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
석우는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입이 텁텁하다. 몸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다.
"뭐야..."
갈라진 목소리.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이게... 무슨..."
주위를 둘러보았다. 갈라진 목소리를 신경쓰지 못한 이유. 시체가 널려있었다. 대부분 인간의 시체. 간간히 몬스터의 시체도 보인다. 바닥은 피로 흥건하다. 피는 걸음을 옮길때마다 질척거리며 자신의 존제를 알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마치 피처럼 붉은 하늘. 낮설다. 판테아 대륙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미친... 이게 뭐야!"
석우는 드디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두뇌가 느리게 돌아갔다. 지금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방인이여.
허공을 울리는 중후한 목소리. 주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석우는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왜 차원을 넘어 왔는가.
석우는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넘어오고 싶어서 넘어왔는가. 따지고 보면 자신은 차원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넘어오고 싶어서 넘어온게 아니야. 아니, 아닙니다."
석우는 말을 뱉다가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이런 공간에,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더라도, 자신보다는 대단한 사람, 아니 존재 일것이다. 반말을 할수는 없었다.
-넘어오고 싶어서 넘어온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자네를 넘어오게 만들었지?
"그건 저도 모릅니다. 단지... 제가 눈을 떠보니 판테아 대륙이었습니다."
석우는 말했다. 사실이었으니, 당당했다.
-...지금 자네의 원래 세상은 어떻지? 평화로운가?
목소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표면적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기는 합니다..."
석우는 말끝을 흐렸다. 지구. 평화가 유지되고 있기는 하다. 표면적인 평화이기는 하지만.
-누군가 재미 없는 장난을 벌여 놓았군.
"..."
-누군가 자네를 강제로 넘어오게 만들었다라... 자네, 이런 생각은 한번도 못해봤나? 자네를 판테아 대륙에 넘어오게 만든 존재가 판테아 대륙의 생명을 자네의 세상으로 옮길수도 있다는 생각.
"예?"
석우는 목소리에게 되물었다. 만약 판테아의 생명체가 지구로 넘어간다면... 큰 혼란이 찾아 올것이다. 트롤 한마리만 넘어가도 수백의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다. 상상만 이라도 끔찍했다.
-지금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걸세.
목소리는 말했다. 우려 섞인 목소리다.
"그게 무슨..."
-주위를 둘러보게.
석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네의 세상으로 판테아의 존재가 넘어간다면, 아마 이렇게 되겠지. 알아서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거야. 아니면 자네의 차원 신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
피로 뒤덮힌 세상. 판테아의 몬스터가 지구로 넘어간다면 펼쳐질 모습이다.
어지럽다. 석우는 머리를 잡았다. 동시에, 그는 앞으로 쓰러졌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군, 특별한 존재여.
목소리는 중얼 거렸다.
"허억. 헉."
석우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아직도 질퍽거리는 피 바닥이 느껴지는 듯 하다. 머리가 없는 시체, 사지가 분리되어 있는 시체... 시체들의 환상이 허공을 떠다닌다.
"뭐였지?"
석우는 애써 머리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중얼거렸다.
'나를 판테아 대륙에 보내는 존제가... 판테아 대륙의 몬스터를 지구로 보낸다면? 대학살. 현대의 무기로는 몬스터의 가죽을 뚫을 수 없다. 전차로도 트롤도 상대하지 못할거야.'
석우는 고개를 저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상상을 해야해. 그리고 그에 맞는 대비를 해야지.'
만약 정말로 몬스터가 온다면... 대비를 해야했다.
'하지만 어떻게?'
석우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기껏해야 자신의 아버지에게 몬스터가 습격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뿐. 하지만 그것을 믿어줄지 의문이다. 아들의 말이니, 믿어 줄 수도 있지만 사실 몬스터라는 존재를 믿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석우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머리가 아파온다. 일단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본다. 그것이 석우의 생각이었다.
석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린 소환.”
하얀색의 토끼가 소환되어 석우를 바라보았다. 석우는 린을 쓰다듬었다. 린은 석우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석우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일단... 능력자를 모아야 할 것 같군.”
석우는 중얼 거렸다. 몬스터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능력자. 많은 수의 능력자들이 능력자 협회에 소속 되어 있지만, 또 많은 능력자들은 그렇지 않다. 능력자 협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능력자들을 모을 생각이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능력자들이 있다. 그들 스스로가 각성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능력자들도 많았다.
고등학생들 중에서도 능력자들은 꽤나 있었다. 일단 지아나 석우만 해도 능력자였으니 말이다.
“후우...”
깊은 한숨.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고등학생 능력자라면 설득하여 길을 잘 잡아주기만 하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는 능력자라면, 힘들 수도 있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등학생의 말을 들어줄 어른은 별로 없었다.
석우는 밖을 나왔다. 일단 자신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 능력자가 몇 명 있었다. 대부분 능력자 협회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사람들. 석우는 그들을 만나볼 생각이었다.
석우는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남자의 목소리. 젊다 못해 어린 목소리다.
“아, 승기야.”
하승기. 고등학교 2학년에 석우와는 어렸을떄부터 아는 사이였다. 능력자 협회 소속의 마법사이신 어머니와, 공무원인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아이였다. 부모님께 자신의 능력을 말하지 않은 아이였다. 물론 부모님은 그의 능력을 알고 계시지만.
-아, 석우형! 무슨 일로 전화를 다해?
“혹시 시간 있냐?”
-시간? 오늘 학교 가는 날인데?
“학교? 그냥 빠져. 학교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석우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언제 몬스터가 올지 모르는 일이다. 만약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도중에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오... 맨날 뭔 일 있어도 학교는 가라던 형이 무슨 일이야? 알았어 그럼. 몇시에 만날까?
“아침 안 먹었지?”
-아침이야, 맨날 안 먹고 다니는데.
“같이 아침먹자.”
-어디서?
“아이홉이라고, 레스토랑 알지?”
아이홉. 1년 전인가 생긴 레스토랑이다. 서양식의 아침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연하지, 우리 집 앞인데.
“그쪽으로 갈게, 만나자.”
-알겠어. 기다릴게.
승기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지냈냐?”
“잘? 뭐, 항상 똑같지. 그냥... 능력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런 거지.”
승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직도 능력 제어 못하고 있어?”
“아니, 이제 거의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어. 그냥... 뭔가 더 능력을 강력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여러 가지를 시도 하고 있지.”
승기는 말했다. 석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하고, 승기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학교 보다 중요한 거라는 게.”
승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너... 능력, 좀 써야할 것 같다.”
“내 능력을? 왜? 웬만한 거면 형이 할 수 있을 텐데. 저번에 능력 얻었다고 엄마한테 들었는데...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형 발도 넓고 무력도 웬만한 능력자만큼 대단하잖아.”
승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석우가 자신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석우가 자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의 일이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일단...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거, 다 사실이다.”
“...”
승기는 심각한 석우의 얼굴에, 자신 또한 얼굴을 굳혔다.
“내가... 다른 차원에 넘어갔다 왔다. 거기는... 판타지 세상이야. 마치 게임 속처럼 오크, 고블린, 트롤, 오우거... 몬스터들이 잔뜩 있다. 근데, 누가 말하기를... 내가 넘어 갈 수 있다면 그곳의 존재도 이곳으로 넘어 올 수 있단다.”
석우는 망설이다 말했다. 승기는 심각한 얼굴로 석우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형,”
“...”
“게임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
석우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아이가 이렇게 말하니,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더욱더 힘들어질 것 같기에, 벌써부터 고개가 저어졌다.
“농담이고... 뭐, 형 말이니까. 믿어야지. 근데 좀 믿기 힘든 건 부정하기 힘들다. 형 말고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농담 취급했을걸.”
승기는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그래서, 뭐가 문젠데?”
“그곳의 존재, 몬스터가 지구로 넘어올 수 있다는 것이 문제지.”
“몬스터... 하지만 능력자 협회가 있잖아? 몬스터들이 넘어올 거라는 확신도 없고... 넘어오더라도 능력자 협회가 막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굳이 우리 힘까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승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사실 몬스터가 넘어온다는 확신은 없었다. 게다가 넘어오더라도 능력자 협회가 피해는 입겠지만 막을 수는 있을 것이었다. 굳이 석우와 승기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네 말도 맞아. 근데... 몬스터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거든. 트롤만 해도 보통 능력자들이 상대하기는 어려울 거야. 게다가 오우거면 2급이나 상대할 수 있을 정도야.”
“미친... 고작 몬스터 주제에? 사냥감이잖아? 근데 그렇게 강하다고?”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몬스터도 무수히 많다. 와이번에 대해서 듣기만 했는데... 트롤을 한 끼 식사로 먹는단다. 오우거는 특식으로 먹고.”
석우는 인벤토리에서 라임 주스를 꺼내 승기에게 따라주며 말했다.
“헐... 그러면 우리가 있어도 별로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우리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우리 둘만 모여도 특급 능력자에 비할 수 있을걸.”
“에이, 엄마 말로는 내가 한 4급 능력자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했어. 형이 1급 능력자여도 특급 능력자에 비할 수는 없지.”
“내가 한 달 내로 너 3급 능력자로 올려주마. 게다가... 사실 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냐는 별로 상관이 없어. 잘만 훈련 받고 어떻게 상대하는지 알면 너 정도만 되도 트롤까지는 상대할 수 있거든.”
“하지만... 형이 방금 트롤은 보통 능력자들이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했잖아.”
“보통 능력자라 함은... 경험이 없는 능력자지. 트롤과 싸워본 경험이 없는 능력자.”
석우의 말이 승기의 귀를 파고 들었다.
- 작가의말
이얍얍!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