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떠오르는 태양을, 나는 볼 수 있을까. [23화]
* * *
통로는 비좁은데다 차갑고 습했다.
"윽, 너무 좁은데…!"
뒤에서 두 기사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체격이 상당한 그들로선 앞으로 나아가는것 조차도 고역이겠지.
나의 경우엔, 몸이 작은게 이럴때 도움이 되는군.
… 그리 기쁘진 않아.
"마스터 네론그라시아, 앞은 어떤가요?"
별다른 기색은 내비치고 있지 않지만 마스터 헤르닐도 상당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벨헬그와 소크헤어 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키가 상당히 큰 편이니까.
나는 마력으로 창조한 빛을 앞쪽으로 비춰보았다.
아직 끝이 보이진 않지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통로의 넓이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아직 한참은 더 가야될 것 같군요."
"…."
한동안 말 없이 전진만을 계속했다.
나는 바닥에 잔뜩 깔린 흙들이 구두에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내가 창조한 마법의 빛을 힐끗 바라보았다.
빛을 창조하는 마법… 내가 펠그로엘드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상당한 고위의 신비다. 그 신비의 기원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소중한 것, 바로 태양이지. 하지만 내가 태양에 관한 신비를 사역할 수 있는건, 지금처럼 고작 빛을 창조하는 것이 한계다.
어렸을 적의 나는 태양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새삼 하이 마스터의 마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아니…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태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양이 내뿜는 따스한 빛…. 그것은 밤의 차가움과 어둠을 쫓고, 무한한 사랑을 가진 어머니라도 된 것처럼 모든 생명을 감싸 안는다.
태양의 존재로 인한 낮과 밤. 아… 그 위대한 이등분은 우리의 관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과 악, 시작과 끝, 필멸과 불멸….
천공에 떠있는 광명의 태양이 없었다면, 이 지상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태양을 찬양하고 노래했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태양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진 않았지.
태양은 언제든 동쪽에서 지고 서쪽에서 떠오르며, 단 하루도 여명과 황혼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더 이상 파고들어갈 길이 없는 공리(公理)였다.
그렇기에… 태양은 어떤 방법으로도 그 격을 추락시킬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신비중 하나이며, 그것을 이루어낸 하이 마스터 펠그로엘드 역시 대단하다.
으응… 그래, 그는 대단하고, 또 위대하지.
탁, 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창조한 빛은 더이상 좁은 통로를 비추고 있지 않았다. 빛은 텅 빈, 넓은 공간을 똑바로 뻗어나가 어둠을 쫓고 있었다.
"…."
엄청난 크기의 공동(空洞)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동공을 떠받치고 있는 여러개의 거대한 기둥둘 사이로 칠흑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등 뒤에 통로에서 마스터 헤르닐과 두 기사가 걸어나오며 입을 열었다.
"정원 지하에 이런 거대한 공동이 있다니, 제대로 찾아온것 같군."
"… 조용히. 여기서 부터는 천천히 전진하도록 하죠."
마스터 헤르닐은 그렇게 주의를 주며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녀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잠깐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통로에 들어왔을때 부터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불안감이 지금에 이르러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공동속에 안개처럼 자리잡은 이 기묘한 냄새… 이건 시체가 썩는 냄새임이 분명하다.
다른 일행들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마스터 네론그라시아."
마스터 헤르닐이 나를 부르며 눈짓을 해왔다. 나는 그것을 금방 이해하고 창조한 빛의 밝기를 줄였다.
* * *
앞으로 전진할 수록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짙은 어둠으로 인해 시각이 제한되고, 발걸음 소리도 줄여 들려오는 소리는 옷감이 스치는 미약한 소리밖에 없었다.
다른 감각이 제한됨에 따라 더욱 민감해진 후각은, 지독한 냄새를 받아들이고서 상상을 전개해 나갔다.
상상은 두렵다.
도대체 이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빛이군요."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겨우 들릴,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창조한 빛에게 지속적으로 행했던 마력 공급을 그만 두었다. 마치 연기처럼, 내가 창조한 빛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옆에서 벨헬그가 속삭였던 대로, 저 앞쪽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고정되지 않은 황색 빛인걸로 보아 빛의 근원지는 횃불인듯 싶었다.
"…."
풍겨오는 악취가 절정해 달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후각은 쉽게 피로해져 같은 냄새를 계속 맡고 있으면 그것을 점점 못느끼게 된다는 말을 들은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 소용 없는것 같다.
우린 기둥 뒤쪽에 드리운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계속 앞 쪽으로 전진했다. 횃불로 밝혀져 있던 곳부터 계속해서 또다른 횃불이 곳곳에 밝혀져 있어, 우린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 악취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조금 더 앞으로 나가자-
"저게 뭐죠?"
마스터 헤르닐이 먼 앞쪽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이었기에 이곳에선 그녀가 가르킨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조금 더 그쪽으로 다가가 마력을 사역해 다시금 빛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아…."
굉장히 거대한 시체 더미가 그곳에 있었다.
… 현기증이 난다. 내 눈앞에서 더러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개개의 시체는 흐려지고 그 시체들이 이룬 더미만이 인식되었다.
행방불명된 사람이 거의 육 천명이라고 했었던가… 이곳에 있는 시체는 못해도 그 수의 절반 이상은 채울 정도였다.
"제길!"
뒤에서 누군가가 욕지기를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미약하게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 어째서? 나 역시 수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여왔는데. 이곳에 있는 시체가 너무 많아서 그런건가? 시체의 숫자가 그런 차이를, 만드는 건가?
울음을 터트릴뻔 했다.
그것은 이 많은 죽음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었다. 거의 산을 이루다 시피한 시체들이 내뿜는 원초적인 죽음 이란 관념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어린시절,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때처럼… 막연한 공포감이 나를 엄습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섰다.
시체가 이룬 더미가 흐려지고 그것은 그저 많은 시체들이 되었다. 시체는 온전한 것이 없었다. 팔다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어 있는건 흔한 일이었고, 심한건 내장부터 산산히 파헤쳐져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울음을 참으면서, 그곳으로 다가가 시체들을 자세히 살폈다.
나 자신도 이해가 가질 않지만… 지금의 나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어린아이 처럼 울고 싶은 나와, 감정을 배제한채 시체들의 상태를 살피는 내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시체에 꼬여 있는 벌레를 쫓으며, 그것을 뒤집고 자세히 살폈다. 팔다리가 절단된 면을 들여다보고 머리만 뒹굴고 있는 것을 집어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마력에 의한 흔적은 없군요…. 시체들의 표정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죽기 적전 매우 심한 고통을 겪었던게 틀림 없습니다. 이것만 봐선 이들을 죽인 자의 의도는 알기가 어렵군요."
목소리가 떨릴것을 염려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거침이 없고 매끄러웠다. … 정말 다행이야.
"…."
등 뒤에선 아무런 호응이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희미한 조명 사이로 세 명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서… 벨헬그가 나를 죽일듯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것 같았다.
"무슨 문제라도…?"
대답은 없었다.
거의 살기마저 섞인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가 더욱 깊어지고 그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기 직전, 소크헤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마스터 헤르닐은 뭔가 같잖다는듯 팔짱을 낀채 그 긴장감 사이에서 입을 열었다.
"더 가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고나서 그녀는 등을 돌리고 홀로 더욱 깊은 곳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고 벨헬그는 고개를 돌렸다.
"… 빌어먹을."
"자제해라, 벨헬그."
벨헬그와 소크헤어를 뒤로하고, 나도 마스터 헤르닐을 따라 몸을 돌렸다.
… 무섭다.
다시한번 그런 시선을 받게 된다면,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걸음을 옮기며, 나는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매끄러운 가면을 매만졌다.
* * *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손과 발이 묶인채 입에 재갈까지 물려 있어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 바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범인들… 로 짐작되는 자들이 있었다.
일단 기둥 뒤에 숨어,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그들은 모두 한쪽 손에 끔찍한 흉기를 든채 무언가를 분해하고 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독한 피 냄새…. 그 흉기로 유린당하고 있는건 인간의 시체였다.
"그만해, 이 녀석은 이미 죽었어. 더 이상은 힘 낭비일 뿐이다."
"음…? 정말로 죽었군."
그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는 곧 자그마한 수레에 실려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아까 본 그 거대한 시체 더미에 버려지는듯 싶었다.
"그럼, 다음 녀석을 죽이자고."
뭐지…?
그것은 그저 죽이는것 만이 이들의 목적이라는 것처럼 들려왔다.
맨 먼저 그렇게 말을 꺼낸 자의 시선이 붙잡혀 있는 사람들 쪽으로 향하자, 그쪽에서 억눌린 비명들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양 발과 다리가 결박당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붙잡힌 사람들은 그 시선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의 수백명이나 달하는 그들 사이로, 오래전 붙잡혀 이미 굶어 죽은듯한 시체가 밀려 나왔다. 시선을 피하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 그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잡힌지 얼마 안되어, 상대적으로 기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밀려, 그간의 굶주림에 힘을 잃은 사람이 밀려 나왔고, 또 그들 사이로 상대적으로 완력이 약한 여자와 아이들이 밀려 나왔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들의 시선 앞에 내동댕이 쳐진것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듯 크게 치켜떠진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 뒤를 돌아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자들이 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은 곧 잦아들었고 흉기를 들고 있는 자들 몇명이 나서 그 여자아이를 끌고 나오려했다.
"미친 녀석들…!"
벨헬그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앞으로 나서려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움직임은 마스터 헤르닐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그녀는 벨헬그를 제지하려는듯 앞으로 손을 내민채 냉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발각은 되지 않은 상황이라, 벨헬그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더 이상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소. 지금 나서지 않는다면 저 여자아이가 살해당할거요!"
마스터 헤르닐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저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어요. 지금 나서서 저들을 제압한다 해도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자결이라도 해버린다면 저들이 왜 이런 일을 저지른건지 알 수 없게 되요."
벨헬그는 초조한 눈길로 마스터 헤르닐과 그녀의 어깨너머로 붙잡힌 여자아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저 어린아이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자는 이야기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소크헤어가 끼어들어 그렇게 물었다. 마스터 헤르닐은 여전히 냉정한 눈을 한채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지금은 저들의 비상식적인 살인 행위 뒤에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지 알아내는게 더 중요합니다. 섣부르게 나서 저들을 놓쳐버리기라도 한다면 피해는 더 늘어날지도 몰라요."
그녀에게 가로막힌 벨헬그의 눈빛은 이제 거의 적의로 물들어 있었다.
"제길!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오…! 그래서 지금, 저 아이를 죽게 내버려두겠다는 건가 묻고 있지 않소?"
마스터 헤르닐은 짤막하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렇군요."
… 그때였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여자아이의 재갈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망가진 인형처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며 압도적인 공포에 젖어 있었다. 힘을 잃은 가느다란 목소리가 넓은 공동을 공허하게 퍼져나갔다.
벨헬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비키시오!"
하지만 그를 막고 있는 마스터 헤르닐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목소릴 줄이세요. 그리고 의도가 파악될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속한 검은 맹금에, 지금처럼 제멋대로인 당신의 행동을 유니온의 마스터로서 엄중히 항의하겠어요."
"꺄아아악- !"
마스터 헤르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벨헬그는 뒷통수라도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로 마스터 헤르닐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흉칙한 흉기가 인간의 살과 뼈를 헤집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간 굶주린듯, 힘이 없는 여자아이가 내지른 것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큰 그 비명소리는 결국 점차 잦아들어가기 시작했다.
벨헬그는 검을 뽑았다.
짙은 어둠속인데도… 그가 뽑아든 은백색의 검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저리 비켜, 빌어먹을 마법사!"
그는 마스터 헤르닐을 거칠게 밀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뭐, 뭐야!?"
그와 동시에 묵묵히 여자아이의 몸을 헤집고 있던 그들 사이에서 당혹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벨헬그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들 사이를 파고들어, 검을 양옆으로 휘둘렀다. 고통섞인 비명과 붉은 핏물이 터져나오며 검에 베인 자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유감스럽소, 마스터 헤르닐. 하지만 나도 내 동료의 행동엔 이견이 없소."
소크헤어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서 등 뒤의 핼버드를 집어 들고 벨헬그에게 가세했다.
마스터 헤르닐은 바닥에 주저앉은채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였다.
벨헬그가 기습적인 공격으로 두 명을 베긴 했지만 그들은 총 열명이 넘는 수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들은 흑 마법으로 분류된 마력을 사역하고 있었다.
"개자식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벨헬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격앙되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다.
대신, 그들은 차분히 대열을 수습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 하지만 별달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흑 마법으로 분류된 마력에 인간에게 물리적인 상해를 입힐만한건 상당한 고위급 마법 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의 마력은 하찮다.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벨헬그와 소크헤어가 동시에 그들에게로 뛰어들었다. 기합조차 없었다.
날카로운 검과 거대한 핼버드가 양 옆으로 휘둘러 졌고, 또다시 두 명이 바닥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 압도적이었다.
마력탄, 그리고 조악한 저주들이 그들에게 쏟아지는 속도는 화살보다도 빨랐지만 단 한개도 그들의 몸에 닿는건 없었다.
저걸, 모두 보고 피하는건가…?
또다시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이 공동의 어둠을 이용해 한 명씩 차근차근 목숨을 거두는 그들의 움직임이 마치 초식동물을 사냥을 하는 육식동물 같았다.
… 나와 마스터 헤르닐은 나설 필요조차 없어 보이는걸.
"검을 든 놈부터 노려!"
그제서야 전력의 열세를 느낀건지, 그들 중 한명이 그렇게 외쳤다. 벨헬그가 마침 한 명을 벤 틈을 타 그에게로 수십발의 마법이 쏟아졌다.
위험해…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내 걱정을 조롱이라도 하듯, 벨헬그는 그대로 기둥에 돌진해 지면에서 발을 박찼다. 놀랍게도, 그는 수직으로 세워진 기둥의 옆면을 밟고 그 위로 다섯번 이나 걸음을 옮겼다.
마법은 벨헬그의 몸이 아닌 기둥에 틀어박혔고, 한도 이상의 충격을 받은 기둥은 옆으로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했다.
곧, 쿠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잔뜩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먼지 사이에서 그들중 누군가가 또다시 목숨을 잃었다.
뿌연 먼지 사이로, 소크헤어의 거대한 핼버드가 얼핏 보인것 같았다.
"뭐, 뭐야 네놈들은! 도대체 이곳엔 어떻게- "
겁에 질린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던 누군가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작스레 뒤에서 나타난 푸른 사자의 앞발에 온몸이 으깨지며 벽으로 쳐박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자…?
머리카락 색과 똑같은 저 푸른 갈기… 마스터 헤르닐인가.
벨헬그와 소크헤어는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사자의 모습에 깜짝 놀란듯 했지만, 그들도 곧 사자의 정체가 마스터 헤르닐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자들의 수는 이제 불과 다섯…. 승산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건지 그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저들중 한명이라도 도망가면 곤란하겠지.
그때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나는 그들이 막 어둠속으로 도망가려 하기 직전 앞으로 나서며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혀있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좀 있으니… 저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겠지.
나는 그 동안 얌전히 집중시키고 있던 마력을 한꺼번에 퍼부어 지금껏 그들이 벨헬그와 소크헤어에게 쏘아냈던 마탄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를 그들에게 쏘아보냈다.
내가 발현시킨 마탄은 텅빈 허공을 거의 완전히 메우고 있을 정도였으므로, 그들에게 도망칠 곳은 없다.
마탄 한 발, 한 발의 위력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그들은 거의 수백발에 이르는 마탄을 맞았고, 온 몸의 뼈가 으스러진채 마지막 단말마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눈 깜짝할 사이라고 해야할까… 이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조악한 덕에 상황은 예상했던것보다 더 일찍 종결되었다.
* * *
"마스터 네론그라시아, 적어도 한 명은 살려두어야 했습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마스터 헤르닐은 흐트러진 망토 자락을 정리하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제일 먼저 벨헬그의 검에 쓰러진 자를 가르켰다.
"아직 살아있는 자가 있어요."
"… 다행이군요."
마스터 헤르닐은 느릿한 걸음으로 내가 가르킨 자에게로 다가갔다.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니 벨헬그와 소크헤어가 잡혀 있는 사람들의 안위를 살피고 있었다.
풀려난 사람들 중 기력이 남아 있는 몇 명은 그들과 같이 잡힌 사람들의 포박을 풀어주고 있었다.
… 일단, 해결되었군.
이 공동에 들어오기전 헤림다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게 연락을 해두었으니 이곳의 상황은 머지 않아 정리될 것이다.
"흑…."
풀려난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생환을 기뻐하는듯 했지만 곧 짙은 슬품에 물들고 말았다.
…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인 자들도 적지 않았겠지. 나는 잠깐동안 그들의 슬픔에 주목해 있다가 이내 마스터 헤르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그자를 심문하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공동을 짧은 시간내에 만들긴 쉽지 않았겠지. 너희들은 시장을 죽인 뒤 그의 지위를 이용해 이곳을 만들었나?"
"…."
그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는데, 팔과 다리에 피로 젖은 천조각을 감고 있었다. 마스터 헤르닐이 취한 응급조치인듯 했다.
… 대답은 없었지만, 심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문제였기에 마스터 헤르닐은 그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고작 열 명이 조금 넘는 인원으로 육천명에 가까운 헤림다르의 시민들을 어떻게 납치한 거지?"
남자는 입을 꾹 다문채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런 남자를 보고 마스터 헤르닐은 조금 난감한 모양이었다.
이 여자… 심문엔 별다른 능력이 없는 모양이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녀는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품 속에서 작은 나이프를 꺼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고문을 할 생각인가.
곧 들이닥칠 군대에게 넘기는 것이 바람직 할듯 한데….
그때였다.
갑작스레 이쪽으로 다가온 벨헬그가 발로 남자의 배를 차버렸다. 퍽! 하는 큰 소리가 사방으로 울릴 정도였다.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속에 있는걸 게워내기 시작했다.
"웩, 우엑- !"
벨헬그는 그것조차 기다리지 않고 또다시 그의 등을 발로 짓밟았고, 그는 속에서 게워낸 것들로 더러워진 흙바닥에 고개를 쳐박았다.
"개자식 같으니라구! 너희들이 죽인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 알고 있나?"
마스터 헤르닐은 슬며시 꺼내었던 나이프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 자는 군에 넘겨져 심문을 받을 겁니다. 이 정도 규모의 공동을 만들고 저 많은 수의 시민들을 납치할 정도라면 이들의 뒤엔 거대한 배후 세력이 있겠죠. 이자는 그 배후 세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전까지 죽어선 안됩니다."
"칫."
벨헬그는 여전히 강한 분노에 휩쌓여 있는듯 했지만, 곧 남자의 등에서 발을 떼었다. 그러고서 그는 마스터 헤르닐을 노려보았다.
마스터 헤르닐도 그에게 지지않고 시선을 마주쳤다.
잠깐동안, 그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건 마스터 헤르닐 쪽이었다.
"어리석었습니다, 벨헬그. 마스터 네론그라시아가 시기좋게 나서 도망치려는 다섯 명을 일망타진 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한 두명 정도는 놓쳤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상황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녀를 모른척할 수 있습니까?"
"시체를 보아하니 이미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생명을 잃은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수천 이라는 숫자에 단 한 명이 추가되는걸 막는것 보다는 이들의 의도를 파악해 그 이후에 나올 희생을 막는게 제겐 더 중요했습니다."
그녀의 답을 들은 벨헬그는 더욱 화가난 모양이었다. 그는 언성을 높이며 마스터 헤르닐에게 외쳤다.
"결국 일이 잘 풀리지 않았소! 보시오, 이들 중 이곳에서 살아 나간자는 아무도 없소. 거기다 한 명은 산채로 붙잡았지. 당신이 그때 나를 막지만 않았어도 그 소녀는- "
마스터 헤르닐은 냉엄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건 운이 좋았던것 뿐이죠. 저는 마법사고,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상정해야 합니다. 만약 이들이 이곳에서 벗어나는데 성공 했다면…."
"닥치시오!"
벨헬그의 거친 일갈이 거대한 공동을 울렸다.
저쪽에서 아직까지 사람들을 돌보고 있던 소크헤어가 이곳으로 염려섞인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마스터 헤르닐은 그의 일갈을 듣고 눈살을 찌푸린채 팔짱을 꼈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고, 잠깐 동안은 내쪽으로도 적의 섞인 시선을 보내오기도 했다.
"난 아직 젊고, 내가 살아온 세월은 얼마 되지 않지만… 나는 방금전 내 일평생을 안고갈 후회를 만들었소. 그게 뭔줄 아시오? 왜 당신이 내 앞을 막아섰을때 바로 당신을 밀치고 그녀를 구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오."
일평생의 후회….
"빌어먹을 마법사들! 검은 맹금에 항의를 하든 말든 알아서 하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이미 숨을 거둔 소녀의 시체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곧 소크헤어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바보같은 녀석, 울지마라. 너는 기사다."
벨헬그가 더욱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알고 있어, 나는 기사다. 그리고 울긴 누가 우냐, 이 빌어먹을 녀석아."
마스터 헤르닐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 작가의말
* 1만 1천자군요;; 5천/6천으로 나누어 올릴까 하다가 그냥 다 올립니다;
* 헤림다르 편이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수도로 돌아가 잠시동안 느긋한 템포로 일상의 이야기가 진행되겠죵.
* 성원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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