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167화]
* * *
예랑드 왕자와 헤어진 뒤, 다시 사계절의 정원 외곽쪽으로 나왔다. 그 길지 않은 거리를 얼마나 걸었다고 허약한 몸이 벌써 피로를 호소한다. 뿐만 아니라 너무 덥다. 그리고 나는 더위에 극히··· 약하지. 아침에 비가 와 습도가 높아져서 더욱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거의 초여름 같이 느껴질 정도니 뭐.
간단히 말해 축 늘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계속 이 정원에 있을줄 알았다면 얇은 옷을 입고 오는 건데···. 겨울옷을 입고 항시 훈풍이 감도는 사계절의 정원에 있는 것은 꽤 고역인 일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투덜 거려봐야 늦었지 뭐.
정원 외곽,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한 벤치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잽싸게 그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푹 눌러 쓰고 있는 후드를 젖힌 뒤, 후아- 하고 숨을 고르며 손부채질을 좀 하고 나니 그나마 몸이 식는 느낌이 들었다.
"···."
아무일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자니··· 바로 옆에선 역사에 남을만한 중요한 회담이 진행중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염치도 없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실제로 졸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어느샌가 내 손등 위에 앉아 날개를 쉬고 있는 나비를 볼 수 있었으니까.
사계절의 정원.
항시 꽃이 피어있어야 하는 이곳엔 꽃가루를 옮겨 다니는 나비까지도 관리 대상에 포함되는 걸까. 천적을 잃은 생명체는 나태하고 부주의하다.
집요하게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졸음이나 쫓을 겸, 나는 은밀히 마력을 일으켜 대기를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흔들리는 대기에 놀란 나비는 날개를 팔랑거리며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했지만, 내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섯 손가락을 쭈욱 펴 앞으로 내밀자, 나비가 그 손가락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대기의 움직임은 불규칙적이나 결국은 결정론적인 운동에 속한다. 나는 혼돈에서 질서를 끌어올리듯, 불규칙속에서도 결국 규칙을 찾아내듯, 대기를 움직이며 나비의 움직임을 원하는 대로 조종했다.
얼마 전 이었다면 마법을 이런 사소한 일에 사용하지는 않았을텐데. 행복한 마법을 만들어 달라던 샤밀리에의 부탁을 들어주던 와중, 마법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 조금 바뀌기라도 한 모양이다.
"마법··· 입니까? 정말 대단한 묘기로군요."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집중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제 1 마법에 이른 사고의 가속도 서서히 잦아들고, 나는 곧 본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사이, 내 심술에 해방된 나비가 재빨리 날개를 팔랑거리며 꽃과 나뭇잎 사이로 숨어 들어 가는게 보였다.
전혀 아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나는 아- 하고 약간의 탄식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일을 방해한건가요?"
"설마요, 사소한 장난이었을 뿐이에요."
걱정이 섞인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내게 말을 걸어온 자는 나처럼 특이한 백발을 지닌 남자, 라센힐트였다. 그 역시 멀리에서나마 회담에 참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걸까.
그는 나를 보고 빙긋 웃더니 말했다.
"장난이라고는 하셨지만 정말 대단하더군요. 대기는 너무나 불안정해 섬세한 예측이 불가능한데 그리 자유 자재로 다루다니···. 네네아리케는 어쩌면- 아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마법사였던 모양입니다."
이럴땐 그냥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겸양을 발휘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제가 스스로 마법사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었나요?"
분명히 그런 기억은 없는데.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 보며 그렇게 묻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답했다.
"마력 흐름에 민감한 체질덕에 알 수 있었던 것 뿐입니다."
흐음, 그건 마법에도 재능이 있다는 말인데. 마력의 구체적인 움직임을 감지해 내가 대기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라면, 최소 로제랑 이상의 잠재력이다.
이쯤 되면 놀랍다. 이런 사람들을··· 진짜 천재라고 부르는 거겠지.
"음, 혹시 실례가 되었던 거라면···."
묘한 감정을 담은 내 시선이 부담되었던 걸까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실례라니요. 그냥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라센힐트 씨는 단순 무력으로도 이미 대단한 경지에 도달하신 분인데 마법에까지 재능이 있는걸 보니 천재라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네요."
어라,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매끄러운 답변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에게 아주 많이 감탄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내 찬사에도 불구하고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으음, 무력말입니까?"
이런, 뒷조사를 해보았다는 사실을 너무 부주의하게 꺼내어 놓은걸까. 아니, 어차피 뻔한 이야기다. 그는 『라센힐의 하얀 발톱』이라는 대중적인 별명 마저도 갖고 있으니.
"제가 지닌 무력에 대해선··· 어떻게 말씀드리기가 그렇군요. 네네아리케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저는 그저 기교가 뛰어난 것 뿐인지라."
기교가 뛰어난것 뿐?
이상한 이야기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그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그도 지금은 딱히 할 일은 없어 보이니 간단한 대화로 호기심이나 채워볼 요량이었다.
내 추측이 틀린건 아닌지, 그는 내 권유를 받아들여 옆에 앉았다. 하기야 뭔가 특별한 용무가 있었다면 굳이 이런 한적한 외곽까지 거닐다가 이런식으로 마주칠 일은 없겠지.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냉큼 물었다.
"그런데, 기교가 뛰어난 것 뿐이라니요?"
"음, 일단- "
아, 그를 향한 감탄과 호기심이 무의식적으로 행동에 드러났었던 걸까. 부주의하게 거리를 좁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라센힐트 쪽으로 숙였었던 상체를 바로 했다. 다행히 그는 얼굴을 약간 붉히는 정도의 반응만 보여 분위기가 민망해지지는 않았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신체를 쓰는 어떠한 기술에 대해서 배운적이 없습니다. 무기술 역시 마찬가지지요."
"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이루어낸 일들이 무력을 제외하고도 가능한 일 들이었던 걸까?
글쎄, 그건 상상하기가 힘들다.
"간단히 비유를 하자면 지레와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레는 힘점, 받침점, 작용점의 위치에 따라 작은 힘으로도 큰 힘을 낼 수 있지요."
"지레요?"
"네, 지레입니다. 저는 그 힘점, 받침점, 작용점들과 같은 요소들을 쉽게 파악하고 조종할 수 있는 재주가 좀 있습니다. 뭐,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교라는 것의 비유일 뿐이고···."
그는 잠깐 동안 생각을 하는것 같더니, 잠시 양해를 구하고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뒤쪽에서 자그마한 나뭇가지 두개를 가지고 왔다.
곧 부러져도 무리가 없을,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직접 눈으로 보시는게 빠르겠지요."
라센힐트는 내 옆에서 조금 떨어진 뒤에 왼손에 든 나뭇 가지 위로 오른손에 든 나뭇 가지를 내리쳤다.
음··· 서술은 간단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그의 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 고작 나뭇가지 인데도 내 머리카락이 훅 떴다가 가라앉을 정도의 풍압을 만들어 내었으니까.
"아."
그의 신체 능력이야 어쨌든, 놀라운 것은 그 결과였다. 애초에 그 앙상한 나뭇가지로 이 정도의 풍압을 일으켜냈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지만 그 정도 속도로 부딪힌 나뭇가지 두개가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당장 지금이라도 금방 부러져 버릴것 같은데···.
물론,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가능할지는 머리에 그려진다. 이 우주에 적용되어 있는 물리 법칙이 어떠한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힘과 운동, 관성, 운동량···. 하지만 내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이론의 영역일 뿐이지. 그것을 사람의 몸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기술 같은건 모른다.
아니, 그의 말대로라면 기교라고 해야할까.
"놀··· 랍네요."
내 감탄에 그는 하얗게 웃으며 답한다.
"아닙니다. 방법만 알면 어렵지 않은 기술일 뿐입니다."
이게 '어렵지 않은 기술'이라고 표현된다면, 그가 진지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교'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제야, 나는 그가 무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러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라센힐트가 이 간단한 '기술'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주었던 기교의 편린만 보아도 무력이라는 단어가 적절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는 단순히 무력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2 년 전부터의 기억이 전혀 없다라···.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물론 '수상하다' 겠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말이 되질 않는다. 누군가를 속이기 좋은 방법은 기억 상실 외에도 많다. 굳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그런 이야길 택할 이유는 없지.
뭐,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건지는 모르겠다만,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어쨌든-
"글쎄요, 방법을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일지는···."
내 회의적인 반응에 그는 잠시 고민에 빠진 기색을 보였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장 네네아리케도 할 수 있는 일인걸요."
그는 꽤 진지한 기색으로 답했고, 나는 그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마법으로라면 물론 라센힐트 씨가 보여준 일을 재현해 낼 수 있겠지만, 제 신체만을 이용해서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는걸요."
"으음, 정 그러시다면, 직접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네?"
"물론 제가 네네아리케의 신체를 대신 움직이는 형태가 되겠습니다만···."
그는 스스로 그렇게 말해놓고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지금 그가 말한 이야기는 내 몸에 자신의 신체를 밀착해 조종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돌려 말한 꼴인데··· 당연하게도, 꽤나 실례인 이야기다.
나는 잠시간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몰라 잠시 침묵을 지켰고, 그는 그 침묵이 너무나 무거웠는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키는 컸지만 그 사춘기 소년같은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저 이건- "
해사한 얼굴을 붉히며 라센힐트는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보다도 내가 먼저 대답했다.
"좋아요.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나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서 두 나뭇 가지를 넘겨 받았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연약한 감촉이 어처구니 없었다. 나조차도 손가락만 써서 부러트릴 수 있을만큼 하찮다. 하지만 그는 이 하찮음으로 대기를 갈랐다.
"으음, 정 그러시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센힐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뒤로 돌아가 내 양 팔목을 잡았다. 손길은 극히 조심스럽다. 나는 그 조심스러움에 최대한 부드럽게 반응하려 노력했다.
"불편하면 조금 더 제 몸에 붙거나 세게 잡아도 되요."
"아뇨, 이 정도가 적당합니다."
그가 잠시 심호흡을 하는게 느껴진다.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 작게 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자, 이대로 제가 했던것 처럼 나뭇가지를 내리쳐 보세요. 확실히 부러질 수 있을 만큼, 세게요."
뭘까. 내가 생각하던 방식과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요청에 따르기로 했다. 그가 보여줬던 것에 비하면 물론 무척 우습긴 하겠지만, 왼손으로 든 나뭇가지를 향해 오른손으로 든 나뭇가지를 나름대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툭.
그런 소리가 나긴 했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어라."
"제 말대로지요?"
라센힐트는 꽤나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도 그럴법 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내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걸.
"한 번 더 해봐도 되요?"
"물론이지요."
나는 그 즉시 나뭇 가지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마력 체계를 구동시켰기 때문이다.
온 몸에 마력이 흐른다. 사고가 가속 된다. 계속해서 가속된다. 내 손이 허공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본다. 느낀다. 듣는다.
···.
곧, 고요한 전율이 온 몸을 타고 흐르는게 느껴졌다. 마력을 통해 확장된 내 인지가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 그 수수께끼를 풀었기 때문이다.
물론, 라센힐트다. 어처구니 없는 방식이었다. 그는 미묘하게 내 팔을 조정하여 나뭇가지로 공기를 갈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항이 최소화 될 수 있는, 대기 입자가 가장 적은 최적의 공간을 지나가게 한다. 하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운동은 연속적(Continuous)이다. 그런 연속성 속에서, 라센힐트는 나뭇 가지가 휘둘러지는 방향을 몇 번이나 조정해야 할까?
나뭇가지가 휘둘러지는 형태는 선이다. 아니, 사실은 면이다. 선은 무한한 점의 집합이다. 면은 무한한 선의 집합이다. 선택은 매 점마다, 매 선마다 일어난다. 그래서 이 한번에 휘두름에 라센힐트가 해야 하는 선택은 사실상 무한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은 무한속의 유한이다. 단순한 개념의 문제가 아니다.
곧 이어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치는 순간, 나는 한 번 더 어처구니 없음을 느껴야 했다. 타점의 순간, 라센힐트는 내 왼손을 잡아 미묘하게 방향을 틀어 충격을 흘렸다. 당연한 대응이다. 충격력을 줄이기 위해선 충돌 시간을 늘리는 수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힘이 흘려지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다. 나는 곧 답을 알았다. 나뭇가지를 충격한 힘이 내 몸까지 타고 올라온다. 손 끝에서 손, 팔, 어깨, 몸을 지나 다리로 간다. 최종적으로 힘은 지면으로 흘려진다.
고작 나뭇가지로 이런 기교라니.
어이가··· 없다.
"어떤가요?"
나는 느낀 그대로를 솔직히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네요."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웃지 못했다.
내 머리속에 어이없는 억측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래 이성이란 놈의 한계가 고작 이따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것이 서로 관계 없는 요소들을 억지로 엮으려는 어이없는 시도인줄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정체에 관한 한 가지 가설을 머리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 작가의말
너무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게 들어간 프로젝트가 길어지다보니... ㅠㅠ
곧 긴 연휴가 시작되는 5월이 찾아오니 금방 또 업로드 하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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