초에 그들은 이길 생각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핵 유저를 강제로 잡을 수 있는 경찰이 올 때까지 그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경찰이 왔을 때, 문자 그대로 영혼까지 충격을 받은 핵 유저들은 두 손을 들고 순순히 항복했다.
한편, 게임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상식마저 뒤틀려 버린 버그 유저들 덕분에 간신히 지각을 면한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리 게임이 좋아도 그들 같은 변태가 되는 건 무리라고 말이다.
- 작가의말
앗, 헬싱드립 치다가 둠 드립 넣는 걸 깜빡했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