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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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사람이잖아....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어. 우울하면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왠지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메담에게 쏘아붙였지만 나도 깨닫고 있었다.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이다.
“그래. 여왕님이 딱히 나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야. 사람이니까 기분이 우울한 날도 있을 수 있어. 그리고 우울할 때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지. 하지만 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그 한 사람이 윈더민 성의 수 천, 수 만 명의 기분을 좌우한단 말야. 그리고 여왕님이 오늘 다른 사람들에게 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내 눈으로 확인했지.”
방금 혼자서도 깨달은 사실이지만 녀석이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주니 더더욱 와 닿는다. ‘좋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성장처럼 감정을 숨기는 것도 필수적인 덕목이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크게 뉘우쳤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람도 느껴졌다. 내가 왕으로서 메담을 만났다면 그는 감히 이런 속마음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큰 깨달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왕녀의 외출’계획이 추진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왕인 내가 하녀복을 입고 성에서 가장 하찮은 신분으로 가장하고 다니는 것이 단지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이만은 아니라는 걸 이 순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오늘 낙향하신 노드님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여왕님의 오늘 태도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몰라.”
메담은 노드의 이름 뒤에 ‘님’자를 붙였다. 목소리에는 왠지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있다. 노드는 부하들에게 정말로 존경받는 지휘관이었구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앤디와 크루거, 벨포트에 이어 이 녀석까지, 내가 접한 기사들은 하나 같이 노드를 숭앙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노드 경이 왜?”
“노드님이 어베레드를 구원하기 위해 하워드 선왕과 함께 출진하신 후, 나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윈더민 성에 남아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정말 뜻밖의 소식을 들었지.”
“뜻밖의 소식?”
“한창 전쟁준비를 하고 있던 와중에 노드님의 부친이 돌아가셨었대.... 그런데 그 분은 왕궁기사단장의 본분을 우선하셨지. 기사들 중 누구도 단장님이 그런 비극을 겪고 계신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어. 그 분은 전쟁을 앞두고 있는 우리들의 사기가 꺾일까봐 철저히 그 슬픈 감정을 숨기셨던 거야. 그 때 난 이런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느꼈어.”
얘기를 듣기만 하는 나도 노드의 배려에 이렇게 감동스러운데 당사자인 메담은 오죽했을까.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앤디의 정령검이 그의 아픈 점을 조롱했을 때도 노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왕궁기사단장의 푸른 정령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지 못했다면 전혀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왕님의 그 표정이 더 실망스러웠던 거야. 노드님 외에도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몇 명 더 있어. 하지만 아직까지 그 중에 여왕님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사실 좀 더 지켜보면서 마음을 결정하려 했었는데 네 사정을 들으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푹 쉰 후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금 전 대화로 숙제를 잔뜩 떠안은 느낌이다. 내가 과연 바이우스나 노드처럼 감정을 잘 숨길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고.... 메담이 휘렌델 여왕을 안 좋게 생각하게 된 것도 사소하지만 신경이 쓰였다. 마침내 메담의 입을 열건 좋았는데 그 대가로 오해를 받게 되어버렸다. 어떻게 이 오해를 풀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득 밖에서 불어오는 신선하고 차가운 바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거의 다 왔구나?!”
메담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세차기 뛰기 시작한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 나갔다.
“너는 정말로 성에서 벗어나고 싶었구나...?”
뒤에서 따라오던 메담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아까 한 말을 더더욱 철썩 같이 믿게 된 것 같다.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뜀박질을 늦추지 않았다. 복도 끝까지 단숨에 달려가 더듬거려 문을 찾아내고 스위치를 눌렀다. 눈앞에 드러난 풍경은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울창한 숲이었다. 그리고 비밀문은 커다란 바위 속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윈더민 성의 바깥인 것만은 확실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빼곡한 나뭇가지를 헤치고 시원한 바람과 달빛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자유를 마음껏 음미했다. 이 순간 나는 다시 산과 들을 자유로이 활보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효과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나는 최악의 하루를 깨끗이 잊고, 모든 고민을 덮은 채 이 희열을 느끼는 데만 집중했다.
“여기서 작별이구나. 좀 아쉬운데.... 행운을 빌어줄게, 메리.”
뒤따라 나온 메담이 쓴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던졌다. 마치 작별하는 것처럼 아쉬운 얼굴이었다. 이에 나는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정정해주었다.
“난 성에서 탈출하려는 게 아냐. 바람 쐬면서 기분전환이 좀 되면 다시 들어갈 거야.”
“아 그래? 난 또....”
녀석은 문득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조금만 있다가 금방 돌아와야 해, 메리. 멀리 가지 말고”
그의 말이 마침내 손에 넣은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 같아 불쾌하다. 나는 가볍게 눈을 흘겨 메담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네가 사라진 걸 누군가 눈치 챌 수도 있으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없어진 건 아무도 모를 거야. 굉장히 그럴싸한 핑계를 댔으니까.”
나는 메담에게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녀 메리는 원래는 윈더민 성에 없는 사람이다. 없는 사람이 없어진 걸 누가 알겠는가. 이런 사정을 모르는 메담은 안심이 되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럴싸한 핑계라니?”
집요한 자식이네. 그런데 이상하게 거짓말이 또 술술 나왔다.
“....음식을 나르고 있는데 어떤 기사님이 나한테 술을 먹였어.”
반드시 거짓말은 아니다. 내가 오늘 술을 한 잔 마신 건 기사들과의 충성 서약 의식을 완료하는 절차였다. 즉 메담을 제외한 왕궁기사단 전부가 나한테 술을 먹인 셈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내가 술을 먹으면 얼굴이 확 빨개지는 체질이거든. 비록 짧은 시간뿐이지만.... 아무튼 하녀장님이 그걸 보고 오늘 일찍 쉬게 해주셨어. 그러니 날 찾을 사람은 없을 거야.”
꽤 그럴듯한 핑계라고 생각했는데도 메담은 쉽사리 안심하지 않았다.
“바이우스님은 성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고 계셔. 네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면 그 사실을 알아내실 거야.”
물론 나도 메담의 그 말이 단지 허풍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윈더민은 브란트 성보다 몇 배나 큰데도 아직까지 나는 쥐나 바퀴벌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비밀통로에서조차 말이다. 성을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건 바이우스가 성장으로서 얼마나 꼼꼼한 지를 증명하는 근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녀 메리가 사라진 건 그런 바이우스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은 아직 내 이름도 모르셔. 내가 윈더민 성에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르실 걸?”
“그럴 리 없어. 메리. 너는 통성명도 하지 않고 그냥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하겠지만 성장님은 네 이름을 벌써 알고 계셔.”
아직 나는 아직 성장과 스치며 만난 적이 없단다. 물론 메리로서 말이다. 나는 녀석의 고집에 지쳐서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았어. 조금만 걷다가 돌아올게.”
“그래. 그러면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나도 내 용무를 보러가야 하니까.”
메담이 말한 그 용무라는 건 물론 저 자루에 든 음식을 파는 것이다. 이 녀석.... 알다가도 모르겠다. 고작 하녀에 불과한 메리에게 대하는 태도만 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한 녀석인데 왜 굳이 도둑질을 할까.
기왕 도둑질을 시작했는데 고작 음식을 훔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잘만 찾아보면 성 안 곳곳에 값비싼 물건이 널려 있었다. 그 중에 하나만 훔쳐도 몇 백 배나 되는 돈을 벌....겠지만 도난품을 찾기 위한 수사가 진행되겠구나. 그래서 음식을 훔치는 건가? 아무튼 나는 녀석이 꽤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그 한 가지 흠이 마음이 걸렸다. 어차피 남아서 버릴 음식이라는 녀석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지만 말이다.
서로 각자의 길로 흩어지기로 한 이상 우리가 돌아오는 시각도 제각각일 것이다. 나와 떨어지게 되자 갑자기 불안해졌는지 메담이 간곡한 표정으로 얘기를 꺼낸다.
“메리. 부탁인데....”
“알았어. 나는 이 정도 훔치는 정도는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걱정하지 마. 너도 내가 이번에 무단 외출하는 거 아무한테도 말 안할 거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둘 다 이 비밀통로가 필요하잖아. 그러니 가급적이면 서로 돕는 게 좋겠지?”
“그래. 고마워.”
메담은 안심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내가 비밀을 지켜도 이 나라의 왕은 네놈이 도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단다. 먼저 한 걸음을 디뎌 문 밖으로 나간 그는 뒤따라 나온 내게 다시 돌아올 때 비밀통로 찾는 요령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이는 꽤 중요한 정보였다. 성 안의 통로는 열십자와 클로버 모양만 알고 있어도 어지간하면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외부 쪽 통로는 그런 단서가 전혀 없다. 비슷하게 생긴 바위들 중에서 문이 장치된 바위의 모양을 정확히 기억해야 했다.
설명을 마친 메담은 한 가지 유의사항도 일러주었다.
“저쪽으로 내려가면 윈더민 시가지가 나와. 그러니까 그리로는 가면 안 돼.”
이렇게 고마울 데가. 안 그래도 숲 속 한 가운데라 어디가 어딘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는데 때마침 길을 가르쳐 주는구나. 나는 이런 속마음은 숨긴 채 고개를 끄덕여 메담을 안심시켰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래. 너도.”
우리는 짧은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길로 향했다.
나는 일단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달리기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서 날아가는 화살처럼 힘껏 땅을 박차며 숲을 가로질렀다. 바람이 윙윙 웅성거리며 나를 스치고 긁어댄다. 이 감촉이 너무 개운하고 좋다.
거침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질주하며, 나는 오랜만에 맛보는 무한대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서서히 아까 메담이 가리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가는 길을 꼼꼼이 기억에 담아두면서 윈더민을 향해 달려갔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라 메다민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는 건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일단 오늘은 지리를 익히고 구경이나 좀 해봐야겠다.
내가 있던 숲은 윈더민의 외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안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한 5분 정도 달리니까 숲이 끝나고 길이 잘 닦인 번화가가 펼쳐졌다. 나는 그제야 숨을 고른 후 천천히 걸으며 도시를 구경했다.
윈더민 성은 어린 시절에 겪었을 때와 비교하여 거의 변한 것이 없었는데, 윈더민의 거리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이는 긍정적인 쪽으로의 변화였다. 내가 어렸을 때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해졌다.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대로 길을 가다보면 영락없이 큰 건물이 생겨서 내 앞을 가로막곤 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윈더민을 떠나기 전에 내가 본 페나의 사람들은 배고프고 피곤해 보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달랐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대체로 여유가 흘렀다. 추첨제 덕분에 윈더민이 세계에서 가장 의욕적인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되었다는 스펜서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왕녀의 외출’ 계획의 장기적인 목적은 바로 ‘왕을 험담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인적이 드물고 불빛이 닿지 않는 거점을 주로 찾아다녔다. 어렸을 때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는 덜덜 떨던 사람들이 뒤에서는 욕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그 때도 지금과 똑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장소를 찾아 헤맸었다.
하지만 그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처녀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해 희번득이고 있는 세 쌍의 눈을 발견한 뒤였다.
“틀림없어! 성 안에서 입는 옷이야!”
지저분한 수염이 난 남자가 징그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며 다른 두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둘이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달려 나왔다. 그리고 내가 도주할 수 있는 골목을 한 명씩 맡아 차단해버렸다.
“놓치지 마!”
왼쪽 앞니가 시커멓게 썩은 남자가 동료들에게 날카롭게 전달했다. 지독한 입 냄새가 살며시 코끝을 찌르자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깨달았다. 그 세 남자와의 거리가 그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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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크루거 : ....? 왜 갑자기 불안해지는 걸까? 틀림없이 전하의 방으로 통하는 유일한 복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 어쩐지 짤릴 것 같은 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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