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78화]
* * *
… 저택을 습격한 괴물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나는 지금 내 앞에 깊이 잠들어 있는 레르그란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
지금껏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무기력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섬세한 눈썹을 떨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익숙치 않다.
나는 이런 레르그란트의 모습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에스카랸의 장녀라는 사실도, 미스틱 유니온의 마스터라는 사실도 잠깐 동안 잊게 해준듯 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은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니…. 아무리 내가 게으르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리 분별이 정확한 레르그란트라면, 반대로 내가 침대위에 누워있는 상황이라 했어도 냉정한 판단이 가능했겠지.
… 레르그란트가 정신을 잃은 지금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에스카랸을 움직일 수 있는건 나다. 그런데도 레르그란트를 걱정한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나는, 분명히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 이후로 먹은 빵은 너무나도 맛이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방금 중얼거린 그 말은 이성을 잃은 레르그란트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계속해서 마음에 밟혀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식욕으로 대변 되는 욕망….
나는 난생 처음으로 느꼈을 그 강렬한 욕망 사이에서 레르그란트가 느꼈을 감정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내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할지라도, 그 근처에조차 이를 수 없다. 왜냐면 내게는… 아직 빵이 그렇게 맛이 있지는 않은 까닭이다.
"레르그란트… 우리는 도대체 뭘까?"
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이 던져졌다. 물론, 레르그란트는 눈을 감은채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어쩔 수 없는 침묵 역시 나름대로의 대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침묵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손을 들어 올린뒤, 조금 머뭇거리다가 레르그란트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그러자 남자애의 것이라고는 그다지 믿어지지 않는 보드라운 피부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온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레르그란트는 친 누이인 나를 이성으로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것을 도의적인 명분에 근거해 거부했다. … 너무나도 당연한 대응이다.
동생이 자신의 친 누나를 사랑한다니… 굉장히 질 나쁜 난봉꾼의 이야기라도 듣는듯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레르그란트가 호소하고 있던 것은 정말로….
하…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르기에 그것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척 가소롭게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거니와, 굳이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예정도 없다.
… 그러나 레르그란트가 말하는 사랑이란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식욕이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을 그에게 있어 유일한 식욕의 대상은 나였으며, 따라서 나 만이 그에게 있어 유일한 외부 세계가 될 수 있었다.
레르그란트의 말대로다.
오직 나, 네네아리케 엘 에스카랸 만이 레르그란트에게 있어 유일한 '너' 가 될 수 있다.
절대로 타협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도의적 명분이란 녀석과 사회적 시선이라는, 너무나도 먼 외부적인 요소는 과연 레르그란트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나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신한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르그란트는 나를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럴리가 없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그 동안 가소롭게 보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한다고 해봐야 답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말이지. 하지만 레르그란트의 말대로, 이 몸에 흐르고 있는 피가 에스카랸의 것인 이상 알기 싫어도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으음… 누님?"
아, 레르그란트가 깨어난 모양이다.
나는 그의 뺨을 쓸고 있던 손을 어색하게 거두었다. 손에서 느껴지던 말캉말캉한 감촉이 사라지니,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었다.
"일어났구나."
"…."
레르그란트는 내 모습을 보고 잠깐 동안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이 무척이나 신경쓰인다고 생각했다.
새삼스럽지만… 레르그란트는 굉장히 뛰어난 인물이다. 그 잠깐의 침묵 사이에서도 그는 수 많은 생각을 떠올리고 입 밖으로 내어야 할 말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있겠지.
그는 평소와 다를것 없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에 나를 담고 있긴 하지만 그 눈빛 뒤에서 무슨 생각이 지나가고 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모습이… 왜 그러신 겁니까?"
나는 멍이 시퍼렇게 든 양쪽 손목을 자연스럽게 뒤로 숨겼다. 옷가지나 머리카락도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손목의 멍 만큼은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조금 주저하다가, 이내 입술을 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 안나?"
레르그란트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시선을 흐렸다. 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걸어왔던 과거를 되짚는듯 싶었지만, 여전히 흐린 시선으로 봐서 원하는 것은 찾지 못한듯 했다.
"괴상한 오물 덩어리들을 전부 베어넘길때 까지의 기억은 나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의 기억이 없군요.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리고 누님은 제가 확실하게 보호했을텐데, 그 모습은…."
내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이 녀석은….
"글쎄- "
나는 뒤로 숨겼던 손을 앞으로 내밀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했다. 내 피부는 하얀데다가 멍은 심하게 들었기 때문에 손목에 새겨진 푸른 자국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너는 그 괴물들을 모두 해치운 후에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 버렸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었는지 아니?"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하며, 나는 곁눈질로 레르그란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기억이 없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듯 했지만, 내 팔의 멍자국을 보고나서 아주 잠깐동안 눈빛이 흔들렸다.
… 그리고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제가 갑자기 쓰러져 버리다니…. 그 오물 덩어리들에게 수상쩍은 마법이라도 걸려 있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하고 있는 꼴부터가 애초에 끔찍한 마력을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요."
"…."
"아무튼, 누님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 그리 이상하지도 않고, 상황을 무난하게 넘길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다. 만약 내가 레르그란트 였다면 이와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아무도 어색해 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레르그란트에게 상처 입은 것이 아닌, 누군가의 악의 섞인 마법에게 상처 입은 것이며 레르그란트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모두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다.
기억에 없다, 라….
"으응."
거짓말이다. 레르그란트는 기억하고 있다.
내 몸을 구속하고 나를 범함으로써 그의 세계의 유일한 '너'를 확인하려던 순간을.
"너도… 다행이야."
나는 의식적으로 환하게 웃어보였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현기증을 감추기 위함이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 인위적인 웃음만이 무너질것 같은 내 마음을 그 자리에 고정시켜둘 수 있을것 같았다.
… 이 세계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무수히 많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며 '나' 와 '너' 의 경계에서 소통하며, 이기(利己)하고, 이타(利他) 한다. 하지만 나와 레르그란트에게 있어, '너' 는 없다.
세계는 오직 '나' 일 뿐이며 때문에 타인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아는 완성되지 않으며, 때문에 나는 텅 비어있는 채고 레르그란트는 그 텅빈 공간을 유일한 '너' 인 네네아리케로 채우려 하는 것 뿐이다.
고고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며 손에 넣을 수 없는 타인… 즉, 나를 갈구 했을 레르그란트의 마음속은 분명 이루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진흙탕일 것이다.
"누님…?"
나는 레르그란트에게 있어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런 대상이며, 반대로 당장 범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겠지.
그런데도 어떻게 레르그란트는 계속해서 나를 누님이라 부르며 단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정말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미안, 잠시 다른 생각좀 하느라."
차라리 그 때, 레르그란트가 나를 통해 그의 유일한 욕망을 채웠었다면, 그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을 수 있었을까.
* * *
의외로, 레르그란트는 또다시 잠들어 버렸다.
평소의 그였다면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에스카랸 공작으로써 해야할 일을 했겠지만, 지금 레르그란트가 입은 정신적인 타격은… 생각보다 더 컸던 것이겠지. 하지만 방금 전 그가 잠깐 깨어났을때의 상황을 보니 그리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닌것 같았다.
한숨 더 자고 일어나면 레르그란트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후…."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꾹꾹 눌렀다.
심한 일을 겪어서 일까… 고요히 엄습하는 두통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통의 이유는 비단 레르그란트와의 일 때문만이 아니라, 저택의 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남은 가문의 기사들과 고용인들이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으며 시체 조각들을 재빨리 치우긴 했지만 핏자국 까지 완벽하게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기둥만 하더라도 표면위로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 이 죽음의 흔적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비참한… 죽음들이 있었다.
멍하니 그 핏자국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뒤를 돌아보니 계단 아래쪽에서 로제랑이 숨을 헉헉 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아… 돌아왔구나, 로제랑."
나는 아래층 층계 너머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고용인들의 시선을 느끼며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거의 반사적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큰일입니다. 이 저택 뿐만 아니라- !"
"조용히."
무척이나 상기된 얼굴로 무언가를 급히 말하려 하는 로제랑의 입을 막았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자, 나는 그의 귓가에 차분한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장소가 적절치 않은것 같으니 일단은 내 방으로 가자."
"… 알겠습니다."
내가 직접 저택에서 나와 상황 파악을 하는 대신에, 로제랑 시켜 글로리아뎀으로 가도록 했었다. 태도를 보아하니… 내 예상대로, 역시 그쪽에도 큰 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자연스럽게 내 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빨라졌다.
복도를 지나며, 고용인들 몇 명이 나와 로제랑이 함께 내 방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긴 했지만 그런것을 신경 쓰기에는 내게 여유가 없었다.
"자, 들어와."
나는 쭈뼛거리고 있는 그에게 안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하며 탁자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의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그 옆엔 마침 적당한 컵이 놓여져 있어, 나는 그 컵에 물을 따른 뒤에 그것을 로제랑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급하게 오느라 목이 탔을 로제랑은 내가 건넨 컵을 들고 급하게 물을 마셨다. 그 덕분에 그는 방금 전 보다는 어느정도 안정감을 되찾은듯 했다.
"… 상황은 어땠니?"
이 방은 내 개인적인 공간이고, 신경써야할 시선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의식적으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 본래의 말투가 그리 쌀쌀 맞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방금전까지의 태도와는 확실히 상반되게 느껴졌는지 로제랑은 어깨를 잠깐 움찔 거렸다.
"글로리아뎀 역시 이 저택을 습격한 것과 똑같이 생긴 괴물들의 공격을 받았었습니다."
아,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걸까….
나는 본래 흔들 의자가 놓여 있어야 할 창가 앞을 힐끗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좋아하던 의자였는데… 이제는 부서져버려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아쉬움을 느끼며 의자 대신, 멀쩡한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알아낸 것을 모두 말해줘."
로제랑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괴물이 글로리아뎀을 습격한 시각은 어제 이 저택이 공격받은 시각과 동일 했습니다. 그리고 황궁을 수호하던 경비병 몇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검은 맹금 기사단과 미스틱 유니온의 마법사들 덕분에 괴물들을 금방 격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황궁 글로리아뎀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항상 철통같은 경계 체제를 갖추고 있는 곳이니까. 달리 황궁이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듯 두어번 정도 입술을 달싹 거렸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어두운 피부색 때문에 살짝 살짝 드러나는 치아가 도드라져 보였다.
나는 엉덩이에 깔렸던 긴 머리채를 앞으로 빼내며 그가 생각을 정리해 입을 열기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로제랑은 애매하게 흐렸던 말끝을 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을 '진정한 살해자들' 의 일원이라 밝힌 마법사가 함께 출현 했었습니다. 정황으로 보아 그 괴물들을 사역하고 있던것은 그들이 틀림 없겠지요."
역시, 내 예상대로 그들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아, 하지만-
"출현 했었다…?"
말꼬리를 잡는건 그리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 표현은 조금 이상했다. 그저 출현했었다는 말은, 실제로 그 자를 잡지는 못했다는 말로 들린다.
이 제국의 심장부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발각 된 이상 그 자가 흑색의 좌라도 되지 않는 이상 탈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황제 직할령의 전력은 고작 마법사 한 둘이 농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붙잡거나 사살하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일을 마치자마자 장거리 공간 도약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렸다고…."
장거리 공간 도약, 이라니….
그러고보니 펠그로엘드가 히로이얀을 배신하며 글로리아뎀을 보호하고 있던 결계를 무력화 시켰던 것이 기억난다.
결계의 핵인 '혹한의 심장' 은 이미 예전에 그의 수중에 넘어가 있는 상태였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간 도약이라는 마법을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건 아니다.
아마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되어 있던 것이겠지.
펠그로엘드가 그쪽에 있는 이상, 미스틱 유니온의 경계는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게 틀림 없다.
"들은 바에 의하면… 꽤 굉장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살해자들' 이라는 마법사 단체의 멤버들은 마스터 네론그라시아 께서 예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수준을 보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바보, 지금의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
가면을 쓰지 않은 내게, 로제랑이 마스터 네론그라시아라고 부른 것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 방엔 나와 그 뿐이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불안감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내 격한 반응에 로제랑도 꽤 놀란 모양이었다.
… 뭐, 이 녀석이 보기엔 그렇겠지. 가면을 쓴 나나 가면을 쓰지 않는 나나 로제랑이 보기엔 마스터 네론그라시아 이며 네네아리케 엘 에스카랸인 것이다.
마법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을때, 로제랑이 자연스럽게 나를 마스터 네론그리사아로 칭하는 것은, 사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데?"
… 그 다음 이어진 로제랑의 말은 무척이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그것은, 선전 포고 였습니다."
아주 희미하게, 머리속에 어떤 단서의 끈이 잡힐듯 말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침대위의 이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선전 포고라고…? 이 히로이얀 제국을 향한?"
아직 대답을 하지도 않았지만, 로제랑은 어딘가 석연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사실' 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판단은 내 몫이야. 너는 듣고 본 사실을 그대로 내게 말해주기만 하면 돼."
꽤나 쌀쌀맞은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제랑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물론입니다, 아가씨."
"그래서?"
"진정한 살해자 들은 히로이얀 제국뿐만 아니라 듀카스텔 제국, 데른-헤모가르트 연맹에도 역시 선전 포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 세계의 인간을 멸할때까지 무차별 적인 파괴를 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전 인류를 상대로 한 선전 포고로군.
펠그로엘드는 정말로 미쳐버리기라도 한 걸까. 어째서 전 세계의 인간을 멸해야 하는지, 사전에 이런 정신나간 선전 포고라는 짓거리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계속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던 로제랑의 태도도 이해가 간다.
누구도 이런 미친 소리는 진지하게 듣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바로 그 펠그로엘드다. 언젠가 그가 말한대로, '검은 지평선' 의 문을 열었고, 정말 선전 포고대로 행동을 하려 한다면 그저 미친 소리로 만은 치부할 수 없다.
그가 품고 있는 거대한 신비는 미친짓이라는 상스러운 소리로 깎아 내릴 만한 것은 아니니까.
"저, 그리고- "
로제랑은 품 속에서 별다른 장식이 없는 흰 편지 봉투를 꺼네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굳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그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진정한 살해자에 속해있는 마법사가 제 앞에 떨어트리고 간 것입니다. 겉봉에 적힌 발신인은 펠그로엘드, 그리고 수신인은 아가씨… 입니다."
아, 그의 말대로였다.
편지를 내려다보나, 발신인엔 틀림 없는 펠그로엘드의 필체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수신인에도 역시 '네네아리케 엘 에스카랸' 이라고 검은 잉크로 내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펠그로엘드는 내가 로제랑을 마법사로서의 제자로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아무런 마법적 힘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편지였지만, 나는 긴장된 손길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종이에는 맥 빠지게도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 에스카랸인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 기대하고 있겠다. 』
"… 이해?"
이 정신나간 짓을, 나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편지를 대충 접은 뒤,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두통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시야를 차단한다고 해서 느껴지는 고통이 줄어들 일은 결코 없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무척 창백합니다."
"… 괜찮아. 항상 있는 일이니까."
나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고통을 삭이고 있다가, 들고 있던 편지를 로제랑에게 넘겨 주었다. 무척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는 데다 편지의 내용도 별것 아니니 딱히 보여주어도 상관은 없겠지.
"…."
이해 그리고… 기대.
도대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기대한다는 걸까. 구체적인 대상을 명기하지 않은 이런 표현은 너무나도 잔혹하고 소름끼친다.
"저는 전(前) 하이 마스터인 펠그로엘드와 아가씨 사이에 어떤 교분이 오고 갔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그는 전 인류의 적일 뿐입니다. 이런 짧은 문장 하나에 그리 마음쓰실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위로… 인 듯한 로제랑의 말에, 나는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계속해서 커지고만 있는 고통으로 인해, 시각에 문제가 생겼는지 시야는 흐리고 사물의 색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저나 펠그로엘드, 그 할아버지는 언제 이렇게 재빨리 '전 인류의 적' 이라는 거창한 것이 되어버린걸까.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철저한 적의와 이렇게 신속하게 상대와 세계를 분리해버리는 그의 인식에 서늘함을 느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주제넘어."
"… 정말 그랬다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죄송한거지, 정말 그랬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는건 또 뭐람.
나는 눈을 감으며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아, 아가씨?"
내가 쓰러져 버리기라도 한줄 아는 모양이었다. 크게 당황한듯한 로제랑의 목소리에 머리가 더욱 지끈지끈 해지는것 같았다.
"괜찮아. 조금… 지친것 뿐이야. 더 이상 보고할 것이 없다면, 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이 방에서 나가주지 않겠니?"
… 극심한 고통 때문일까, 방금 전까지와 다르게 내 말에선 서늘한 기가 빠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벅, 저벅- 하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곧 발걸음 소리가 멎고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들렸지만, 시간이 상당히 오래 지나도록 문이 닫히며 이 공간이 밀폐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푹신한 베개에 묻으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남아있으면, 주저 말고 하도록 해."
"… 서투르지만, 상냥한 평소의 아가씨와 흡혈귀라 불리는 네론그라시아, 어느쪽이 아가씨의 진정한 모습입니까?"
"…."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상냥하다고 판단한 전자의 나는 그저 네네아리케라는 인물과 네론그라시아라는 인물이 동일하게 보이지 않도록, 그에게 그 두 인물의 성격을 상반되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진정한 모습' 인 나를 네론그라시아라고 대답할 수도 없다.
그것 역시, 연기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진정한 나…?"
주변에서 자기들 멋대로 평가한 바에 따르면, 나는 욕망이란 것이 희미하다. 그런 내게 자아란 결국 타자에 의한 반응일 뿐이다.
로제랑을 대하는 나도,
레르그란트를 대하는 나도,
카르츠를 대하는 나도,
…… 를 대하는 나도,
… 를 대하는 나도,
모두 다르다.
가면은 마스터 네론그라시아로 서의 나만이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얼굴엔 항상 무수히 많은, 보이지 않은 가면이 씌워져 있는 것이다.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그의 질문에 답한다.
"그런건, 없어."
- 작가의말
* 아직도 중간고사가 끝나지 않았네요. 이노므 과목은 무슨 시험 날짜가 이리 늦게 잡혀 있는지... ㅠㅠ
*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1부도 이제 종반부로 치닫는 군요.
* 봐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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