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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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간 과정이 생각이 안날 정도로, 나는 정신없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미리 열어두었던 창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간 내 방안은 내가 나올 당시의 모습과 전혀 다를게 없었다.
그렇다면 잠깐 동안의 내 부재를 눈치챈 사람은 이 저택안에 아무도 없겠네…. 애써 변명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참 다행이야.
"하아…."
긴 한숨을 내쉬며, 망토와 가면을 벗어 서랍안에 잘 넣어두었다.
드르륵, 탁.
… 나는 여전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걸까, 서랍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잠시 애꿎은 서랍문을 노려보고 있다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출렁, 하고 푹신한 스프링이 중력의 방향에 반(反)해 내 몸을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아무말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방안을 살폈다.
방문은 닫혀있는 채고, 내가 들어온 창문은 잘 걸어잠궈 놓았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내 가느다란 숨소리 밖에 없었고, 창 밖으론 붉어진 태양빛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는 채다.
마치, 이 방이 나만의 요새가 되어있는것 같아 진흙탕처럼 진탕이 되어있는 마음이 진정되어간다.
… 엘렌은-
"…."
엘렌은 어째서 정체를 숨겼던 것일까….
나는 그녀가 신전에서 지금껏 해왔던 일들을 기억한다. 그녀가 행한 일들은… 한줄기 빛 조차 없이 삭막했었던 나에게 깊은 감흥을 주었었다.
비록, 내가 아마드라네를 믿는건 아니지만, 나는 엘렌이 아마드라네의 이름을 부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목소리를 좋아했다. 신을 믿지 않는 나에게도, 그녀의 굳건한 신앙은 너무나도 신성하게 느껴져, 그녀를 대할때면 항상 환한 빛 속에 들어가 있는것 같았다.
그 빛은 너무나도 포근해서… 그래, 마치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것 같았지. 절대적 평화에 젖어, 기분좋은 나른함을 느꼈었다.
… 비록 아마드라네의 주교라는 신분이 거짓이라 해도, 나는 엘렌이 지금껏 보인 행동들 역시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엘렌은-
아니, 엘레로페 여제에겐 그럴 이유가 없지. 그녀는 이 강대한 제국의 심장부를 직접 통치하는 여황이니까.
…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자, 다소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해 진것같다.
"…."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것 같아….
그제서야 나는 아버지를 포함한 네 명의 공작들과 엘레로페 여제, 그리고 하이 마스터가 한 자리에서 만났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엘레로페 여제, 엘렌은 우리 히로이얀에서 듀카스텔을 공격하는 걸 반대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의 행방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걸까…. 이대로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마는 걸까.
… 아직 완전히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고 하나, 듀카스텔 제국엔 황태자가 있다. 분명, 그가 다음 황위를 물려받게 되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분명한 기회다.
현 황제가 죽은 지금, 듀카스텔 제국은 분명 혼란스러울 것이고… 이때를 틈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면 이 지긋지긋한 증오의 연쇄를 끊어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엘렌은 그 가능성을 못본체 하려는 것일까….
신전에서 보여주었던 그녀의 모습이 거짓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다툼과 불화를 보면 항상 슬픔에 잠기곤 했으니까.
"모르겠네…."
내 생각은 여기에서 멈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는 높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이나 의견이 그런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큰 건 아니다.
… 이 세상에 내 손에 닿지 않는건, 정말 무수히 많다.
* * *
저녁이 되자,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랠겸 히로이얀의 전통 악기인 '엘파'를 들고 정원으로 나섰다.
바람이 다소 쌀쌀했지만, 그것에 대비해 어깨의 얇은 숄을 걸치고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춥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여름도 이제 끝자락인가….
나는 정원 한가운데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무수한 나뭇잎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고 엘파의 활을 들어 현을 한번 내리그었다.
한동안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엘파는 내게 좋은 소리를 들려 주었다.
…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다소 서정적인 음색의 소리가 지나간다.
여전히 눈을 감은채로 알고 있는 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저 교양으로 배웠던것 뿐이라 내 실력은 썩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것은 워낙에 익숙한 곡이었기에 나는 시작했던 연주를 능숙하게 마칠 수 있었다.
찌르르-
연주를 마치자, 풀 숲에 숨어있던 벌레들이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아니, 내가 못듣고 있던것 뿐인지도 모른다. 이 녀석들은 내가 정원으로 오기 전부터 계속 풀숲안에 숨어있었을 테니까.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밖에 없는 정원 안에서, 찌르르 울어대는 벌레들이 마치 내 연주를 들어주는 청중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히힛."
오랜만에 꽤 유쾌한 기분이다.
나는 아래로 늘어뜨렸던 활을 다시 들어올려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이번에 연주하는 곡은 기억에는 있지만,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은 곡이었다.
물론,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기분좋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곡을 더듬더듬 연주해가며 내 연주 소리에 맞춰 내는 것 같은 벌레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것도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완전히 스스로의 연주에 몰입했다.
눈을 감어서 시각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채였고, 때문에 내가 느낄 수 있는건 청각과 엘파의 활을 잡고 있는 손의 촉각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워 곡을 연주하자, 더듬거리며 시작했던 곡도 생각보다 훌륭하게 마칠 수 있었다.
"…."
곡을 마치고 나니, 벌레들이 울음 소리를 내는것을 잠시 멈추었다. 곧, 다시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잠깐 동안의 침묵이 마치 내 연주가 끝난 것에 대해 박수를 보내온것 같아 기분이 무척 흡족해졌다.
물론, 실제로 그럴리는 없겠지만… 인간에겐 상상력이라는게 있으니 그런 찰나의 순간에도 의미를 부여해 스스로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게 아닐까.
짝짝짝-
그런데, 정말로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박수 소리가 들려온 곳을 주목했다. 박수를 치고 있는 자는… 레르그란트였다.
"좋은 연주였습니다, 누님. 그런데- "
그는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악기는 왜 등 뒤로 숨기시는 겁니까?"
아…?
레르그란트의 말대로였다. 어느샌가 나는 엘파와 그 활을 잡고 있는 손을 등 뒤로 숨긴 채였다.
약간 민망함을 느끼며, 등 뒤에 있던 손을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그리고 레르그란트에게 박수를 쳐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그의 등 뒤로 어린 소년 한 명이 보였다.
… 보자마자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그의 피부가 우리의 그것과는 달리 어두운 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밤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들어가 있는듯 하다.
낮에 만난적이 있던 로우랜드의 소년… 이름이, 로제랑이라고 했었던가.
내 어색한 기색을 눈치챈건지, 레르그란트는 옆으로 살짝 물러서며 그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로제랑이라는 소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로우랜드에서 왔죠."
"아… 로우랜드?"
다소 늘어져 있던 신경이 다시 팽팽해진다.
레르그란트도 그렇지만… 이 로제랑이라는 소년 역시 네네아리케로서의 나와 네론그라시아 로서의 나를 동시에 접하게 될 것이다.
나는 레르그란트나 이 소년이나, 네네아리케와 네론그라시아 사이의 공통점을 눈치채는 것을 원치 않는다.
레르그란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로우랜드 입니다."
… 으응, 신기하다는 눈빛을 하고 그를 바라봐야 할까.
"그와는 모종의 일로 마주치게 됐는데… 얼핏 봐도 마법에 대한 재능이 무척 뛰어나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그를 미스틱 유니온에 추천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는 이리스테야에 아무런 연고가 없어, 현재 지낼만한 곳이 없는 상태입니다. 때문에… 제가 그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로 했죠. 로제랑은 앞으로 이 저택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어느정도 예상했던 상황이다.
거기다 이 저택에서 지낸다고 해 봐야 저택은 무척이나 넓으니, 나와 마주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허락은 맡은 거니?"
"… 누님, 고작 이런 일에 일일히 아버지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곤 하지만… 막상 말을 해놓고 보니 레르그란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나보다.
그런데, 상당히 의외인걸….
레르그란트는 누군가가 자신의 자존심을 약간이라도 건드리면 그로 인해 느낀 불쾌감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인간이다. 무척이나 솔직한 녀석이니까 말이지.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나, 결국 내가 레르그란트의 권한을 의심해 버린게 되어버렸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아니면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니… 로제랑이 로우랜드 인이라 하여 근거 없는 편견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지는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흥, 레르그란트는 내가 바보인줄 아나보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뒤에 서있던 로제랑이 내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무척이나 낯을 가리는 편이다. 때문에 평소와 같다면 처음 보는 그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어색해 했겠지만-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네…. 응, 잘 부탁해."
나답지 않게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띈채 그를 살갑게 대했다.
… 지금의 나에게서 네론그라시아와의 공통점을 느끼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상냥하게 그를 대하면, 지금의 내게서 차가운 네론그라시아의 모습은 전혀 연상할 수 없을테지.
예상했던 대로 무척이나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르그란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누님, 그가 꽤 귀여워 보이는 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견은 없습니다만- "
아…?
"로제랑은 저는 물론이고 누님 보다도 연상입니다. 어려보이는 외견은 그가 좀 힘든 과거가 있기에 성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
내게 자세한 사정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레르그란트는 거기서 말끝을 흐렸다. 그것보다, 이 소년이… 나보다도 연상이라고?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쓸데 없는 정보였지만… 꽤 충격인걸.
- 작가의말
* 아, 오늘도 겨우겨우 생존만 ㅠㅠ 하루에 오천자가 저의 한계인것 같습니다 ㅋㅋ;;
* 연참대전을 하면서 글이 조금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ㅠㅠ 그래도 스토리 라인이나 등장인물 들의 용도(?)는 확실하게 잡아놨기 때문에 내용이 산으로 가는 일은 없을겁니다 ㅋㅋ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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